공부 생각 #1
꾸준히 지속되지 못 하고 단기간에 타올랐다가 팍 식어버리는 감정도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 년을 죽치고 앉아서 공부할 때는 이것이 나의 열정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였는데, 시험이 끝나고 난 뒤 관련된 서적 하나 끄적여보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열정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무엇 하나 자신있게 열정을 태웠다고 말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찍어먹듯이 한 일들이 많지만, 저변만 넓혔을 뿐 높게 쌓아올린 것은 없었다. 열정이 식으면 금방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되풀이 했다. 밑에서 보기에는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쭉정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스무 살 때 고만고만했던 사람들도 10년이 지나는 동안 각자가 열정을 가지는 분야에 있어서 준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반면 나는 위 그래프의 계곡에서 올라가지 않는 데에 만족했다. 대신 여기저기 찔러만 보고 다닌 덕에 경험담 따위를 썰풀이 하듯이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람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듯해보이는 내가 좋았기 때문에 나는 흥미로운 사람에 만족했다.
누가 나에게 외교관이 되고 싶은게 꿈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자신있게 "아니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수 년이 지나면서 그러한 열정은 사라진지가 오래다. 애초에 그렇게 오래 유지한 열정이 없기도 했고.
그럼에도 다른 일로 옮기지 않고 4년을 넘게 공부를 한 것은 열정보다는 전문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이것만큼은 내가 잘한다고 이번에는 자신있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공부하는 학생의 수준에서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작년에 2차를 붙고 당연히 몹시 기뻤으나, 기뻤던 데에는 합격에 한층 가까워졌다는 이유보다는 그간 공부 해놓은 것들이 인정받았구나 라는 마음 때문이 더 컸던 것 같다. 식어버린 열정이 조금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수 년만에 충족된 인정욕에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좋았다. 결론적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 까발려졌지만 그땐 그랬다.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여럿 있다. 내가 "여기저기 찔러만 보고 다니던 애"로 다시금 기억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내가 정말 (한 때는) 열정을 쏟았고, 그것이 증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트로피 마냥 들고 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열등감이고, 두 마디로는 유치한 생각이다.
모든 것들을 그냥 내려놓고 싶다. 내가 열정이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미성숙한 자아 때문에 이걸 붙잡고 있었는지는 결과가 나와도 모를 것 같다. 결과 날이 다가올 수록 숨이 막히는 이유는 불합격이 끔찍해서가 7할이고, 나머지 3할은 열정이 있는지도 모르는 이 시험이 나를 또 얼마나 쪼아댈 것인지가 두려워서이다. 두 달 정도 그냥 코마 상태에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