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아닌 생각 #3
병원에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괜히 발걸음을 돌려 상가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먼저 들렀다. 쓸데 없는 짓이 아니었으면 하고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한번 보았다.
서경증(書痙症)이란 필기도구를 잡은 손의 근육이 수축되어 움직이지 않는 증상을 의미한다. 손을 움직여보려고 힘을 줄수록 손가락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이해가기 쉽게 표현하면 한겨울 꽁꽁 얼은 손을 움직여보려는 것과 비슷하다. 병원을 예약한 이유는 바로 얼마전부터 재발하기 시작한 서경증 때문이었다.
I. 발생 (發生)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은 작년 2차 시험날이었다. 둘째 날인 국제정치학 시험날 정신줄 놓은 사람 마냥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렸고, 성대 수선관으로 걸어올라가던 계단에서 혼자 패닉을 했다. 시험 직전에 보려고 챙긴 내 가방 속 노트들은 종로 시내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을 테였다. 졸지에 할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시험장에 일찍 도착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히 주머니에 지갑 하나 있었기에 편의점에서 기본적인 필기도구 몇 개를 구매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의 난리에 첫날보다 몇배는 더 긴장한 상태로 고사실에 들어갔다. 사실 볼펜과 수정테잎만 있으면 답안 작성에 하등 지장이 없는 시험이긴 한데 괜히 큰일 난 것 마냥 불안했다. 어쩌면 등허리에 달라붙어 있어야할 가방의 부재에 의한 허전함과 중요한 순간에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는 자괴감이 불안감의 진짜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사실 냉방은 왜이리 세게 하는지. 아니면 그냥 긴장한 탓에 혈액순환이 안되는건지, 편의점에서 급매한 300원 짜리 모나미 볼펜을 부여잡은 손이 오들오들 떨렸다. 마찰열이라도 내보려고 바지춤에 손을 비비면서 암기했던 내용을 머릿속에서 현출해보려 애를 썼지만 불안감 때문에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삑-하는 호각 소리가 시험 시작을 알리고, 연습했던 대로 문제를 훑고 초안 작성을 위해 펜을 손에 붙들어잡았는데. 펜을 움직이려는데. 손이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이러지?
ㄱ을 쓰려했는데 ㄴ이 되고, ㄴ을 쓰려하니 ㅇ자가 쓰여졌다. 팔 끝에 달린 고무뭉탱이 같은 것과 10분 정도를 씨름하는데 눈물이 터져나올 뻔했다. 끝내는 손 대신 팔을 이용하자라는 전략을 세워서, 손을 펜고정게 따위로 취급하기로 하고, 최대한 정교하게 팔만 움직여서 답안을 써보기로 했다. 120분 호각 소리가 다시 삑-하고 울렸는데, 얼기설기 답안지가 채워져있기는 했다.
손이 굳는 증상은 셋째날 넷째날에도 반복되었다. 다행히 둘째 날만큼 꽁꽁 굳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뻣뻣해진 상태가 움직이기 불편했기 때문에 때문에 평소 손의 감각과는 다른 느낌으로 글씨를 잡아야 했다. 글 쓰는 속도도 이전 같지 않아서 "아는 걸 최대한 많이 써본다."라는 지난 반 년간 구축해놓은 전략에서 이탈해야 했다.
II. 재발 (再發)
2023년 2차 시험이 끝나고 이후 반년간은 손으로 답안을 작성할 일이 없었기에 손 굳는 문제에 대해서 구태여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시험 때 너무 긴장한 탓에 일시적으로 그런거겠거니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며 넘어갔다. 한달에 한번 정도 꼴로 친구의 생일 편지를 써줘야 할 때 아직도 손이 굳어있음이 느껴졌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올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답안 작성 스터디에서 반년 간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확인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글씨가 술술 써지는 것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정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의미다.
그러다가 4월이 되었다. 국제정치학 스터디가 끝나고 국제법 작성 스터디로 넘어갔다. 다소 썰풀이 하듯이 작성해도되는 국제정치학과 달리 국제법은 매문장을 쓸 때마다 관련된 근거를 떠올려야하기 때문에 첫 회차 날부터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내 의욕이 너무 앞선 탓이었는지 우리끼리 임의대로 문제 만들어서 하는 모의고사인데도 불구하고 긴장을 해버린 것이다.
그래, 시험 때 긴장할 바에는 지금 긴장하는게 훨씬 낫지. 실전 연습한다고 치고 미리 긴장 다 해버리자.
아니나 다를까.
타이머를 내려치고 문제를 풀려는데 손이 또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의 증상은 하루 이틀 사이에 삭아지지 않았다. 증상이 처음 발현되고 나서부터 날이 지날 수록 손의 경화 정도는 오히려 점점 심해졌다. 혼자 독서실 책상에서 경제학 연습문제를 풀 때도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눈으로 풀어야했을 정도였다. 혹시 나와 비슷한 케이스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했는데 나오는 바가 거의 없었다. 수험생 중에 "수전증"은 있어도 손이 굳는 증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상태를 방치한 채로 한 주를 보냈다. 끔찍한 일주일이었다. 딱 7일째 되는 날에 또 다시 국제법 모의고사를 푸는데, 움직이려 하지 않는 손에 힘을 너무 주다보니 이번엔 새끼 손가락 쪽 근육에 쥐가 났다. 답안작성을 그만두었다. 팬을 집어 던졌다.
그때 나는 정말 시험을 포기해야할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포기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공부하는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손이 굳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손이 굳었을 찾아오는 패닉과 패닉에 의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렇게 일년 또 공부하고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작년과 마찬가지의 일을 경험한다면. 그러면 나는 공부를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지금까지의 매몰비용을 생각하면 바로 포기할 건 아니었다. 친구의 조언 끝에 우선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조사를 해보니 손이 굳는 증상을 "서경증"이라고 한단다. 불안.. 신경... 키워드를 보니 신경외과 또는 정신건강과를 가야하나보다. 내 손은 물리적으로 굳어있는데, 정신적인 치료가 어떤 효과가 있을지 못미더웠다.
III. 진단 (眞檀)
화장실을 나와 다시 병원 입구에 다다랐다. 정말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았는데. 병원 문을 열면서 든 생각이다.
요즘이야 정신건강과를 가는 게 대수롭지 않은 거라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기억이 서려있어 예약 전화를 걸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일주일간 병원에 가지 않고 해결해보려 한 이유도 어떻게든 약 없이 혼자 해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기가 싫었나보다. 내 지금 상태가 온전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굳은 멘탈을 위해 오랜 노력을 투입했는데도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병원에 들어갔다. 대리석 재질의 반짝거리는 바닥, 잔잔한 클래식 음악, 과하게 모던한 인테리어, 괜히 눈웃음 짓는 간호사들. 우울함이라는 키워드와 반대되는 조합으로 맞춰놓은 걸텐데, 오히려 사람을 더 우울하게 만든다. 내가 정신병원을 만든다면 통나무 벽에, 바닥에는 난해한 패턴의 러그 깔아놓고, 시끄러운 락음악을 틀어놓아야지 라고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고나니 간호사가 아이패드 설문지를 건내주었다. 건강상태체크 설문지다.
...
나는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다. 약간 그렇다.
나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약간 아니다.
나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한다. 약간 아니다.
가끔은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렇다...? 다들 그러지 않나?
나는 자살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 아니다.
...
<약간 그렇다와 그렇다> / <약간 아니다와 아니다> 간에 어떤 기준을 두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대충 다 "아니다"에 체크하고 설문을 끝냈다. 나는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온 거지 우울해서 온게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 수도 있겠지만.
고시촌에서부터 신림역까지 온 시간이 아까워 대기실에서 조문집을 펼치고 있었다. 신림이니까 그래도 고시생 꽤나 있을 줄 알았는데, 대부분 환자가 직장인 정도 나이대로 보였다. 2030대가 제일 많아보이고 중년 노년은 없어보인다. 정신건강과에 대한 인식차이 때문이겠지. 사실 우리나라는 노인우울증이 정말 심한 나라인데. 노인을 위해서 정신건강과 비대면 진료가 확대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조문 안 외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쌤이 친절하게 맞이해주셨다. 간단하게 호구조사를 했다.
고시생이고. 외교관후보자. 아, 그게 원래 외무고시였는데 이름이 바뀐거에요. 네네. 가족 문제는 딱히 없고. 네, 좀 외롭긴한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호구조사가 끝나니 곧이어 나의 내면을 파고들려는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신다. 대화 내내 나를 지긋이 쳐다보시면서. 민망하여 애써 눈 마주치는 걸 피했는데, 책상 앞에 놓여져있던 티슈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난 울 생각은 없었다. 우울한게 아니라 손이 안 움직이는 거라구요. 사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우울한게 있을지도.
"저 당장은 우울증과 관련한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시험을 못 볼까봐 두려운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관련된 약이 있나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쌤이 말했다. 그게 아마 우울증 문제라고.
...
II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