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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cado May 17. 2024

인생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지

     돌아보면 아이러니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부친의 바람으로 고등고시에 매진했던 과거가 있다. 유년시절 부족함을 느낀 적 없었고,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출세에 대한 열망도 없었다. 나는 나이가 들면 오지의 고산에 올라 운무에 숨은 채 유유자적의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단 한 번도 관에서 입신양명을 펼치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내가 무려 3년이란 시간 동안 책과 씨름했다. 목표는 정했지만 목적은 없던 공부라 많이 괴로웠다. 그 시간들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우울한 흔적을 남겼다. 굴종적이고 나이브했던 낙타의 삶이었다. 

     두 번의 도전 끝에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황금 같던 지난 청춘이 참으로 허망했다. 이대로 미련에 젖어 신림동과 노량진을 전전하는 고시낭인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부모님 앞에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포기를 선언했고, 자주적 인생을 살겠다며 독립과 동시에 취직을 선택했다. 


     28살 늦깎이 나이에 매일 아침마다 압사의 공포로 가득했던 지옥철을 타고 강남의 한 금융사로 출근했다. 가슴을 조이는 셔츠와 목을 조르는 타이를 걸치고선, 데스크에 정박한 배처럼 우직하게 앉아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업무 이메일과 메신저를 주고받는 일로 소모했다. 그러다 가끔씩 서류를 검토하고 엑셀로 정리된 숫자를 보며, 상사에겐 조금이나마 다른 감흥으로 전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회사에서의 회의는 다섯 개의 사자 메카가 합체하여 거대하고 강력한 고라이언을 만들듯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모두가 살을 붙여 프로젝트로 키우고,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힘을 모으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의는 합리, 효율, 민주적이라는 미명 하에 이뤄지던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결국 모든 의사는 헤드의 의도와 기호에 맞춰 결정됐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런 부정론자들이 여기 한 곳에 모였나 싶다가도, 한편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며 또 부모라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에서 한 번씩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이 사태를 수습하는 기술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기술을 보고 배우며 이러다간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다고 느꼈는데, 그럼에도 파운더가 구축한 시스템에 의해 회사는 잘만 굴러갔고, 누군가의 실수도, 담당자의 부재도 시스템에 의해 문제 될 것이 없음을 느꼈다. 

     취직은 사회생활의 첫걸음이자 자신의 경력과 인생에 발판이 되어준다고는 하는데, 결국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면서 남이 만든 쳇바퀴 안에서 쓸모 있는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매월 입금되는 월급은 벗어날 수 없는 마약과 같고, 아담한 가처분소득으로 개인의 경제가 실현되며, 그 소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최면을 통해 직장생활은 자아실현의 과정이자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배운 것은 오직 시스템이었다. 나는 그저 회사라는 시스템 상의 흔하디 흔한 소모품이었을 뿐이었다. 대부분 위기 속에서 개인의 역량이 빛나고, 난세의 영웅처럼 수습한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내게 있어 취직 경험은 이 험악한 세상살이가 월급쟁이로는 답이 없고, 직장생활에 불만족 시 빨리 때려치우는 게 정답이란 사실을 깨우치는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의 젊음과 열정을 보다 창의적인 일에 매진할 것을. 이런 해탈 끝에 나는 평사원에서 임원으로 승진하는 꿈을 버렸고, 직장생활은 내 길이 아니라며 시스템을 구축했다. 


     첫 사업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편성을 마친 시스템은 마치 밤낚시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둡고 고요한 못의 가장자리에서 내가 펼친 여러 대의 낚싯대와 연결된 캐미라이트가 발광하다 물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거나 수면 위로 쭉 올라와 누워버리던 상황의 연속이었다. 누가 봐도 어류가 미끼를 물어 미늘에 걸린 확실한 상황이라 언제 챔질을 해서 낚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정도로 쉬웠다. 

     시스템에 대한 확신은 곧 자만으로 이어졌다. 그저 운 좋게 블루오션을 보았고, 운 좋게 분야의 선두로 서있었을 뿐인데, 나의 고객들은 케어가 필요한 낙타들 같았고, 나는 그 낙타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주는 사자인 줄 알았다. 돈이 물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이 세상에는 눈먼 돈이 정말 많고, 그 돈이 전부 나의 주머니를 영원히 거쳐가리라 착각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사자인 줄 알았다. 크나큰 자만이었다. 

     첫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욕심이 났다. 철저한 분석과 기획을 통한 전략 없이 시스템과 매뉴얼에만 집중하며 문어발식으로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치면 그때마다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기를 반복했다. 그 시절 내가 만만하게 보았던 서비스업은 직원 관리가 너무나도 중요했고, 무역업과 제조업은 생각보다 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지뢰처럼 터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자국들을 메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나날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나의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둘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포기했다. 사업의 포기는 쉬웠지만, 그 여파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복구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은 출구 없는 터널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감당키 힘든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인생이 바닥 치는 감정을 정확히 안다. 도무지 출구도 안 보인다. 돈도, 운도, 사람도 모두 안 따라주는 그런 시기가 펼쳐지면 삶이 각박해지니 마음에 여유가 없고, 주변 모든 것에 인색해진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도, 나의 현재와 미래에까지도 인색해진다. 그럼 어느 순간 계산적인 속물이 되어 이득 없는 관계나 일로는 조금도 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게 된다. 내면의 변화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외딴섬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처럼 고립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주변에 나를 도와줄 잘난 사람이 있다면 위험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돌파구를 찾지 않고, 잘난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한다면 더 빨리 망가지기 때문이다. 두렵고 낯선 특정 상황에 나를 내던져 모질게 몰아붙이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나아가야만 할 때 숨겼던 본성의 민낯과 마주한다. 더러운 유혹에 흔들리기 쉬우니까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추락하는 사람의 심리다. 떨어지는 칼날이라도 잡아보려고, 부정한 일로 손을 더럽히면 다신 돌이킬 수 없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긴 호흡으로 마음에 여유를 갖고 멀리 보아야 하는데, 막상 혼란한 상황이 닥치면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 

     나는 한동안 은둔하며 실패를 복기했다. 이때 정말 많은 공부가 됐다. 간혹 누군가 내 경험을 필요로 하면 당장은 이득이 없어도 성심껏 도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전진하기 위하여 벽을 더듬고 바닥을 기면서 나를 다듬는 시간이었다. 입구가 있다면 반드시 출구도 있는 법, 과일이 여물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회의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그저 견디자 어느새 터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시간이 흘러 2018년 겨울, CIS 현지전문가인 친구로부터 좋은 기회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2019년 여름에 유학을 준비했다.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현지에서 홀로 거소를 구하는 등 복잡하고 지난했던 여러 행정절차를 밟으며 어렵게 정착을 준비했다. 

     2019년 가을, 부친께서 돌연 큰 수술을 받게 되셔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명의를 만나 빠른 수술 스케줄을 잡을 수 있었고, 성공적인 수술과 재활 끝에 부친께서는 건강한 일상을 되찾으셨다. 부친께서 퇴원하셨던 2020년 1월, 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데 하필 그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발발했다. 당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국가마다 봉쇄정책을 내린 결과 하늘 길이 막혀버렸다.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이 사태가 잠잠해지길 바라며 호텔에 기거했고, 매일 뉴스만 보면서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곧 엔데믹 국면에 접어들 것이란 뉴스를 보면서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2022년 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내가 돌아갈 곳은 없어져버렸다. 불가항력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우리의 인생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전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어떤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주도적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늘 시련의 부침을 겪었고, 끊어낼 수 없는 번뇌에 빠져 들었다. 이참에 안식년 삼아 쉬어가자며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선 그저 글이나 쓰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또 다른 꿈을 품고 그리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언젠가 볕이 좋았던 날, 함께 미술관을 둘러보던 모친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폴 고갱은 유년시절 피난민 생활을 겪었고, 도선사와 주식중개인 같은 직업을 거쳐 경매를 통해 미술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고작 35세였단다. 취미로 시작한 일에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지. 때는 중요치 않단다. 네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진 아직 아무도 몰라. 그러니 다방면에 관심을 두고 언제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사진: Pecado 

글: Pec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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