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cado May 22. 2024

금연의 계기는 갑자기 찾아온다

     다가오는 부친의 생신을 미리 축하드리기 위하여 오랜만에 부자만 단둘이 점심식사를 했다. 예약한 자리에 착석 후 부자의 대화는 늘 그렇듯이 서로의 근황과 건강, 향후 거취까지 순탄하게 이어진다.

     부친께서는 늘 과묵하신데, 단둘이 시간을 보낼 때면 유독 노파심에 잔소리가 많아지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제를 전환하려고 지나가는 말을 하고는 하는데, 이날은 "식당의 뷰가 전반적으로 좋으나, 내 시야에서 전면에 바로 보이는 간판이 눈에 거슬린다."라고 중얼거리며 도피 삼아 화장실로 향했다.

     괜히 시간을 때우려고 세면대 벽면에 부착된 핸드워시 오토매틱 디스펜서에 손바닥을 대고 거품을 여러 번 받아서는 한참을 손을 비비고 주무르다 천천히 물로 헹궜다.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핸드크림을 손등에 짜낸 후 모두 흡수가 될 때까지 또 한참을 천천히 비벼 발랐다. 잠시 거울을 보면서 이 정도 시간이면 되겠지 싶었을 때 화장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그 사이 부친께서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살며시 돌리셔서 내가 언급한 간판이 가려지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도 모르게 실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대쪽 같던 분께서 이렇게 스위트한 면이 있으셨다니, 그동안 부친의 자상한 본래면목을 모르고 살았던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느라 잊고 지냈던가. 기분이 좋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넌 아직도 담배 피우니?" 낮술이 오랜만이라며 맥주 두 모금을 맛있게 삼키시던 부친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내게 질문하셨다.

     때마침 직원 분께서 잘 익은 신선로를 국자로 떠서 대접에 소분해 건네셨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에 담가 한 번 휘저으며 "예."라고 대꾸했다.

     "너도 느끼겠지만, 금연은 빠를수록 좋다."

     "네. 알지요. 그런데 저는 아직 금연할 생각이 없어요."

     "하기야, 나도 계획하고 금연한 것은 아니었다. 계기는 갑자기 찾아왔지." 부친께서는 허리를 곧게 펴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테이블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으셨다. 긴 호흡이 필요한 일장 연설이 짐작되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궁금했다.

     "그때가 아마 네가 군대에 가기 전이었을 거다. 남식이, 춘기, 희배와 등산 모임을 가졌지. 우리는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모여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던 길에, 산 중턱에서 춘기가 잠시 쉬었다 가자며 우릴 멈춰 세웠어. 춘기는 집에서 맥주를 얼려왔다며 배낭에서 맥주를 꺼내 한 캔씩 돌렸어. 갓 녹기 시작한 맥주는 손에 쥐기만 해도 그 청량함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시원했지. 날도 덥고 목이 타니까 살얼음이 낀 맥주가 참 꿀맛이었어.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맥주 한 캔을 순식간에 마시고는 일어서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하고 돌더니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눈앞이 하얘지면서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 한 10분 정도 호흡을 고른 후에야 정신이 들면서 '아, 이건 아닌데.' 싶더라. 그때 내 나이가 고작 마흔다섯이었단 말이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벌써 이러면 곤란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 후로 하루에 2갑씩 피우던 담배를 차츰 줄여가면서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너도 정신을 가다듬고 잘 생각해 봐. 언젠가 담배가 너를 잡아먹는 날이 도래할 것이고, 그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는 걸 느껴야 한다."

     부친께서는 이따금 맥주를 마실 때면 아찔했던 그날의 경험이 떠오른다며 담배는 백해무익하고, 흡연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며, 내게 금연을 권고하셨다. 틀린 말씀이 하나도 없다.


     어렸을 적부터 담배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에 흡연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사춘기가 오면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흡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담배맛도 몰랐던 애송이가 겉멋으로 피우더니 대학, 군, 직장생활을 거치며 애연가가 되었다.

     항상 뭔가를 바쁘게 하고 있던 와중에 잠시 잠깐의 틈만 생기면 담배에 불을 붙여 빠르고 깊게 연기를 빨면서 온몸으로 쫙 퍼지는 도파민을 느끼며 광분했다. 그 무엇도 확실치 않은 인생에서 반복적인 흡연을 통해 불안감을 해소하고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언젠가 흡연실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를 보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시간인데, 흡연으로 생의 결말을 재촉하는 꼴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때부터 막연히, 언젠가는 내가 결국 금연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였는지 이 날 부친께서 해주신 조언과 나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정신 또한 귀중한 유산이라 받아들이는 동시에 담배와 이별할 날이 가까워 옴을 느꼈다.






사진: Pecado

글: Pecado

작가의 이전글 인생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