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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Oct 19. 2024

나의 헌책 처분기2

1.

연초부터 구상해온 서재 '리모델링'을 거의 마쳤다. 리모델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봤지만, 실은 그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낡고 제각각인 책장들을 한 가지 형태의 새 책장들로 바꾸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남길 책과 버릴 책을 구분한 다음 남길 책은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꽂아두고 버릴 책(헌책)은 내가 세운  가지 원칙에 맞게 처분하는 일이다. (네 가지 원칙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이케아에서 구입한 가성비 높은 책장이 들어온 다음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2.

책을 정리하기 위해선 먼저 시효가 지난 책을 솎아내야 했다. 아직 읽지 않았으면서 언젠가 꼭 읽을 책과 이미 읽었지만 다시 읽거나 소장하고 싶은 책은 남기고 나머지는 버린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버릴 책과 남겨둘 책을 구분하기가 이번처럼 어려운 적이 없었다. 읽고 싶은지 아닌지, 소장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읽으려 하지만 살아생전에 아니 정신이 흐릿해지기 전에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다 읽었고 읽을 당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과연 소장해도 좋을 만큼 내 삶에 가치가 있을까. 이렇게 헷갈리는 책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3.

책을 솎아낸 다음엔 살아남은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다른 책장에 꽂아두어야 했다. 6년 전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 임시방편으로 꽂아두었던 것인데 이번에야 제대로 정리하는 셈이다. 크게 '철학&사상', '역사&문화', '정치&경제', '자연과학'으로 나누어 분류했더니 그런대로 모양이 갖추어졌다. 하지만 그 경계에 있는 책들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는 철학&사상과 정치&경제의 경계에 있고, 인지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인간 vs. 기계>는 철학&사상과 자연과학의 경계에 있고, 로버트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는 역사&문화와 자연과학의 경계에 있다. 어느 쪽이 더 우세한 지를 판별하기 위해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거나 책을 다시 들쳐보기도 했다.


4.

그전 같았으면 버릴 책을 처분하는 일로 골치 아팠을 것이다. 짐작컨대 지금도 적지 않은 애서가들은 헌책의 처분 문제로 고충을 겪고 있는 듯하다. 거의 3년 전 내가 그 고충을 써서 ‘브런치스토리’에 올린 ‘나의 헌책 처분기’ 100 꼭지가 넘는 내 글 중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 중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도 하루 10회를 넘나드는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어쨌든 그 글에 나와 있듯이 나의 네 가지 헌책처분 원칙은 지금도 유효하다. 문화적 의미의 보존, 공익성, 편리성, 환금성 그렇게 네 가지 말이다.   


5.

헌책 처분 제는 3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쉽게 해결되었다. ‘굿윌스토어’라는 자선단체에 기증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굿윌스토어’는 헌책뿐 아니라 헌 옷이나 중고 소형가전제품 등을 기증받아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장애인을 돕는 단체다. 전화만 하면 직접 수거해 가며 기부금 영수증도 발행해 준다(대표번호 1533-0091). 기부나 수거의 기준도 그리 까다롭지 않다. 제목으로 ‘나의 헌책 처분기 2’를 붙인 이 글이 앞의 ‘나의 헌책 처분기’와는 달리 헌책 처분에 관한 희망적인 내용을 담게 되어 다행이다.


6.

서재나 헌책(다 읽은 책)과 관련해 내가 아는 재미있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기호학자로 세계적인 석학인 움베르토 에코(1932~2016)와 관련된 일화. 그의 서재를 방문한 손님이 물었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 집과 연구실에 5 만권쯤 소장하고 있는 에코는 이렇게 대꾸한다.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것을 무엇하러 여기 두겠어요? 여기 있는 책은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는 앞으로 읽어야 할 책만 서재에 꽂아두었던 것이다.


서재에서의 움베르토 에코


다른 하나는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명강으로 유명했던 한태동 교수(1924~ )에 관한 일화. 그는 신학, 의학, 철학의 3개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으로, 소문에 의하면 책이나 논문을 읽고 나면 바로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겐 (집필실이면 몰라도) 서재는 물론 책장 자체가 없었다는 얘기인데, 사실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   


7.

작업실에 있는 책을 가져와 분류해서 꽂아두기, 거실에서 옮겨놓은 오디오의 전선을 제대로 연결하기, 그리고 액자나 앨범 등 책 이외의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이 세 가지 일을 끝내면 이번 나의 서재 리모델링이 완수된다. 그 다음에 여기서 나는 지금보다 더 우아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한 그 그림을 진열해 놓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때론 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서재는 나만의 작은 우주다. 나만의 우주는 두세 평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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