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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Dec 17. 2024

행복은 과연 자전거를 타고 올까?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4

1.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때는 교사도 학생도 모두 걸어 다녔다. 다만 미성숙한 학생들의 이동속도보다 성인이었던 교사의 이동 속도가 당연히 더 빨랐다. 중학교 때 학생은 여전히 걸어 다녔으나 교사는 대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교사의 이동속도가 학생들보다 훨씬 빨랐다. 자전거는 도보보다 대략 3~4배 빠른 이동수단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많은 교사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많은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오토바이도 자전거보다 대략 2배 이상 빨랐다. 시내버스가 생활화되지 않았던 지방 소도시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 내가 겪었던 일이다.      


2.

도보와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그 이후 등장했을 자동차, 조금 더 들어가면 대형/중형/소형으로 분류되는 자동차의 등급까지, 아니면 무궁화호/새마을호/KTX까지, 이동수단에는 엄격하고 가시적인 위계가 있었다. 이동 수단의 위계는 당연히 이동 속도의 위계를 만들었다.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1930년대 만들어진 이 동요에는 당시 매우 귀했던 이동수단인 자전거의 드높았던 권세를 보여준다. 이 동요의 작사가 목일신 선생(1913~1986)은 광주학생운동 참여로 퇴학을 당했을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한 분이었지만, 이동수단이 지니는 권력적 속성과 이로 인한 속도의 불평등에는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3.

“당신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겠다.” 이동 속도가 부와 권력 등 한 사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 나오는 이 말은, “모빌리티(mobility)는 권력이다”라는 말과도 통한다. 여기서 모빌리티란 대개 ‘이동성’으로 번역되는데, 구체적으로는 이동하기 위한 수단이나 그러한 수단을 제공하는 서비스 등에 총칭하여 사용되는 용어다. 이반 일리치는 1970년대에 나온 이 책에서 수송수단은 사회적 성공을 나타내는 표식이 되었으며, 새로운 수준의 속도가 생길 때마다 집중화된 권력은 반드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자체의 근거를 만들어낸다고 전제한 다음, “속도가 높아지면 동력은 불가피하게 소수의 좌석 밑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 대다수 통행자들의 시간 부족은 더욱 심화되며, 뒤에 처졌다는 느낌 역시 가중될 수밖에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동수단의 위계로 인한 속도의 불평등을 경고한 것이다. 그의 경고는 그 이후 현실이 되었다.      




4.

그림에는 폐지로 보이는 짐을 자전거 뒤에 가득 싣고 달리는 중년 남성이 보인다. 이런 자전거를 특별히 ‘짐자전거’라고 부른다. 1970, 80년대만 해도 거리에서 이런 짐자전거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속도의 불평등과 환경문제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자전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자전거는 보행속도인 시속 5~6킬로미터보다 3~4배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에너지는 보행의 5분의 1밖에 쓰지 않는 최고의 이동수단이라는 점,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이상적인 변환장치라는 점, 화석연료를 쓰는 모든 기계보다 열역학적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모두의 능력보다 이동능력이 뛰어나다는 점, 자전거 주행에 필요한 공공시설의 건설비가 자동차보다 턱없이 적다는 점 등이 그 이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제안과 경고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울려 퍼졌던 듯하다.      


5.

2007년 제주 올레길이 만들어진 이후 우리나라 전역에 퍼진 걷기 열풍과 ‘따릉이’로 대표되는 자전거 주행에 대한 공적 지원 등으로, 일리치의 뜻깊은 구상이 어느 정도라도 실현되고 있는 듯해서 다행스럽다. “산하(山河)는 본래가 인간이 연주할 수 없는 거대한 악기와도 같은 것인데, 겨울의 섬진강과 노령산맥은 수런거리는 모든 리듬을 땅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겨울의 산과 강은 서로 어려워하고 있었고, 자전거는 그 어려워하는 산과 강 사이의 길을 달린다.” 김훈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절창이다. 자전거가 아니라면 자연의 속살 같은 그 길을 어찌 찾아갈 수 있었겠는가.          


6.

학교 앞이나 내리막길 등에 있는 속도제한 규정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모빌리티에도 속도제한 규정을 두어야 한다. 이를 ‘모빌리티 정의(mobility justice)’라고 부른다. 모빌리티 연구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인 미미 셀러(Mimi Sheller)의 『모빌리티 정의』에는 모빌리티 정의의 첫 번째 원칙으로 “각 개인의 모빌리티의 자유는 상호성의 규칙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 즉, 다른 사람의 이동 역량을 짓밟거나 위협하거나 박탈하지 않아야 한다.”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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