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멍가게’라는 이름의 사회관계망 서비스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8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어린 시절 용돈은 늘 부족했다. 아니 용돈이랄 게 아예 없었다. 명절 때나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면 10원짜리 동전이 생기곤 했지만, 그마저도 걸핏하면 압수당했다. 그나마 용돈이라고 받은 건 초등학교 5학년이 한참 지나서였던 것 같다. 비정기적이기는 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꼴로 10원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고, 먹고, 보고 싶은 대상에 견주어 보면 그 정도로는 샘솟는 욕구를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머릿속으로만 궁리하던 계획을 실행했다. 돼지 저금통의 투입구를 칼로 살짝 넓힌 다음 어렵사리 10원짜리 동전을 두 개 꺼냈다. 후속 액션플랜은 일찌감치 짜두었다. 먼저 동네 구멍가게에서 10원으로 <뽀빠이>를 산다, 다음 만화방으로 가서 그 맛난 라면과자를 먹으며 만화를 본다...... 10원에 여섯 권을 볼 수 있는 만화책을 보는 내내 <뽀빠이>가 입에서 떠나지 않으려면 아주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것도 계산에 넣었다. 마침내 그 계획은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뿌듯한 만족감은 애써 감춘 채, 여느 때와 똑같이 친구들과 놀다 왔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도록 무덤덤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섰다.


하지만 어머니와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나의 수상쩍은 구매행위를 어머니에게 낱낱이 제보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 가게에서의 내 구매이력은 물론, 가게에서 나와 바로 건너편 만화방으로 들어갔다는 사실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나는 범죄행위를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내게 내려진 체벌과 훈계는 역대 급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자식을 더는 범죄자가 되도록 방치해선 안 되겠다는 어머니의 결심 탓이었던지, 그날 이후 용돈의 지급 빈도가 조금 더 늘어난 소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어렵게 확보한 용돈을 옆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그 아주머니에게 보복(?)을 가했다. (이런 걸 뒤끝 작열이라고 하나.)


2.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도시의 삶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일지언정 따뜻한 마을 공동체가 곳곳에 존재했다. 그 사정은 당대의 인기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1986년 11월~1994년 11월 방영)과 <서울의 달>(1994년 1월~1994년 10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의 특정지역(마을)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을 담은 이들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구멍가게가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구멍가게가 이들 드라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서울의 달>(65회)의 한 장면을 통해 먼저 확인해 보자.



(동네총각이 구멍가게로 들어오자)

구멍가게 집 딸: 안녕하세요?

동네 총각: 어 그래. 우리 보람이 이제 다 컸구나. 혼자 밥 먹을 줄도 알고.

구멍가게 집 딸: 나 내년에 학교 갈 거예요.

동네 총각: 학교에도? 좋겠다 보람이는. 학교에도 가서.

주인아줌마: (동네 총각에게) 장사 잘 돼요?

동네 총각: 차가 안 막혀야 잘 되든지 안 되든지 하죠. 근데 아저씨는 어디 나갔어요?

주인아줌마: 요즘 앞집 영숙 씨 따라서 일당 받고 야채 장사하시잖아요.

부지런히 벌어서 장가가요~. 처녀든 총각이든 묵혀서 좋은 거 하나도 없어요.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동네 총각과 가게 주인 딸내미의 관계가 저만큼 친밀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주인아줌마가 동네 총각을 보고 저렇게 결혼을 재촉한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처럼 개인 간 장벽이 높이 쳐져 있지 않은 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가족 이상으로 가깝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대화다.


당시 동네 구멍가게는 단순한 상업적 공간을 넘어,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정보 교류의 장소로 기능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며, 담소를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했다. 동네 소식이나 중요한 정보들이 구멍가게를 통해 퍼져나가기도 했다. 때로는 갈등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정겨운 공간이기도 했다.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과 <서울의 달>에서도 구멍가게는, 달동네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특별한 공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이들 드라마가 높은 공감을 얻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구멍가게는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생활공동체 내에 위치한 구멍가게는 마을의 일상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고, 가게 주인은 가게를 기반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동네 주민들과 하루하루를 공유하는 관계에 있었다. 가게를 통해 끊임없이 일상적인 교류가 이어지고 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판이 형성되었으니, 그 점이 구멍가게를 경제적 논리가 아닌 다른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는 원천이다.”


2022년에서 2014년까지 전라남도 일대 70여 곳의 구멍가게에 대한 현지답사 결과를 펴낸

『구멍가게 이야기』에서는 구멍가게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3.


일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일본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복잡한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있는 사람이 편지로 조언을 구하면,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인 나미야 씨가 편지로 진실한 조언을 해준다는 내용이다.


영화 <나미야 잡화점>의 한 장면


예를 들어 음악의 길을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이 음악 외길을 걸어간 것은 절대로 쓸모없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노래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낸 음악은 틀림없이 오래오래 남습니다.”라고 위로한다. 이 위로에 용기를 얻은 그 상담자는 다시 뮤지션의 길에 매진하여 인기가수가 된다.

하지만 상담자가 언제나 나미야 씨의 조언을 선택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당시의 솔직한 조언에 대해 나중에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며 고마워한다. “(...)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풍족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즉 나미야 씨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이 옳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이 편지는 결코 비꼬려는 마음에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 나미야 씨의 충고와는 다른 방향을 택한 사람도 있다는 것도 일단 알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잡화점의 기능이다. 소설에서 고령이 된 주인의 아들은 사람들이 다 역 앞 상가로 가는 현실을 들어 가게를 접으라고 권하지만, 나미야 씨는 거절한다. 그는 잡화점의 역할이 물건을 파는 기능 말고도 이웃과 소통하는 기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설령 판매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소통기능만큼은 유지하고 싶었다. 바로 그 때문에 고민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 내용의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진실한 소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의 잡화점과 한국의 구멍가게는 판매 제품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겠으나, 기능면에서는 똑같다고 봐야 한다.)


4.


2004년, 영국 캐넌밀스(에든버러 시의 한 지구)의 주민이었던 85세 이사벨라 퍼브스 씨가 사망한 지 5년 만에 자신이 살던 임대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영국의 주요 언론은 이에 대해, 영국의 노인 요양제도의 허점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쇠퇴해 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런던 시립대 피터 플레밍 교수는『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에서 어느 동네 주민의 해석에 주목했다. 그 주민은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테스코(세계적인 유통기업)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전에는 우리 동네에 정육점이나 빵집을 포함해 온갖 것들이 다 있었어요. 그런 곳에 가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대형 슈퍼마켓을 이용하면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훨씬 줄어들어요.” 몇 년 전 대형 슈퍼마켓 체인이 들어오면서 소통과 나눔의 공간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고립되어 갔는데,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현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플레밍 교수는 이를 신자유주의 정책의 총아로 불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으로 규정했다.


구멍가게가 대형 슈퍼마켓이나 대기업의 체인점인 편의점으로 대체되면서 상품의 다양성과 구매의 편리성은 좋아졌지만, 구멍가게가 지닌 소통공간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을 과연 발전이나 성장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5.


《은하계 환승터미널 구멍가게》는 봉천동이라는 서울 변두리 구멍가게가 외계인이 지구로 들어오는 나가는 환승구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주목받은 소설이다. 결국 이 소설은 외계인으로 보이는 누군가도 우리의 소중한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저마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손을 내밀어 주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져요.”라는 어느 독자의 평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는 우주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이 시대에도 구멍가게의 따뜻한 소통 기능이 필요하다는 역설이다.


요컨대 구멍가게는 아날로그 시대의 SNS(사회관계망 서비스)였다. 구멍가게가 사라진 이 시대의 자유인들은 편의점에서 매번 바뀌는 알바 생으로부터 구입한 생수를 들고, 카페나 도서관 아니면 공원이나 고궁에 가서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SNS(사회관계망 서비스)를 살피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땅 사면 배 아픈 이웃사촌, ‘기호네’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