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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진보의 피가 흐르는 꼴보수의 고장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지금도 난 누가 고향을 물으면 난감해지곤 한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내 경우 자란 곳은 태어난 곳과 다를 뿐 아니라 여러 곳이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은 있지만 나는 거기서 단 하루도 산 적이 없고, (3)과 같이 애틋하게 생각하는 곳은 아예 없다. 그러니 사전에서 정한 기준으로 보면 고향이 없다고 해야 맞다. 다만 사전에서 말하는 의미를 넓혀서, ‘어린 시절 제법 오랜 기간을 지내면서 추억을 쌓은 곳’ 정도로 해석한다면 대답할 곳이 있긴 있다. 실은 고향이라기보다 성장지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그곳, 다른 글들에서 그저 ‘지방 소도시’로 표현했던 나의 고향, 아니 나의 성장지는 바로 ‘강릉’이다. 그래서 누가 고향을 물으면 멈칫멈칫하면서도 대개는 강릉이라고 답해왔다. 지금은 서울에서 KTX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지만, 태백산맥에 막혀 오랫동안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던 곳이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이른 봄, 우리 가족은 평창읍에서 이삼십 리 떨어진 농촌 마을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했다. (행정구역상 평창군과 강릉시는 바로 붙어 있다) 거기서 초·중·고교를 마칠 때까지 딱 12년을 살았다. 『우리를 배반한 근대』서문에서 이사할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대관령 옛길


“고개를 넘으니 근대였다. 시공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탔다면 모를까, 어떤 공간을 지나니 새로운 시간이 나타났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 평창은 전근대 농촌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강릉은 도심지를 중심으로 근대적 풍모를 제법 갖춘 도시였다. (...) 요즘이야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리지만, 당시에는 아흔아홉 구비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심하게 비탈진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나절쯤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전근대에서 불과 네댓 시간 만에 근대로 진입했던 셈이다.”


2.

갓 이사한 우리 가족은 ‘영세 사람’이라 불렸다. ‘영세 사람’이란 강릉 토박이들이 대관령의 서쪽을 뜻하는 영서(嶺西) 지방에서 온 사람을 부르는 일종의 멸칭이다. ‘ㅓ’를 ‘ㅔ’로 발음하는 건 ‘먹이다’를 ‘멕이다’로 발음하는 사례처럼 중부지방 방언에서 간혹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영세 사람’이란 “살림이 보잘것없고 몹시 가난함”이라는 뜻의 ‘영세(零細)’에 ‘사람’을 붙여서 만든 조어로, 거기에는 영서지방 사람을 깔보며 하찮게 여기는 태도가 담겨있다. 타지에서 보면 영서나 영동이나, 더군다나 지금은 한 시간 거리도 안 되는 평창이나 강릉이나 다 거기서 거기 도찐개찐 아닌가. 그런데 그 좁은 공간에 다시 칸막이를 치다니.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다. 강릉 시내에 사는 본토박이들은 주문진, 사천, 정동진, 옥계 등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같은 강릉 사람인데도 어쭙잖은 텃세를 시전하기 일쑤였다.


모르긴 몰라도 ‘영세 사람’에 대한 텃세는 모질었다. 부모님이나 형·누나들이 어린 나에게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서 그렇지, 그 예상치 못한 텃세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고 나는 지금껏 믿고 있다. 내 기억 상자를 탈탈 털어보면 텃세로 의심되는 몇몇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사 후 처음 셋방을 살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타박했던 일(어쩌면 ‘영세 사람’이라는 말을 그때 그 아주머니에게서 처음 들었을지도 모른다), 주인집 딸내미가 자신과 동갑내기인 내 누나를 본체만체 외면했던 일, 그리고 몇 달 만에 그 집을 나와 다른 셋방을 찾아갔던 일 등. 나로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가 텃세였다고밖에 달리 추측할 길이 없다.



가족들은 ‘강릉살이’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첫 일이 년 동안 텃세에 더 자주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도 착한 우리 가족은 그런 대접을 통과제의라고 믿고 대체로 순응하면서 그곳 생활에 서서히 적응해 갔던 것 같다. 그 와중에도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토박이 친구와 단짝이 되었고 지금껏 기쁘게 교류하고 있으니, 텃세란 어디까지나 어른들이나 형·누나들의 소관사항인지도 모른다.


3.

“신라의 진골 귀족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중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와 부인(수로부인)을 납치해 갔다. 순정공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순정공이 그 말을 따르자 용이 다시 나와 부인을 되돌려주었다.”


『삼국유사』 권 2 기이 편 수로부인 조(水路夫人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백성들이 불렀다는 노래는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로 시작되는 ‘해가(海歌)’이다. 이 이야기에서 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용은 강릉 지방의 토호 세력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지방호족은 부(富)를 축적하고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어 지방관들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걸 알면서도 지방호족으로 짐작되는 ‘용’이 반역의 뜻을 품고 경거망동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시위를 통해 그 작태를 멈추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된다.” (엄광용, “용과 신물도 반한 절세미인, 수로부인”, <월간조선> 2019년 7월호 )


강릉은 지금도 3대 이상 거주하는 토박이 비율이 70% 이상인 지역으로, 토호들의 힘이 전국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힐 만큼 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앞에서 본 수로부인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듯, 토호의 위세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대단했다. 강력한 토호 세력은 오랫동안 정치적 보수성을 낳았다. 이는 해방 이후 거의 모든 선거에서 보수 계열의 정당 소속 후보가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만 보더라도 극우에 가까운 보수 인사가 국회의원으로 내리 다섯 번이나 당선될 만큼 보수적인 정치 성향의 뿌리는 TK 못지않게 깊다.


4.

하지만 조선시대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 중 네 명이 강릉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강릉이 뿌리 깊은 보수의 고장이라는 평가는 대번에 무색해진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조선 신분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며 역모를 도모하다 능지처참 형을 당한 교산 허균(1569~1618),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의 저자로 단종 폐위에 맞서 세조와 맞짱 뜬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1435~1493), 그리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당당하게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고 빼어난 회화작품을 남긴 신사임당(1504~1551), 허균의 누이로 남존여비 사상에 저항했고 시인으로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허난설헌(1563~1589)이 모두 강릉 출신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로 개성적인 삶을 산 두 사람이 모두 강릉 출신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여인은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거슬러, 그림과 시로 당대의 약자인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들이다. 하지만 우리 문학사 최초로 소설이라는 장르를 창조한 두 인물(김시습과 허균)이 모두 강릉 출신이라는 점은 별로 주목받은 적이 없는 듯하다.


5.

소설은 근·현대에 탄생한 문학 장르이다. 헝가리의 문예 사상가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는 『소설의 이론』에서, “세계문학상에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소설은, 바야흐로 기독교적 신이 세계를 떠나려고 했던 시대의 문턱에서 태어난 것”이며, “현대의 서사 형식인 소설은 이미 선험적 좌표와 형이상학적 고향을 상실하고 서사시적 총체성의 세계를 다시 찾으려는 고독한 현대인의 영혼이 직면하고 있는 역사철학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는 『한국 소설의 이론』에서, “중세적 질서가 위기에 처하는 현상은 17세기 이후 일반화되는데, 소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소설에서 전개되는 자아와 세계의 상호 우위에 입각한 대결은 중세적 질서의 위기 및 근대적 가치의 추구라는 전반적인 추세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김시습과 허균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창조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시습과 허균은 중세적 질서에 부딪혀 이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자아의식을 최초로 심각하게 느낀 선구자이다. (...) 사회적 모순을 드러낸 것 이상으로 이념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했으므로 자아와 세계의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는 심각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고, (...)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불가피하게 요청했다.”

요컨대 중세 사회의 모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 의식이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았다는 것이다. ‘강릉사람’ 김시습과 허균은 단순한 저항인이 아니라, 이처럼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떠안은 비판적 창조자였다.


6.

김시습과 허균 그리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이들의 공통점은 조선왕조를 유지하던 보수적인 기득권과 이념에 실천적으로 저항한, 근대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단 두 명의 여류 예술가와 우리나라 최초로 소설(한문 소설과 한글 소설)을 지은 단 두 명의 문인이 모두 강릉 출신이라니!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강릉은 김시습과 허균의 비판적 사상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빼어난 예술혼도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불임의 고장이 되어버렸다. (이들 네 인물 중 신사임당을 빼고는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도 그 위대한 계보를 잇지 못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토박이들은 여전히 영동과 영서를 구분하고, 시내와 변두리를 가르고, 터줏대감인 자신들과 뜨내기들을 나누고, 때로는 지역 내 출신 고등학교로 선을 긋고 있지 않은가. 지역 출신 권력자에게 줄을 서서 청탁하고, 그가 그 청탁을 부정한 방식으로 들어줘도 박수를 치지 않았던가.


아직도 내 기억 상자 속에는 50여 년 전 ‘영세 사람’이라고 무시당하던 어머니의 슬픈 뒷모습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회는 정체되고 역사는 퇴보한다는 것이다. 케케묵은 배타성과 철 지난 순혈주의로는 비판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이 격변의 AI시대를 결코 헤쳐 나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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