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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라는 숫자의 마법에서 풀려나기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21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이야기로 남은 기억도 있지만, 이미지로 남은 기억도 있다. 내 기억 상자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라는 문구다. 10 ― 100 ― 1,000으로 이어지는 이 시각적 운율은 너무도 절묘해서, 어떤 사진이나 장면보다 강렬하게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 문구는 박정희 식 파시즘을 미화하기 위해 제작된 팸플릿의 제목이었다. ‘유신’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이 체제는,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앞두고 전국에 배포된 홍보물 속에서 그렇게 절묘한 문구로 요약되었다. 결국 92.2%라는 비현실적인 찬성률로 유신헌법이 통과되는 데 이 팸플릿이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간결한 숫자의 리듬감이 국민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데 기여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신헌법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담화로 공표되었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다. 공표와 확정 사이 한 달여 동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교사와 학생 할 것 없이 국민투표 찬성 홍보에 동원되었다. 교사들은 거의 날마다 수업을 일찍 끝내고 할당된 마을을 돌았다. 그나마 이루어지던 수업도 대부분 유신 홍보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졌는데, 그중에는 유신헌법과 관련된 표어를 짓는 수업도 있었다. ‘새 나라엔 새 헌법, 새마을엔 새살림’이라고 적어서 냈더니 그걸 선생님이 예쁜 글씨로 써서 교실 한쪽 벽에 붙여놓았다. ‘새’라는 두운이 잘 맞아떨어져서 선생님의 눈에 금방 띄었던 듯하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 표어가 붙어있는 교실 사진이 졸업앨범에 실렸으니, 내가 유신정권의 부역자였다는 ‘빼박 증거’가 된 셈이다.


신동우 화백의 익숙한 그림으로 구성된 그 팸플릿을 내가 받아본 시점도 바로 그 한 달여 기간 중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라는 문구는 보는 순간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나는 이 막중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다. 10월 유신을 위해서는 북한의 ‘삐라’를 더 열심히 줍거나 눈을 더 크게 뜨고 수상한 사람을 찾아서 신고하면 될 것 같았고, 100억 불 수출을 위해서는 학용품을 더 아껴 쓰거나 국산품을 더 적극적으로 애용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1,000불 소득에 대해서는 느낌이 잘 오지 않았다. 그 의미도 크게 와닿지도 않았지만 그걸 달성하기 위해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2.


“(...) 정부와 국민이 또다시 굳게 뭉쳐 잘살기 위한 경제 시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때 국민소득 1,000불의 꿈은 이룩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이 1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40만 원. 한 집에 다섯 식구를 기준으로 한다면 집집마다 한 해에 평균 200만 원을 벌게 되는 셈이며, 한 달에 평균 16만 7천 원.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10월 유신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부푼 꿈을 실현시켜 보자는 것이다.”

*1972년의 1원은 2025년 현재 약 20원의 가치가 있다고 가정하면, 16만 7천 원=약 334만 원


그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유신 홍보영화 내레이션 중 한 대목이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한 마디로, ‘국민이 굳게 뭉쳐 국민소득 1,000불의 꿈을 실현시켜 보자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이러한 억지 논리를 통해, 대통령 간접선거와 연임제한 철폐를 통한 종신집권 등 반민주적 내용을 은폐하려 했다. ‘국민소득 1,000불의 꿈’은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얻어내기 위해 국민들에게 나눠준 일종의 당근이었던 셈이다.


10월 유신을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당시)


3.

1977년, 마침내 1인당 국민소득이 1천 달러를 넘어섰다. 원래 목표보다 3년이나 앞당긴 성과였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안정된 수입으로 셋방살이를 막 벗어났고 텔레비전과 전화를 갖추는 등 빈곤에서 벗어나 중산층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5천 달러를 달성한 시점은 1989년이었다. 그해에 나는 결혼했고 새로운 직장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1995년 드디어 1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때 대기업 계열사의 중간 간부였으나 직업에 회의를 느끼며 다양한 출구를 모색했다. 2만 달러를 돌파한 건 2007년이었다. 그때는 프리랜서와 강사로 일하면서 진로를 놓고 다시 갈등하고 있었다. 2018년을 전후하여 3만 달러를 돌파했다. 바로 그해 10년 가까이 근무한 공공기관에서 퇴직한 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국민소득과 연결해서 나의 지난날을 짧게 돌아보았다. 전체적으로 1인당 국민소득과 내 개인 소득이 비슷한 기울기로 상승하는 것도 아니었고, 내 소득과 내 행복(또는 삶의 만족)의 크기가 그리 깊은 상관관계를 보이지도 않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선 시점에는 소득 증가가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즉, 일정 소득 수준까지는 소득 증가와 행복의 정도가 동행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다른 요인들이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소득 증가가 행복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 주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소득 증가보다 사회 비교, 자아실현, 공동체 참여 등 다른 요소들이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4.

오늘날 우리는 어떤 나라가 잘살고 있는지를 판단할 때 자연스럽게 ‘GDP’의 숫자를 떠올린다. 이 수치는 마치 발전과 풍요의 당연한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지표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편의적으로 고안된 발명품이다.


GNP 개념을 창안한 사이먼 쿠즈네츠


그 시작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정부는 심각한 경기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경제의 총체적인 규모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이때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는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생산) 개념을 창안했다. GNP는 일정한 기간에 국민이 창출한 총소득을 집계한 수치였고, 경제 회복과 정책 판단을 위한 기준으로 유용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GNP가 군수 생산과 자원 동원의 기준으로 활용되며, 미국 전시 경제의 관리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이후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을 수치로 보여주는 지표로 기능하면서, 경제 규모가 곧 국력이라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GNP는 시간이 지나면서 국내총생산(GDP)으로 개념이 바뀌었고, 그 수치 하나로 ‘국가의 수준’을 판단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 수치 중심의 발전관은 오늘날 그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1962년 GDP에 대한 열광이 정점에 오를 무렵, 쿠즈네츠는 자신이 개발한 지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오독되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작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생산에서 어떤 요소들이 성장해야 하는지 정하지도 않고 (...) 성장의 대가, 비용은 무엇인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전체 성장률이 1년에 몇 퍼센트 상승해야 한다는 식으로 몰아대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라며 자신이 창안한 개념을 스스로 비판했다. 메리 셰리 소설의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처럼 자신의 창조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GDP의 정치학』에 나오는 얘기다.


5.


“GDP는 대기오염과 담배 광고, 그리고 고속도로 위의 즐비한 시체를 수습하는 구급차까지 계산에 넣습니다. 또한 우리 집에 설치하는 특수 자물쇠와 그 자물쇠를 부수는 사람들을 가두기 위한 감옥을 유지하는 비용도 계산에 넣습니다. 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분별한 도시의 확장 속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네이팜탄도 계산에 넣고 핵탄두도 계산에 넣으며 도시 폭동을 진압할 경찰 장갑차도 계산에 넣습니다. (...) 하지만 GDP에는 아이들의 건강, 그들이 받는 교육의 질, 그들의 놀이가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 시(詩)가 갖는 아름다움이나 우리의 결혼이 갖는 결속력, 우리의 공적 토론이 갖는 지적 수준이나 우리 공무원들의 청렴성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트나 용기도, 우리의 지혜나 배움도, 우리의 열정이나 애국심도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것을 간단히 계산해 냅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존 F. 케네디(왼쪽)과 로버트 F. 케네디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친동생이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암살당한 로버트 F.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 내용이다. 『GDP의 정치학』의 저자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더욱 신랄한 비판을 덧붙인다.


“GDP는 커다란 거짓말 위에 세워진다. 이 거짓말은 시장이 부의 유일한 생산자라고 말한다.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것, 화폐에 기반을 둔 정형화된 금융 거래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와 경제의 안녕에 얼마나 중요하든 간에 계산되지 않는다. 가격표는 GDP의 궁극적 상징이다. 끊임없는 생산과 끝없는 소비가 여기에 내재한 가치다. 내구성, 재활용성과 자가 생산은 최악의 적이다. 오래가는 것들은 GDP에 해롭다. GDP는 한번 매겨진 가격으로만 계산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가계는 소비자의 철창으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미 세계 곳곳에서 GDP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표들이 모색되고 있다. 부탄의 ‘국민총행복(GNH)’, 뉴질랜드의 ‘웰빙 예산’, 라틴아메리카의 ‘Buen Vivir(좋은 삶)’ 철학 등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삶의 질, 공동체의 연대, 생태의 회복력에 가치를 둔다. 경제학자들은 GPI(진정한 진보 지표), HDI(인간개발지수), 행복 지수, 지속가능성 지수 같은 다양한 대안 지표들을 제안하고 있다.


6.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골목과 공터는 대기업이 지은 브랜드 아파트에 파묻혀버렸다. 어머니가 두부나 간장을 사러 가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오던 구멍가게가 있던 곳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나 똑같이 생긴 편의점의 알바 생이 무심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라디오나 전축이 고장 나서 달려가면 언제든지 감쪽같이 고쳐주는 동네 전파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 과연 골목과 구멍가게와 전파상이 없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온 다음 걸어서 40분쯤 걸리는 작업실에 도착한다. 거기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가끔은 오후에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주변을 산책한다. 신발이 해지거나 우산살이 부러지면 근처 구두수선 가게에 맡겨 고쳐서 쓴다. 책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너 군데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지인을 만나면 트레킹이나 가벼운 등산을 한다... 요 몇 년간 나의 주요한 일상들이다. 이렇게만 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할 때가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하는 걸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GDP의 증가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불행한 삶을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아파트, 더 많은 소비, 더 높은 수출액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며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다. GDP는 여전히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발전은 단일한 숫자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개방성에서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무엇을 진정한 성장이라 부르며, 어떤 삶을 진정한 행복이라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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