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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능력’과 ‘일하지 않을 용기’

이야기가 있는 펜드로잉 24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1966년은 ‘일하는 해’였다. “올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라. 일하는 팔다리에 김이 솟는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봄부터 초등학교 스피커에서 아침마다 울려 퍼지던 ‘일하는 해 노래’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해 벽두에 발표된 신년사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나는 여기서 다시 올해를 ‘일하는 해’로 정하고 근면과 검소와 저축을 다시 우리의 행동강령으로 삼아, 증산·수출·건설에 총 매진할 것을 모든 국민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는 소비를 유혹하는 광고로 대체되어, 사람들은 광고를 통해 자극된 욕망을 상품으로 소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의 일하라는 호소는 ‘자기 착취’로 대체되어, 한국인은 그 누구의 호소나 강요 없이 스스로 밤낮으로 일한 결과 OECD 회원국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2.


수년 전 고교 동기 송년 모임에 갔을 때의 일이다. 각자 돌아가면서 간단하게 근황을 말하는 순서가 있었다. 대부분은 자기가 직장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 사업이 얼마나 잘 되는지, 재테크 성과가 얼마나 좋은지 따위의 세속적인 출세의 잣대로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몇몇 친구는 출세의 기준에 못 미쳐서 미안하다는 듯이 마치 벌서는 자세로 쭈뼛쭈뼛 말했다. 그들의 얘기인즉슨 내년에는 반드시 임원으로 승진해서, 큰 프로젝트를 따와서, 주식 종목이나 상승지역을 잘 골라서 출세 대열에 서겠다는 거였다. 나는 뜨악했다. 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마치 오래된 승용차가 언덕을 오르면서 그렁그렁 거리며 용을 쓰는 듯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시가 있었으니, 바로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가 쓴 <초대>였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 엮음)이라는 시집에서 보고 어딘가에 메모해 둔 시였다. 나는 부리나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그 시를 확인하고는 순서를 기다렸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자 다짜고짜 그 시의 첫대목을 읊었다.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친구들은 웅성거렸다. 나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생뚱맞다는 내색을 했고,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친구들은 “쟤는 아직도 저렇게 사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 동기 모임에 가지 않기로 작정하면서, 왜 그들이 <초대>의 시인이 알고 싶어 하는 답을 내놓을 수 없게 되었는지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3.


칼 마르크스는 1845년 무렵 집필한『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노동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책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아침에는 사냥하고 점심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가 되면 단순히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을 넘어, 인간이 사회적 생산 활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기반으로 추진된 공산주의 실험들은 그가 예상했던 바와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며 결국 역사적 실패로 귀결되었다.


마르크스가 그린 미래의 삶을 두고, 자본주의에 가장 비판적인 이론가가 꿈꾼 이상향일 뿐이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후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세계적인 석학이 그와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한 강연에서 ‘우리 손주들을 위한 경제학적 예측’이란 자신의 논문을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100년 내로 경제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거나 적어도 해결 방법이 보일 것”이라며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이 되리라 예측했다. 그는 그때쯤이면 높은 수준의 기술과 경제적 풍요로 노동이 불필요해질 것이며, 결국은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정한 시한이 5년 남은 지금, 그 예측이 맞았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1883~1946)


케인즈와 동시대를 산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1935년에 나온『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그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이 책에서 ‘노동이 미덕’이라는 신념이 현대 사회에서 악을 양산해 내고 있으며 행복과 번영을 원한다면 오히려 노동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여가 시간을 통해 예술과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이유였다. 또한 그는 이미 그 당시에 하루에 4시간만 일해도 전체 인구가 충분히 생활할 수 있으며, 나머지 시간을 여가 또는 게으름에 이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19세기의 마르크스 그리고 20세기의 케인즈와 러셀이 하나같이 인정한 것은 자본주의의 무한한 생산력이었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능력은 그들이 예측한 것 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순진하게도 생산성 향상의 결과가 노동의 단축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다. 원래는 10명의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해서 100개의 물건을 만들었는데, 생산성의 향상으로 똑같은 10명의 노동자가 똑같은 100개의 물건을 만드는 데 4시간 걸렸다고 해보자. 그러면 노동자는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4시간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고 그들은 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이후 노동자들은 남은 4시간 동안에도 계속해서 일했고, 심지어는 두세 시간을 더 일해야 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4.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00년대 초 이 슬로건을 내세운 어느 카드회사 광고가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던 적이 있다. 이 광고가 단순히 노동자들에게 휴식을 장려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광고의 주체(광고주)는 ‘당신’으로 호명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소비생활, 곧 소비자로서의 삶이다.


이 광고의 카피(문안)를 보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은 본문이 나온다. “열심히 일한 당신은 더 좋은 차를 타야 하고, 더 멋진 혜택을 누려야 하고, 더 멋진 세상을 만나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날 권리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은 대접 받아야 합니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즐겨야 하고, 성산포 일출을 보러 떠나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의 모든 권리를, 이제 H카드가 찾아드립니다.” 그리고 그 아래 H카드가 제공하는 구체적인 혜택이 나열되어 있다. 자동차 구입, 쇼핑, 영화, 호텔, 콘도, 렌터카 할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이 광고(곧 광고주)가 노리는 “떠나라”의 실체는 휴식이 아니라 자신의 상품(곧 H카드)에 의한 소비행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떠나긴 떠나되 H카드를 사용해서 차를 사거나 렌트하고 호텔이나 콘도도 빌리고 쇼핑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소비생활을 즐긴 후에는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하고, 그런 다음엔 다시 떠나서 소비생활을 즐기고,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한 다음 다시 떠나서 소비생활을 즐기고... 이렇듯 이 광고는 ‘일과 소비의 무한반복 게임’을 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 광고가 나간 후, ‘당신’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한 많은 사람이 그 제안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어길 수 없는 규범이거나 명령이었던 셈이다.


5.


앞에서 소개한 세 사람의 결정적인 한계는 소비와 광고의 역할을 몰랐거나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20세기 들어 생산력이 높아지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된 제품을 사줄 소비자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통적 유대, 공동체 의식, 자급자족 등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한 그 목표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를, 소비를 긍정하는 새로운 가치로 대체함으로써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했다. 바로 이때 소비에 가치의 중심을 두는 사고방식인 ‘소비주의(consumerism, 소비지상주의라고도 함)가 탄생했다. 경제학자 갤 브레이스는 “자본주의에서 소비자 필요가 지속적으로 증폭되는 현상은 노동 감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감추는 정교한 사회적 위장술”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소비주의가 형성되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광고였다. 광고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점점 더 많이 소비할 필요를 심어주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요한 원하는 물건을 살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게 된다. 이렇듯 광고의 역할은 인간의 욕망을 확장하고 필요를 생산함으로써 소비의 의무를 낳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곧 노동의 확대로 이어졌다.


6.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가치만큼만 지불하고, 그 이상으로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 즉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이윤을 얻는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케인즈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불평등, 불황, 실업)는 인정했지만, 이를 자본주의 자체의 내재적 모순이나 착취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즉 그는 자본가의 착취 자체를 부정했다. 결과적으로는 케인즈가 이긴 것 같다.


1950년대 구직자의 모습


하지만 마르크스도 케인즈도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철학자 한병철은『피로사회』에서, 개개인의 ‘자기 착취’를 신자유주의 시대 가장 큰 특징으로 규정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해 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착취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향해 강제하는 형태가 아니라,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행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가 ‘성과 주체’로 규정한 현대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높은 성과를 인정받고 더 많은 보상을 얻는다.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시키는 사람도 없건만 나는 나의 자유의지로 죽도록 일하고, 그 결과로 죽을 만큼 피로해진다.”


『일하지 않을 용기』에서는 자기 착취의 개념을 ‘고용가능성’이라는 용어로 변주한다. 고용가능성이란 노동자가 늘 자신을 고용될 수 있는 조건에 놓이도록 스스로 갈고 다듬는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는 스스로 무한한 잠재력을 끝없이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노동자의 고용가능성 추구로 인해, 이전까지 노동시간에 국한되었던 착취의 공간적·시간적 경계가 흐려지는데, 이 책에서 이를 ‘탈중심적 착취’라고 부른다. “항상 지금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배우는 노동자는 자신의 성격과 성과가 적합한지 의심하면서 현명하게 시간을 쓰고 있다는 만족감을 결코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고용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끝이 없는 자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비극의 길을 걷는다.” 그는 현대인의 삶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7.


『일하지 않을 용기』에는, 상업적 부를 생산하지도 소비하지도 않는 자유시간은 자본주의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자본주의는 자유시간에도 사익이 창출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산성 향상으로 확보된 시간을 낚아채어 추가 노동을 창출하도록 되먹인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어진 거의 모든 시간을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데 쓰는 나는 반드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가 원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


고교 동기 모임에 마지막으로 나간 지도 수년이 지났다. 소비의 유혹과 자기 착취를 통해 ‘일을 강제하는 힘’이 내면화된 결과 그들의 그런 뜨악한 반응이 나왔으리라 추측한다. 그들도 대개 제도적으로는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은퇴할 나이를 넘겼다. 그날 이후 그들은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게 되었을까? 생존을 위해서 하고 있는 그 무엇을 여전히 자신의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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