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 서문
1.
평범한 택시 운전사 김만섭 씨는 어느 날 우연히 외국인을 태우고 광주로 간다. 그가 태운 사람은 독일인 기자 피터였고, 그날이 바로 1980년 5월 18일이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그는 훗날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하게 된다. 1천2백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택시 운전사> 이야기다.
1973년 발표된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에서 떠돌이 노동자 영달은 고향 삼포로 가는 정 씨와 술집에서 도망친 작부 백화를 우연히 만나 동행한다. 세 사람은 함께 눈 내리는 길을 걸으며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한 사건을 통해, 급격한 산업화에서 소외된 민초들의 뿌리 뽑힌 삶을 읽어낸다.
개인적 경험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기억 상자 속에 머문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공통 경험과 겹치면서 사회·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그리하여 <택시 운전사>에서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삼포 가는 길>에서처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현상의 징후가 되기도 한다. 훗날 공동체의 치부를 드러내는 전조가 될 수도 있고, 공동체의 영광을 알리는 전령이 될 때도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그리 넓지 않은 국토에서 일찌감치 중앙집권제도가 자리 잡았고 크고 작은 정변도 잦았기 때문이다. 같은 세대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비슷한 제도와 정책, 사건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나는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끝자락에 태어나, 수많은 경험의 관문을 지나 어느덧 나이 예순을 넘겼다. 다른 베이비부머와 마찬가지로, 내 삶의 여정에는 농경시대와 산업시대, 정보화시대 그리고 얼마 전부터 시작된 AI시대의 흔적이 함께 녹아 있다. 나의 정체성은 이 네 가지 이질적인 시대를 거치며 체험한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개인적 체험보다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경험, 즉 공통의 경험에 주목했다. 물론 그 경험들이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늘 극적이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바로 그 공통의 경험이야말로 우리 공동체의 집단적 원체험(原體驗)으로서, 오늘의 우리를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러한 공통의 경험을 되짚어보며, 그것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모하거나 지속되었는지, 또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를 탐색한 기록이다.
이 책은 근현대사의 그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 《우리를 배반한 근대》와 궤를 같이한다. 전작에서 근대의 가치들이 다수의 염원과는 달리 특정 세력의 이익에 복무해온 과정을 짚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 가치들이 나를 포함한 베이비붐 세대의 삶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살핀다. 근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전작을 쓰게 했다면, 이번에는 ‘시대와 한 개인의 삶은 어떻게 교차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나를 다시 글쓰기로 이끌었다.
2.
우리 사회는 지금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A.I. 혁명이다. 누구도 그 파급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 사회는 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힘겨운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런 시점에 근대나 과거의 경험을 논하는 일이 한가한 복고 취미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만 돌아보면, 전근대적 특권을 지키려는 수구 세력의 퇴행적 행태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전통사회의 낡은 유산이라며 외면했던 가치들이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규범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렇듯 겉으로는 전근대와 근대를 지나 탈근대가 도래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전근대의 그늘이 사회 곳곳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기에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선 과거를 성찰해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다. 이 책에서 나는 연어의 심정으로 과거를 거슬러 올라, 그 속에서 오늘의 좌표와 미래를 향한 단서를 찾으려 했다.
몇 해 전 어느 진보 단체는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진보가 어쩌면 하나의 착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란 역사가 반드시 진보한다는 굳은 믿음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역사가 진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전작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다시 확인하게 된 사실은, 역사는 도돌이표처럼 순환하며 반복되거나 아예 퇴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 사관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던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3.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유명한 첫 문단이다. 이 소설은 1775년부터 1793년까지, 프랑스혁명의 준비기부터 공포정치 시대에 이르는 약 15년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 첫 문단은 혁명의 이상과 희망이 광기와 피로 얼룩진 공포와 절망으로 변모하는 그 시대의 모순을 시적 운율로 압축한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디킨스가 이 소설을 집필한 1859년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었다. 그는 18세기 프랑스혁명을 소재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의 양극화와 빈곤 문제 등 19세기 영국 사회의 모순에 대한 경고를 담고자 했다.
그런데 이 글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특정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문장들은 인간이 만든 모든 사회와 문명에 내재된 본질적 모순을 관통한다. 진보와 퇴보, 희망과 절망, 지혜와 어리석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간 역사의 속성이다. 이 글이 1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문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삶의 모순과 불안정성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베이비붐 세대의 일원으로 살아온 지난 육십여 년 역시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생략)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라고.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이 책에도 디킨스가 포착한 그 역설이 옅게나마 깔려 있다.
4.
이 책은 한 인터넷신문에 연재했던 ‘이야기가 있는 다큐 드로잉’을 토대로 완성되었다. 처음엔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사진들을 펜 드로잉으로 옮겨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재가 계속되면서 내 경험, 역사적 사실, 인문학적 해석이 어우러져 글의 깊이와 풍성함이 더해졌다.
그렇게 쌓인 28편의 연재 글에 다른 매체에 발표한 6편을 더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글 전체가 일관된 문제의식과 흐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발표 당시의 문장을 다듬고 내용을 보완했다. 34편의 글을 ‘장소’ ‘개념’ ‘사람’ ‘사물’이라는 네 가지 범주로 분류했는데, 돌이켜보니 이 네 범주는 내가 세상을 마주한 네 개의 창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은 ‘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이다. ‘네 겹의 시간’은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은 앞서 말한 ‘네 개의 창’, 즉 장소·개념·사람·사물이라는 네 가지 범주를 뜻한다.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들은 이 네 개의 창을 통해 세상과 마주하며 육십여 년을 살아왔다. 더 깊게는 네 개의 시대, 즉 농경시대·산업시대·정보화시대·AI시대를 의미한다. 베이비부머들은 짧은 기간에 이 네 시대를 모두 경험하며 격동의 세월을 살아냈다. 이 제목을 통해 그 압축된 시간의 무게를 담고자 했다.
이 책이 베이비부머들에게는, 때로 남루했을지언정 더러 영광스럽기도 했던 그 세월을 버텨낸 데 대해 서로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다. 자식뻘인 MZ세대에게는,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오늘의 조건과 내일의 과제를 알고 더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략)
※《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는
예스24(https://m.yes24.com/goods/detail/167384678) 등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