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았구나! 속았어!
잘못 울린 밤의 종소리를 따르다 보니 ―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구나.”
- 카프카, <시골 의사> 중에서
서점 <카프카의 밤>이 아니었다면, 연산동은 나와 별 인연 없는 곳으로 남았을 것이다. 한 도시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도, 어떤 동네는 영영 미지의 장소로 남기도 한다. 연산동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어느 날, 빌릴 책이 <연산도서관>에 있어 버스를 두 번 타고 그곳까지 가게 됐다. 버스에서 내리자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폐관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고 말았다. 허둥대다 순찰 중이던 경찰의 도움까지 받으며 겨우 당도할 수 있었다. 무사히 책을 빌리고 가쁜 숨을 진정하며 나오는데 도서관 바로 정면에 <카프카의 밤>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작은 서점이었다. 마침 책방지기가 출타 중이어서, 창 너머로 홀린 듯이 책방을 구경했다. 카프카 전집과 동네 서점 에디션, 그리고 독립 출판물 들이 눈에 띄었다. 코너에는 안락의자 하나와 긴 스탠드 조명이 놓여 있었는데, 누군가의 서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친밀하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푹 파묻혀 보고 싶었다.
얼마 안 가 <카프카의 밤>에서 진행하는 독서모임에 참가하게 됐다. '밤의 카프카'와 영혼의 쌍둥이인 책방지기,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불러모아 책을 읽어준다는 초등학교 교사,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 자동차 딜러에서 연극배우로 변신한 중년의 남성 등이 주요 멤버였다. 참여자들은 매시간마다 질문을 준비해 갔고, 독서교육 전공자인 현지 씨가 그 질문들을 노련하게 배치해서 대화를 이끌어냈다. 한두 줄의 질문들은 풍성해지고 깊어졌고, 다음 시간에 그것을 글로 써서 또 한 번 나누었다.
<카프카의 밤>과 <연산도서관>이 만나 독서모임의 규모가 확장되기도 했다. 2019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으로 진행된 <카프카처럼 읽고 카프카처럼 쓰기>가 그것이었다. 서점 <카프카의 밤>을 드나들면서도 다시 카프카를 읽어볼 생각은 못했었는데, 비로소 카프카를 다시 만날 기회였다.
카프카의 두꺼운 단편집을 처음 샀던 것은 이십여 년 전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난해한 코드로 가득한 그 미로를 향해 나아가지 못했다. 책은 쭉 서가에 꽂혀 있기만 했다. 서울로 취업을 하면서 함께 상경을 했고, 그후 낙향했으며 그 후 이사를 갈 때마다 서가에 내내 머물렀다. 아주 긴 잠이었을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 중 단편 <법 앞에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시골의사> 그리고 중편 <변신>을 스무 명 남짓 되는 분들과 함께 읽었다. 동네 주민들을 비롯해서 평소 연산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던 분들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연령과 성별, 직업의 사람들과 매주 만나 카프카를 읽었다. 온라인이 아닌 현장에서 집단지성의 향연이 펼쳐졌다. 한 마디씩 던지는 말들에서 반짝반짝 스파크가 일어났다. 무심코 던진 말에 유레카를 외치기도 하고 덜 익은 생각을 함께 뭉치고 익히기도 해보았다. 몹시도 멀게 느껴졌던 프라하의 카프카는 연산동에서 비로소 윤곽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법 앞에서>는 불과 두세 페이지의 짧은 단편이지만, 기만당한 시골 사람의 한평생을 얼얼하게 보여준다. 시골 사람은 문을 통과할 수단, 혹은 부술 수단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채 문지기가 문 안으로 들여보내 줄 날만을 기다린다. 그러다 임종이 다가와서야 그 입구가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었음을 알게 된다.
<법 앞에서>가 문으로 들어가는 데 실패한 시골 사람의 이야기라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우리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 원숭이의 이야기다. 시골 사람의 무능함과 원숭이의 영리함이 대비된다. 빨간 피터는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라며 자유'와 '출구'를 구별해낸다. 그리고 기어이 출구를 찾아 ‘슬그머니 달아나는’ 데 성공한다.
<시골 의사>는 어떠했나. 카프카는 이 이야기에서도 자기운명의 고삐를 제대로 움켜쥐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한다. 시골 의사는 환자의 상처가 지닌 깊이를 파악하고, 조언도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임무수행에 필수라 할 수 있는) 말 관리를 허술히 하고 자기 집에 무엇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로자와 더불어 직업, 집까지 빼앗기고 만다. 현세의 마차와 비현세의 말을 타고 이리저리 떠도는 의사의 모습은 ‘책임’과 ‘자기구원’ 중 그 무엇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마는 운명의 불가항력(act of God , 不可抗力)을 보여준다.
<변신>의 그레고리는 아버지가 이룬 규모의 부동산을 유지하고, 아버지가 진 빚을 갚느라 ‘돈 버는 기계’로 역할하다 소진된다. 안락함을 누리던 가족은 그레고리가 ‘돈 못버는 벌레’가 되면서 기만, 착취, 계산적인 태도 등 민낯을 드러낸다.
“속았구나! 속았어! 잘못 울린 밤의 종소리를 따르다 보니 ―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시골의사의 탄식은 그레고리, 시골 사람뿐 아니라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과연 카프카를 읽다 보면 몇 번이고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게 이처럼 카프카를 다시 읽도록 해준 <카프카의 밤> 책방지기는 마진율이 박한 책을 팔아 책방을 유지하는 일이 녹록지 않음에도, 구김살 없는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출구를 찾아 <카프카의 밤>으로 향하는 이들을 위해 그는 자신의 낮시간을 아르바이트에 헌납한다. 연산동은 나와 아무 인연 없던 곳이었지만, <카프카의 밤>으로 인해 책방 근처 연산동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