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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일리 Dec 12. 2020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서점

<내 인생 최고의 책>을 읽다가 ‘Bohr’s book’을 떠올리다 

 
프놈펜에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서점이 있다. 책을 사고, 팔고, 또 교환할 수도 있는 곳. 아침 여덟 시에 문을 열고, 저녁 여덟 시에 문을 닫는다. 운 좋은 산책자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강을 따라 산책을 하다 우연히 이 서점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2006년 당시에는 <Bohr’s book>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새로 검색해 보니 <Bohr’s book & the Flaneur>로 상호가 바뀌었다. 이 서점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에, 그리고 ‘한가롭게 거닌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the Flaneur’가 덧붙여진 것에 기쁨이 번진다.
 
나는 프놈펜을 경유지, 혹은 건너뛸 수도 있는 도시로 여겼더랬다. 다음에 이동할 씨엠리업에서, 앙코르와트의 하이라이트를 어떻게 돌 것인지에만 골몰했을 뿐, 이 도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텅 빈 시간과 우연한 장소를 선물 받을 수 있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이름난 관광지를 도는 대신 강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Bohr’s book>를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여행자들이 팔거나 두고 간 책들을 구경했다. 마거릿 애트우드, 빌 브라이슨, 올리버 색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출발 전에 고심해서 골라 배낭 속에 넣었을 한 권의 책. 하염없이 도착이 지연되는 로컬 버스를 기다릴 때, 끊임없이 몰려드는 호객꾼들을 말없이 물리치고 싶을 때, 카페에서 지친 발을 쉬어갈 때 내내 동행이 되었을 책, 그래서 그 서점에 꽂힌 책들에서는 땀내가 났다.
 
여행자들은 다 읽은 한 권의 책을 내어놓고 또 어떤 책을 가져갔을까. 앤 후드의 장편소설 제목처럼 <내 인생 최고의 책>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는 제목으로 남아 언젠가 또 한 번 만날 운명의 책 한 권을 뇌리에 각인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수한 사연을 안고 <Bohr’s book>의 풍경은 매일 바뀌었을 것이다.
 
“We cannot change unless survive but we will not survive unless we change.”
서점 한켠 액자 속에는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변화하지 않는 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이 말은 우리뿐만 아니라 책들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한 군데 고정된 채 꽂혀 있기만 하는 책은 죽은 책이나 다름없다. 책들은 끊임없이 재배열되고, 교체되고, 순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책들은 비로소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액자 속의 문구를 나는 그렇게 해석해 보았다.


 
<내 인생 최고의 책>에 나오는 서점 ‘가니메데스’의 책방 주인은 매일같이 그곳을 드나드는 손님에게 인덱스 카드와 갖가지 색깔 마커 펜을 주면서 “세 타 투아(네 맘대로 해)”라고 말한다. 156쪽에 나오는 예시처럼 ‘크고 두꺼운 책’ ‘금지 서적’ ‘아이들 책이지만 어른도 좋아해요’ ‘한 번 더 읽으세요!’와 같이 그 무엇이든 자기만의 카테고리를 작성해 보라는 것이다.
 
‘내 인생 최고의 책’을 뽑는 일이 너무 막연하게 여겨진다면, 붙박인 채 꽂혀 있던 책들을 다시 배열해 보자.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이 책 옆에서 저 책 옆으로.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소설과 실용서가 나란히 놓일 수도 있고, 아프리카 출신 작가 바로 옆에 캐나다의 소설가가 자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잊고 있던 책이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찰라, 반납일자가 다 되어가는 책이 우선순위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Bohr’s book & the Flaneur> 혹은 <가니메데스 서점>의 책들처럼 내 공간 속 책들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체화될 수 있기를. 누군가 ‘내 인생의 최고의 책’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저 멀리 구름에 싸인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대신 눈높이에서 한 권 고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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