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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일리 Dec 16. 2020

소주병에 든 약수, 그런 게 ‘어른의 맛’일까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사실 나는 아직도 소주 맛을 잘 모르겠다. 씁쓸함에 감기는 인공적인 달큼함, 거기에는 깊은 맛이 없다고 느껴왔다. 대한민국의 성인들은 왜 그렇게도 초록색 병에 든 ‘어른 음료’를 즐겨 찾는 걸까. 애주가를 배우자로 두었으면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홀짝홀짝 넘기는 그 술잔에 어떤 위로가 담겨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아직도 철부지라 ‘어른의 맛’을 모르는 걸까.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에 등장하는 아름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친구인 장씨 할아버지에게 소주를 사달라고 청한다. 열일곱 해를 살았지만, 신체나이는 팔순에 가까운 아름, 그는 주민등록상으로는 미성년자이지만 실은 나이를 초월한 존재다. 그러기에 자신보다 훌쩍 연배가 높은 어르신과 친구가 되고, 부모에게 내리사랑만큼이나 넉넉한 치사랑을 줄 수도 있었다.
 
아름은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47)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기적 대신 비범한 슬픔을 살아갈 운명이었다. 아름은 살아보지 못할 생에 대해 미련을 키우는 대신 부모의 삶을 복기하는 데 집중한다. 지금은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푸르른 여름이었던 부모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로 되살려낸다.
 
소주를 마시려 했던 건 아름의 욕망이 아니라, 공감을 위한 몸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열일곱 나이에 아이를 가지고, 퇴학을 당하고, 버거운 가장의 무게를 지고, 조로증이라는 희귀 질환에 걸린 아이를 뒷바라지하느라 재빨리 어른의 세계로 고속 진입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 지친 그들이 홀짝였을 소주를 자신도 따라 마셔 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장씨 할아버지가 뒤늦게 사준 씁쓸한 팩소주를 마시며 아름이 느꼈던 것은 어마어마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흔히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마음을 알고, 어른이 된다고들 한다. 부모가 되어본 내 처지에서 조심스레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 수도 있겠다 싶다. 현재 나는 아이를 둘 키우면서 남편과 함께 생활을 책임지고 있지만, 가정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몹시 서툴 때가 많다. (아직 소주 맛을 모르는 철부지 사십 대!) 오히려 비혼이나 비출산을 택한 이들이 생활동반자 혹은 동물과 함께 살아가면서 쓴 에세이를 읽으면서, 다른 형태의 삶을 택한 용기와 성숙함을 배우기도 한다.


혼인과 출산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정상 가족’으로 여기던 시절은 점점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다. 수많은 대안 가족들은 이상한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생애주기에 쫓겨 ‘남들처럼’ 생활 방식을 결정하다가는 인생의 한가운데서 어떤 허망함에 맞닿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결정한 토대 속에서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하나를 고민하면서 뒷산에 올랐다. 어르신 한 분에 약수대에서 물을 떠 가시려고 빈 병을 좌르르 꺼내는데, 죄다 패트병으로 된 시원 소주병이 아닌가. 지나던 친구분이 “우와, 멋지네.” 하고 한마디 하고 가시는 걸 보면서 웃음이 쿡 나왔다.
 
아, 어쩌면 저런 것이 어른의 삶이 아닐까. 밤에는 소주로 시름을 달래고, 다음 날이면 부지런히 산에 올라 약수를 받아가는 이율배반!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냥 성숙해가는 것만도 아니고, 세속에 찌들어가는 것만도 아닐 테다. 혹자는 소주를 마시기 위해 건강 관리를 한다는데, 이런 맹꽁이 같은 어른도 때로 귀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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