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유능해질수록 나는 무능해지고 있었지만, 좋을 대로 그 평균치를 나의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읽으며 이 구절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처한 현실과 내 속내를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문장 때문이었다. 내가 돌봄 노동을 하며 가정에 머무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성과를 내 성과로 착각하고, 내 자아를 그의 자아로 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맘카페를 보며 종종 씁쓸했던 부분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남편'과 '아이'만 존재하는 글을 볼 때인데, 육아를 하며 일상을 나보다는 타인을 위한 시간으로 보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종종 나라는 존재는 철저히 배제된 채로 남편의 승진이나 성과급을 자랑하는 글을 볼 때면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더 진하게 밀려든다.
요즘 사람들은 그래서 타인에게 '자아의탁'하지 말자고 그러한 행위를 '자아의탁'이라는 용어로 규정지어 사용한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탁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삶을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이런 용어가 생겨날수록 내 삶과 자아를 의탁함으로써 얻어지는 달콤함을 스스로 경계하고 내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경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의탁하지 않기로 스스로를 검열해 온 나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일상을 저당 잡힌 만큼 내 자아까지 스멀스멀 저당 잡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이 문장을 읽기 전까지.
남편은 며칠 전 술을 한잔 하며 자신의 비전을 내게 공유했고, 나는 그런 꿈을 꾸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직장에서 잘 나가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더 높은 자리를 바라보는 그가. 오늘은 아침에 카톡이 와서 성과급이 생각한 것보다 더 나왔는데, 리텐션 보너스라는 게 나왔다고 했다. 그게 뭐냐 물었더니, 직장에 붙잡아두고 싶은 이들에게 그만두지 말라고 특별히 지급하는 성과급 개념이라고 했다. 그렇게 직장에서 인정받는 그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책에서 읽은 저 구절이 하루종일 내 머릿속을 맴돌며 나를 괴롭혔던 것은 왜일까.
나는 어떠한가.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히 승진을 꿈꿨었다. 승진에 대한 호 불호는 차치하더라도 뭔가를 열심히 해서 직장에서도 인정받기를 바라왔다. 그래서 대학원을 다니며 온갖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해왔었다. '뭐든지 배워두면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직장에서 많은 일을 도맡아 했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급여를 더 많이 받는 직장도 아니었지만 뒤로 내빼거나 편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승진? 당연히 해야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현재는 '아 이제 (여건상) 승진은 어렵겠다..'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나는 현재 휴직 중이고, 이 휴직이 심지어 언제까지 계속될지 장담할 수도 없는데 승진이 웬 말이란 말인가.
그랬던 나이기에,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왔던 나이기에, 점점 유능해지는 남편과 점점 무능해지는(엄마로서의 보람 이런 것을 여기서 거론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느끼는 미묘한 씁쓸함이란...
이런 생각들을 어제 남편에게 털어놓았는데 내심 신경 쓰였는지 오늘 연락이 왔다.
'갖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묻고 따지지도 않고 다 사줄게. 아기 보느라 너무 고생하잖아'라고..
'그래, 돈으로 물건은 살 수 있다고 쳐. 근데 내 꿈과, 젊음과, 정열도 사줄 수 있어?'라고 외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