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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 R Aug 10. 2022

다                         름  

육아관에서 체력까지 다 차이나;;

 그를 선택한 연유

 어렸을 적 아빠는 가족보다 일이 늘 먼저였다. 부장님 모시고 새벽까지 술 마시다 고주망태가 돼 집에 귀가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목숨이 위태로워 의사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으나 술과 담배를 결국 끊지 못하셨다. 손주가 둘이나 태어나는 동안에도 아이를 미끼로 담배를 거르게라도 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너무 얄밉게도 담배향이 가득 담긴 셔츠로 자주 신생아를 안으셨다. 그런 아빠를 곁에서 보고 자란 내게 담배와 술을 하지 않는 남편은 꽤 매력적이었다. 보수적인 가정환경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 둘이 결혼하면 자녀들 교육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왜 이 르케 나랑 차이나?  


별 그램 검열 여기가 중국이니?

 1호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자동으로 어깨가 들썩들썩한다. 얼마 전 닭강정을 먹으러 가서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에 맞춰 파도 춤을 쳐주었다. 내 눈에는 정말 사랑스러워 1분짜리 동영상으로 담아뒀다. 학교에서 배웠다는데 친구들과 함께 춘 건지 남자아이라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 잘 모르겠다.

아침 준비를 마치고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귀여운 1호의 모습이 이뻐 별 그램에 올렸다. 아이의 등교를 마치고 나니 남편이 내 별 그램을 검열했나 보다. '1호 춤추는 거 지워'라고 그런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실 이런 적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다. 가끔 이렇게 올렸다가 스리슬쩍 없었던 일처럼 지워버린다. 이건 대체 무슨 이유로 지워야 하냐고 물으니 'Girlish' 한 게 원인이었다. 여자 아이돌이 추는 춤이지만 1호의 체구도 있고 난 오히려 남자아이답게 꿀렁꿀렁거리게 추는 게 매력포인트라 생각했는데 아쉽지만 '내 마음속에 저장'해야겠다.  


감정 꿀떡 삼키기

 전 직장은 복지가 많아 꽤 유명한 곳 중 하나였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해외호텔 포인트다. 동남아로 여행을 간다면 겨우 하루에 4~6만 원 정도만 쓰면 조식 포함해서 5성급 호텔에 묵을 수 있었다. 그 시기는 남편이 사업을 한다며 한참 돈을 까먹는 시기였다. 그 복지 덕에 일 년에 10일 정도는 모든 시름을 잊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쌓았다. 자랑을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한 내 기분을 남기고 싶었는데 그는 시댁 식구들이 오해할 거라며 여행 간 사실도 5성급 호텔에 묵은 사실도 절대 올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결혼한 이후에는 내 SNS에 호캉스 사진이 별로 없다. 신혼 초기에는 이 일로 엄청 부딪혔다. 생각해보면 사소한데, 나는 결혼한 이후로 감정을 해소하지 못했다. 기분 좋은 감정도 사랑스러운 감정도 슬픈 감정도 어디에 해소하지 못하고 내 안에 꽁꽁 저장해놨다. 그러다 블로그에 기록하기 시작했고 브런치 작가도 되었다. 어디에다가도 감정을 털어놓을 수 없을 때 끄적거림은 위로가 되었다. 가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뒤적거리기도 한다. 별 그램을 열심히 하게 된 계기는 사실 멀리 인도네시아 사시는 시부모님이 손주 보고 싶을까 봐 였는데 괜히 팔로우했나 보다. 남편은 오 형제 중 넷째인데 그중 막내는 피부과 의사다. 올케도 의사다. 그들은 자카르타의 1% 고객을 타게팅한다고 했다. 코로나 시기에 지점을 여러 개 열정도로 사업이 확장됐다. 바이럴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하는데 그들 부부의 별 그램엔 늘 에르메*가방이 잘 보이게 정중앙에 놓인다. 나도 못 버는 게 아닌데 왜 남편 때문에 숨겨야 하는 걸까? 치열하게 싸워보고 이혼도 여러 번 생각해봤다가 이젠 포기했다. 아이들 없을 때를 찾아 큰소리 내볼 여유도 없다.


상담 : 객관화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나니 나라에서 매월 75만 원을 보조금으로 보내줬다. 돈이 진짜 부족한 시기였지만 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20회기나 되는 상담을 받게 됐다. 모유 수유하는 신생아가 있었지만 이 아이가 살아갈 가정을 목숨을 걸고 지키기 위해 추운 겨울이든 덥 디더운 여름이든 여의도로 향했다. 오히려 여유로운 싱글일 때는 돈이 아깝다며 생각조차 안 해봤고 귀찮아서 가기도 싫었던 상담을 결심한 이유는 단지 아이를 위해 울타리를 단단하게 세우고 싶어서였다. 외국인 남편과 살면서 가장으로서 가진 부담을 털어놓고 흐느껴 울었을 때 가장 위로가 됐던 것은 상담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진단이었다.

 "지금 본인이 힘든 건 지극히 정상적이에요. 아주 마음이 평온한 사람도 힘들고 지칠 육아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어요. 그리고 남편분이 오히려 본인보다 더 힘들 수 있어요. 본인은 여자고, 한국에 아는 사람도 많아서 힘들면 어디든 연락해서 전화를 할 수 있지만 남편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리고 나에 대해 내려진 진단은 "동반 의존"

친정엄마에게 너무나 심한 감정 의존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슬프면 나도 슬프고 그녀가 기쁘면 나도 기뻤다. 자라면서 아빠가 엄마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아 대부분 엄마의 대리 남편 역할을 하며 자랐다. 아마도 그 부분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지금도 난 누군가 의지할만한 사람의 동의 없이는 자신감 있게 뭔가를 잘 해내지 못한다. 부모님의 격려와 지지 없이는 내가 한 선택에 대해 늘 갸웃갸웃하는 것들이 있다. 


남편의 히잡

남편은 늘 조심스럽다.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좋은 4계절이 지나는 동안에도 사진 속의 저 검은 유니폼을 마치 본인의 살갗처럼 챙긴다. 더운 여름에도 물놀이에 저렇게 가서도 검고 긴팔 후드 재킷을 입는다. 저 속에는 내가 시원하게 입으라고 사준 반팔티셔츠를 입었다. 처음에는 말려도 보고 화도 내봤다.

 "한국에서 제발 그러지 말아,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워. 한국사람들은 표준을 좋아해. 다르면 이상하게 봐 너무 창피하니까 제발 반팔만 입으면 안 돼? 그리고 진짜 덥잖아"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부분을 자극해봤지만 통하지 못했다. 아이들 친구 엄마들도 보잖아,라고 아이카드도 꺼내봤지만 결국 결혼 8년 차 아직도 지긋지긋한 검은 히잡을 입고 다닌다. 진짜로 히잡은 아니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무슬림들의 히잡 같기도 하고 폭염에도 저러고 다니는 걸 보면서 가끔은 종교의식의 하나인가 싶을 때가 있어 난 혼자 남편의 히잡이라 부른다. 그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더운 여름에 같이 나가면 널찍이 떨어진다. 정말 보기만 해도 덥다.

남편과 4계절 물아일체가 된 듯한 까만 유니폼


저질체력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30여분 정도 QT (Quiet Time) 말씀묵상을 하고, 신문을 읽는다. 그리고 첫째 아이의 식판을 닦고 말리고 물통도 챙겨서 현관 앞에 둔다. 설거지 거리들을 정리해서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려두고 플라스틱류들은 따로 닦는다. 건조기에 말려진 세탁물들을 꺼내 개켜두고 집안 여기저기를 돌며 세탁할 말한 것들을 찾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그게 나의 모닝 루틴이다. 7시 반이 되면 1호를 깨우고 간단한 아침을 먹인다. 8시에 5분에 드디어 그가 일어난다. 여러 번 남편의 이름을 부른 뒤다. 내가 제발, 제발 일어나 이제 마지막이야 할 때쯤 그가 일어난다. 남편이 고맙게도 18분까지 약속한 스쿨버스 승차장에 데려다주는데 복병은 '큰일'이다. 남편이 큰일을 시작하면 샤워까지 마쳐야만 의식이 끝난다. 그런 날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것도 내가 하러 간다. 버스를 태워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2호를 깨울 차례다. 아이 소변을 뉘이고 옷을 갈아입히고 또 간단한 아침을 먹인다. 일을 시작하려는데 2호가 엄마도 같이 가면 안 돼? 묻는다. 늘 똑같다.

그럼 남편은 그쯤은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잖아 한다. 그가 말하는 그쯤인 일들이 내게는 쌓이고 쌓여있는데 그는 피곤하다고 잠을 잔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이 많은 것들을 해냈다고 하면 그건 나의 선택이니 유세 떨지 말라고 선을 긋는다. 나도 일어나 져서 일어나 그런 것들을 해내는 게 아닌데... 이건 내가 나 자신을 호구로 만든 건가... 또 신혼 때처럼 끝장 볼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걸까... 기운이 빠진다. 이것도 포기  


여자 친구는 안돼

 여자 친구, 데이트 이런 단어들을 아이들 앞에서 사용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이 너무 어렸을 때부터 사귀는 것에 익숙해지면 조기 성애화 된다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다. 나도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정도가 심하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였다. 같은 반의 여자아이가 1호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절대 말하지 말라고 내 입단속을 했다. '이미 1호는 느끼고 있을 걸? 그리고 그게 뭐 어때서?'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존중해주기로 했다. 산책을 하다가 그 여자아이 집을 지날 때였다. 1호가 '엄마, 저기 00이 집이야~!'라고 외쳤다. 어떻게 알았어? 하니까 그 아이가 알려줬다고 한다.

"울아기 000이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물었지만 비밀을 들킨 듯 당황하며 얼버무린다.

"아니야 난 남자 친구 00 이가 베스트인데?"

 1호가 여자아이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게 잘못된 건도 아닌 데 아이가 우리의 그런 의도를 이미 알아채고 저런 반응을 할 때 이게 맞나 싶어 정말 답답할 때가 많다.

남편과의 견해 차이를 이렇게 이해하려고 존중해주려고 노력하는데 남편은 그러고 있나? 싶다.


한국어는 언제 할 거야?

괜찮아. 이제 내가 인도네시아어도 영어도 중국어도 한다. 덕분에 4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됐어.

 벌써 8년 전이다. 연애시절 남편은 서울대 한국어 과정을 3개월 다녔다. 기특하게도 한국어를 읽을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곧 유창해질 거라 기대했다. 근데 여태껏 서류에 적힌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다. 쑥스러움이 많은 그의 성격상 완벽하지 않으면 알아도 말을 내뱉지 않는다. 그러니 전혀 늘지를 않는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하던 달 오픽 시험을 치게 됐는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도 IH를 받았는데 최고점을 받아서 인사팀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대체 어떻게 준비했냐고 물었다. 기쁜 게 아니라 슬픔의 눈물이 가슴에 서늘하게 흘러내리더라. 남편 뒷바라지한다고 얼마나 고생했으면 오픽 최고점이라니!

 남편이 차를 몰고 친정 집에 방문할 때마다 주차 차단기를 열 때 00동 000호요 라고 두어 번 말해도 경비아저씨가 잘 알아듣지 못해 항상 10~15여 분간을 대기했다. 그러면 항상 그는 인종차별이라고 화가 잔뜩 난다. 제대로 발음을 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면 되는 것을 왜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까? 신혼 때 싸울 때마다 한국말을 쓴 적이 있다. 기를 쓰고 영어를 쓰라고 소리치더라... 자기를 존중해야 한다나...

그렇게 나는 남편의 아마추어 통번역사가 되었다.


하... 다 적고 나니 혼자살고싶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지?

나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힘드네 진짜 고집불통이랑 사는 거...

재택근무도 나만 더 힘들게 하는것 같고 아이들 남편 뒷바라지고 뭐고 본사로 매일 출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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