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면 다른 생각은 할 여력도 없이 돈만 생각한다 그게 가난의 비극이다
"The Blind Leading the Blind" by Pieter Bruegel the Elder (1568)
설명: 이 그림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비유를 묘사하여 사회의 어리석음과 무지의 결과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와일드의 사회적 순응에 대한 비판과 연결됩니다.
"Work" by Ford Madox Brown (1852-1865)
설명: 브라운의 세밀한 그림은 지적 노동에서 육체 노동에 이르기까지 일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회 계층을 탐구하며, 다양한 유형의 일에 대한 가치와 인식을 반영합니다.
"The Flageolet Player on the Cliff" (1889) by Paul Gauguin
설명: 고갱의 작품에서 어린 소년은 단순한 목관 악기를 연주하며 개인주의와 자연의 조화의 본질, 즉 물질주의에 대한 와일드의 비판과 개인적 표현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주제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1장:
이타주의의 결함과 사회주의의 약속
- 사회주의는 현재 사회에 내재된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억압적인 의무감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이타주의로 자신의 삶을 훼손하고, 종종 사회 문제를 악화시키는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 빈곤에 대한 자선과 전통적인 해결책은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 문제를 악화시키고 심화시킬 뿐입니다.
- 사회주의는 빈곤과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사유 재산의 오용을 없애기 위해 사회를 재건할 것을 제안합니다.
- 사회주의 하에서는 각 공동체 구성원의 번영과 복지가 보장되기 때문에 개인주의 사회는 빈곤층의 어려움 없이 번영할 수 있습니다.
제2장:
사회주의의 열매로서의 개인주의
- 사회주의는 사유 재산을 공공의 부로 전환함으로써 공동의 복지와 개인의 복지를 모두 증진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권위주의 사회주의나 경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어떤 형태의 정부 하에서도 개인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습니다.
- 현 체제에서는 경제적 자립이나 자신의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개인주의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노예를 연상시키는 비열한 노동에 내몰리며 개인주의와 인류에 대한 공헌을 억압받습니다.
- 재산에 기반한 개인주의가 존재하지만, 소유에 기반한 도덕성과 성공에 가려져 자신의 자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3장:
재산과 미덕에 대한 오해
- 사유 재산의 소유는 종종 도덕적,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운 삶으로 이어져 부와 관련된 존엄성을 떨어뜨립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자선을 해결책이 아니라 평등을 위한 그들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는 겸손한 제스처로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 법적 제도는 인격보다 재산에 과도한 가치를 두며, 소유보다 존재를 우선시하는 도덕적 점검을 요구합니다.
- 현재의 재산 제도로 인한 사회 계층 간의 극명한 차이는 개인주의의 완전한 표현과 발전을 제한합니다.
- 진정한 개인주의는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소유라는 얄팍한 척도에 방해받지 않는 내재적 발전을 통해 번성합니다.
제4장: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른 개인의 재정의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개인의 완성이라는 가치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는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타고난 자질을 통해 달성할 수 있습니다.
- 저자는 기독교가 전부는 아니지만 물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새로운 개인주의를 지지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추측합니다.
- 이 글은 부에 무관심했던 예수의 모습에서 착안하여 진정한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기보다는 영혼을 수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 저자는 개인의 다양한 길을 존중하며, 남의 시선이나 사회의 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미덕을 찬양합니다.
- 이 새로운 개인주의의 기대되는 아름다움은 자연스럽게 진화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어린아이의 무아지경과 비슷합니다.
제5장:
사회주의와 정부를 넘어 자유를 향하여
- 사회주의는 인류를 현재의 정부 시스템으로부터 해방시켜 노동이 선택이 되고 국가가 통치자가 아닌 조직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회로 이끌 것입니다.
- 육체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야 합니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성장과 즐거움을 촉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미래에는 원치 않는 모든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될 것이며, 인류는 창조와 여가, 지식 추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진보의 목표이자 개인의 잠재력과 조화가 완전히 실현되는 사회를 상상하고 노력하는 인류의 힘을 상징합니다.
- 기계의 노예가 고된 노동을 대신하게 되면서 인간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의 온전함이 목표가 되는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제1장:
예술 창작에서 개인주의의 역할
- 예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표현을 필요로 하며 공동체, 정부 또는 강력한 집단이 지시하는 지침 아래서는 번창할 수 없습니다.
- 진정한 예술가는 다른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적 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는데, 외부의 간섭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 예술가가 타인의 요구에 의해 제약을 받을 때 예술은 사라지거나 부진해지며, 예술을 통제하려는 사회의 이러한 지시는 부도덕한 억압입니다.
- 예술을 통제하려는 충동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대중이 자신의 취향과 허영심을 과시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반면, 예술은 대중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예술가가 되도록 영감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 시와 같이 대중이 관심을 잃은 곳에서 예술은 번성하며, 대중의 영향력이 줄어들면 더 순수한 예술적 표현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2장:
참신함에 대한 잘못된 추구와 개인주의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
- 드라마나 소설과 같은 인기 엔터테인먼트는 대중의 영향력으로 인해 예술가들이 낮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타협하면서 수준 이하의 영감을 주지 못하는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 참신함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은 예술가가 자신의 표현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순응과 평범함에 도전하는 개인주의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 대중이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고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것은 예술의 발전과 활력을 제한합니다.
- '부도덕하다', '이해할 수 없다'와 같이 잘못 이해되고 잘못 적용된 라벨은 종종 새로운 스타일이나 진실한 묘사를 도입한 작품을 표적으로 삼아 대중의 혼란과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 대중의 변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예술가는 부도덕하거나 모호하다는 비난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진실성을 유지하며 진정한 예술적 가치에 기여합니다.
제3장:
예술에 대한 여론의 파괴적인 힘
- 예술의 개인주의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족한 여론은 예술가들이 무지에 부응하도록 강요하면서 부패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 언론은 대중의 감시를 확대하고 창의적인 작품을 축하하는 대신 개인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추도록 강요하는 해로운 역할을 합니다.
- 예술가들은 저속함과 동질성을 중시하는 여론의 해로운 영향과는 대조적으로 비판을 통해 개성을 강화하면서 번창합니다.
- 드라마의 예술적 발전은 예술가 개개인이 대중의 취향을 무시하고 자신의 비전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어 관객을 간접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 예술을 진정으로 감상하려면 통제하려는 욕구가 없는 수용적인 기질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작품에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습니다.
제4장:
사회적 제약에 맞선 개인주의에 대한 예술가의 투쟁
- 문학과 장식 예술은 개인주의의 성공을 보여주며, 장인이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보다 아름다움의 창조를 우선시할 때 대중의 반대는 사라집니다.
- 정부는 본질적으로 예술가들을 억압하며, 다양한 형태의 전제주의가 신체와 영혼, 또는 둘 다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여 개인의 예술적 표현을 억압한다.
- 독재 정권과 예술이 공존했던 과거의 사례와 상관없이 예술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권위가 없고 제약 없이 창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5장:
개인주의와 예술의 미래
- 개인주의의 실용성은 인간 본성의 발달 및 변화와 맞물려 현재의 사회적 조건을 초월하여 개인의 성장의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 진정한 개인주의는 다양성과 개인적 표현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서 진정한 공감과 이해가 나오기 때문에 순응을 강요하지 않고 이타적이고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촉진할 것입니다.
- 사회가 발전하고 고통과 빈곤이 완화됨에 따라 예술은 삶의 더 큰 기쁨을 반영하여 개인주의를 삶의 즐거움을 기념하는 조화로운 존재로 재구성할 것입니다.
- 새로운 개인주의는 헬레니즘의 본질, 즉 구속받지 않고 즐거운 활동으로 가득 찬 삶을 통해 달성되는 완벽한 조화에 더욱 부합할 것입니다.
문장: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유재산 제도로 인해 발생하는 끔찍한 악을 완화하기 위해 사유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합니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불공평합니다. 물론 사회주의 하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악취 나는 굴과 누더기 같은 누더기 집에서 살거나, 불가능하고 절대적으로 혐오스러운 환경 속에서 건강하지 못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의 안전은 지금처럼 날씨에 따라 좌우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리가 내린다면 우리는 십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역겨운 비참함 속에서 거리를 헤매거나 이웃에게 자선을 구걸하거나 혐오스러운 대피소의 문 앞에 몰려들어 한 끼의 빵과 하룻밤의 불결한 잠자리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There is also this to be said. It is immoral to use private property in order to alleviate the horrible evils that result from the institution of private property. It is both immoral and unfair. Under Socialism all this will, of course, be altered. There will be no people living in fetid dens and fetid rags, and bringing up unhealthy, hungerpinched children in the midst of impossible and absolutely repulsive surroundings. The security of society will not depend, as it does now, on the state of the weather. If a frost comes we shall not have a hundred thousand men out of work, tramping about the streets in a state of disgusting misery, or whining to their neighbours for alms, or crowding round the doors of loathsome shelters to try and secure a hunch of bread and a night’s unclean lodging.
설명:
이 인용문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사유재산 제도와 사회가 빈곤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저자의 비판입니다. 사유재산을 그 자체로 야기하는 악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저자는 이러한 역설을 허용하는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는 사회의 자원이 모두를 부양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극심한 빈곤과 날씨와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요소에 대한 의존이 광범위한 고통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비유와 사례:
우리가 알고 있는 버전의 음악 의자 게임에서는 플레이어 수보다 의자가 항상 하나 적고, 음악이 멈추면 누군가는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사유재산이 의자가 하나 적으면 누군가는 항상 빈손으로 끝나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과 유사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의자를 제공함으로써 게임을 끝낼 수 있으며, 음악이 멈추면 아무도 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혹독한 날씨로 인해 많은 노숙자와 실업자가 발생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안전과 쉼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게으름을 피우며 고통받는 대신, 공동의 노력과 자원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유지되는 커뮤니티 센터가 생겨나면 빈곤과 관련된 굴욕감과 절망감을 없애고 생산적으로 기여하며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장:
인간은 더 많이 가지려고 할 때 더 적게 된다.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돌봄을 축적한다. 삶의 단순함은 환경을 복잡하게 만들고, 따라서 혼돈을 지배하는 대신 혼돈의 일부가 됩니다. 물질주의에 집중하면 영적, 지적으로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적은 것에 만족할 때 많은 것을 추구할 때보다 온전함에 더 가까워집니다. Man is less when he seeks to be more. He who accumulates wealth accumulates care. The simplicity of your life makes you complex to your environment, and hence, instead of ruling the chaos, you become part of it. The focus on materialism hinders one's growth spiritually and intellectually. When a man is content with little, he is closer to being whole than when he chases after much.
설명:
이 섹션은 부와 풍요의 개념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작가의 주된 초점은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것이 종종 복잡하고 다소 혼란스러운 삶으로 이어져 단순함과 만족에 놓여있는 진정한 부의 본질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전체 기사의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 인용문은 사람의 진정한 척도는 소유나 지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지적 성취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개념을 확대합니다.
비유와 사례:
나무의 힘은 잎의 수나 열매의 풍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뿌리의 깊이와 줄기의 견고함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안정성은 일시적이고 쉽게 퇴색하거나 떨어질 수 있는 소유와 부(잎과 열매)의 축적이 아니라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도 굳건함을 제공하는 내면의 발전과 인격(뿌리와 줄기)에 반영됩니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부동산, 더 많은 명품 등 더 많은 것을 축적하는 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종종 이러한 것들에 부담을 느끼며 유지와 보안에 대해 걱정합니다. 반면, 개인적인 성장과 관계, 내면의 평화에 집중하며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욕망의 바람과 사회적 압력에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호수처럼 더 깊은 성취감과 고요한 마음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장:
새로운 세상의 문 위에 '네 자신이 되라'고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단순히 '네 자신이 되라'였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인격을 의미하는 것처럼, 부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부자는 인격을 개발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의 축적을 허용하는 공동체에서 살았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그런 공동체에서 부족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누더기 옷을 입고, 끔찍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집에서 자는 것이 사람이 건강하고 쾌적하며 품위 있는 조건에서 사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Over the portal of the new world, ‘Be thyself’ shall be written. And the message of Christ to man was simply ‘Be thyself.’ That is the secret of Christ. When Jesus talks about the poor he simply means personalities, just as when he talks about the rich he simply means people who have not developed their personalities. Jesus moved in a community that allowed the accumulation of private property just as ours does, and the gospel that he preached was not that in such a community it is an advantage for a man to live on scanty, unwholesome food, to wear ragged, unwholesome clothes, to sleep in horrid, unwholesome dwellings, and a disadvantage for a man to live under healthy, pleasant, and decent conditions.”
설명:
이 인용문은 인간 존재의 초석으로서 진정성과 자아실현의 개념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언급은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의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부자의 병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도발적인 비판을 제시하며 진정한 부는 물질적 소유가 아닌 인격과 자기 계발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비유와 사례: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 향기를 지닌 온갖 종류의 꽃이 자라고 있는 정원을 상상해 보세요. 정원사는 모든 꽃의 고유한 특성을 소중히 여기며 어떤 꽃도 다른 꽃과 닮을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정원에서 '꽃'은 고유한 개성과 타고난 잠재력을 지닌 개개인의 자아를 상징합니다. 정원의 풍요로움은 같은 꽃을 반복해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 꽃이 지닌 다양성과 진정성 그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이 정원의 꽃들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행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맞춰 살아가도록 권장됩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백합이나 해바라기를 흉내 내려고 하지 않고 장미가 장미로서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은유는 물질적 가치에서 벗어나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독창성과 자기표현이 풍부한 다원화된 사회에 대한 인간의 잠재력을 조명합니다.
문장:
가난한 사람은 정말로 무엇을 잃는가?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그는 부자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방식으로 자유롭습니다. 부자는 소유에 얽매이고, 소유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데 소비하며, 얽매여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며, 그의 시간과 생각은 그의 것입니다. 부자는 동전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의 사색과 발걸음의 방황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What does a poor man really lose? The poor man, having nothing, loses nothing. He is free in ways the rich shall never be. Bound by possessions, consumed by their accumulation and preservation, the rich man is tied down. The poor man, owning nothing, answers to nothing; his time and thought are his own. The rich man, laden with the weight of his coins, is less available to the musings of his mind and the wanderings of his feet.
설명:
이 구절은 가난과 부에 대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물질적 소유의 부재가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부의 부담에 얽매이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방해받지 않고 삶을 탐구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반면,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소유물에 얽매여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부는 힘이 되는 만큼 자신을 가둘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비유와 사례:
한 명은 야생의 새이고 다른 한 명은 금빛 새장 안에 있는 새라고 생각해 봅시다. 새장에 갇힌 새는 부유한 사람을 상징하며, 최고급 먹이와 찬사를 받으며 살지만 호화로운 감옥의 철창에 날개가 잘린 채 좁은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상징하는 야생의 새는 고난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지속적으로 풍부한 씨앗을 얻지 못하지만, 하늘을 날고 광활한 풍경을 탐험하며 원하는 곳에 앉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립니다. 자유로운 새의 삶은 비록 풍요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가득하며 매일매일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부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론적으로 지적 추구와 방황하는 사색의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지만, 부자는 재산의 안전에 끊임없이 집착하여 같은 자유를 맛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문장:
반면에 사회주의 자체는 개인주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또는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사유 재산을 공공의 재산으로 전환하고 경쟁을 협력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를 완전히 건강한 유기체의 적절한 상태로 회복시키고 공동체 구성원 각자의 물질적 안녕을 보장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생명에게 적절한 기반과 적절한 환경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체가 가장 완벽한 상태로 완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Upon the other hand, Socialism itself will be of value simply because it will lead to Individualism. Socialism, Communism, or whatever one chooses to call it, by converting private property into public wealth, and substituting cooperation for competition, will restore society to its proper condition of a thoroughly healthy organism, and insure the material wellbeing of each member of the community. It will, in fact, give Life its proper basis and its proper environment. But for the full development of Life to its highest mode of perfection, something more is needed. What is needed is Individualism.”
설명:
이 구절은 사회주의가 역설적으로 진정한 개인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요약한 것입니다. 저자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경쟁을 없애고 재산에 대한 협동적 소유권을 확립함으로써 개인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조성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이는 사회주의의 공동체적 측면을 개인의 자유와 개인적 성장과 연결시켜 정치 구조와 개인의 복지를 일치시키기 때문에 이 글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비유와 사례: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해 보세요.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는 각 연주자가 솔로 연주를 하면서 다른 연주자보다 더 잘 들리려고 경쟁하기 때문에 조화가 아닌 불협화음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회주의적 비전에서는 사회가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아지고, 각 음악가의 파트가 전체 곡에 필수적이며, 협력이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공유된 목적(사회주의)의 맥락에서 각 개인의 재능(개인주의)을 키웁니다. 음악가 개개인은 서로를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소리를 집단 연주에 기여함으로써 음악(사회)과 자신의 예술에 대한 만족감(개인적 발전)을 모두 높이는 데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문장:
현재 사유 재산의 존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매우 제한된 정도의 개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거나 자신에게 정말 적합하고 즐거움을 주는 활동 영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인, 철학자, 과학자, 문화인, 즉 진정한 인간, 자신을 깨달은 인간, 그리고 모든 인류가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는 인간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사유 재산이 없고 항상 굶주림의 위기에 처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짐승과 같은 일을 해야 하고,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해야 하며, 욕망의 불합리하고 타락한 폭정에 의해 강요되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At present, in consequence of the existence of private property, a great many people are enabled to develop a certain very limited amount of Individualism. They are either under no necessity to work for their living, or are enabled to choose the sphere of activity that is really congenial to them and gives them pleasure. These are the poets, the philosophers, the men of science, the men of culture—in a word, the real men, the men who have realized themselves, and in whom all Humanity gains a partial realization. Upon the other hand, there are a great many people who, having no private property of their own, and being always on the brink of sheer starvation, are compelled to do the work of beasts of burden, to do work that is quite uncongenial to them, and to which they are forced by the peremptory, unreasonable, degrading Tyranny of want.”
설명:
이 글에서 저자는 개인주의의 개념과 사유재산으로 인한 불균형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어떻게 방해받는지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사유재산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을 추구할 수 있는 사치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찮고 비하적인 노동을 강요한다는 근본적인 모순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 성취의 핵심에 있는 불평등을 드러내고, 다른 시스템이 보다 보편적으로 만족스러운 형태의 개인주의를 제공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와 사례:
미술 수업에서 소수의 학생만이 다양한 물감과 붓을 사용할 수 있어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학생들은 무딘 연필과 종이 한 장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더 나은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사유 재산을 가진 소수의 특권층과 같으며, 이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탐구하고 문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은 재산이 없는 대다수처럼 도구가 제한되어 있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을 창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잠재력은 실현되지 못한 채 계급(사회)은 더 가난해집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물감과 붓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고, 각자가 자신만의 걸작을 만들어 더욱 풍요롭고 다양한 갤러리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을 그립니다.
문장: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은 근검절약에 대해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근검절약을 권하는 것은 기괴하고 모욕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사람에게 덜 먹으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시나 시골의 노동자가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도덕한 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굶주린 동물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고 도둑질을 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요금을 내야 한다. 구걸에 관해서는 구걸하는 것보다 구걸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만 구걸하는 것보다 취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Sometimes the poor are praised for being thrifty. But to recommend thrift to the poor is both grotesque and insulting. It is like advising a man who is starving to eat less. For a town or country labourer to practise thrift would be absolutely immoral. Man should not be ready to show that he can live like a badlyfed animal. He should decline to live like that, and should either steal or go on the rates, which is considered by many to be a form of stealing. As for begging, it is safer to beg than to take, but it is finer to take than to beg.
설명:
이 문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전통적인 근검절약 미화에 대한 저자의 강한 입장을 강조합니다. 이 문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족한 재원으로 생활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비난합니다. 이 견해는 이미 궁핍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근검절약을 촉구하는 행위가 상처에 모욕을 더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저자는 빈곤에 대한 사회적 접근 방식의 기본 원칙에 도전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검소함에 만족하거나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복시키고 오히려 더 공정한 부의 재분배를 요구합니다.
비유와 사례: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에게 물 한 잔과 작은 빵 한 조각만 주어져 하루 종일 버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이 여행자가 이렇게 적은 양을 배급받은 것에 대해 칭찬할지 모르지만,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절약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음식과 물을 충분하고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일 때 이런 조언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소함을 권고하는 것은 여행자가 처한 곤경의 심각성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빈곤에 빠진 사람들에게 검소함을 권하는 것은 사회 자원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욕구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자가 도덕적 가이드 역할을 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생존을 위한 위업을 수행해야 하는 터무니없는 연극과 비슷합니다.
문장:
역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불복종은 인간의 본래 미덕입니다. 불복종을 통해, 불복종과 반항을 통해 진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Disobedience, in the eyes of anyone who has read history, is man's original virtue. It is through disobedience that progress has been made, through disobedience and through rebellion.
설명:
이 발췌문에서는 불복종을 미덕이자 진보의 촉매제로 여기는 저자의 관점이 빛을 발합니다. 이 개념은 순종이 항상 긍정적인 특성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전복시킵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규범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검소하라고 조언하는 것의 부조리함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빈곤의 원인이 되는 불평등을 해결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적은 것을 가지고도 잘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비유와 사례:
저자가 제시하는 불순종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주인과 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는 종종 개가 주인의 명령에 의심 없이 순종하기를 기대합니다. 이 비유에서 순종은 개를 만족과 복종의 상태로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 갇혀 있던 개가 우리 문을 열고 마침내 우리 너머의 세상을 탐험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역사적 진보는 종종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과된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들의 반란과 같은 비유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가난이라는 규범에 대한 순종과 그에 따른 근검절약의 조언을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생존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살 수 있는 상황을 위해 노력하기 위해 풀어야 하는 정신적 철창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장: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선하다거나 부유한 사람이 반드시 악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한 계급으로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지적이고, 더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에서 부자들보다 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계급은 단 하나,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의 비참함입니다. It is to be noted that Jesus never says that impoverished people are necessarily good, or wealthy people necessarily bad. That would not have been true. Wealthy people are, as a class, better than impoverished people, more moral, more intellectual, more wellbehaved. There is only one class in the community that thinks more about money than the rich, and that is the poor. The poor can think of nothing else. That is the misery of being poor.
설명:
이 구절은 빈곤의 도덕적, 지적 함의에 대한 저자의 미묘한 견해를 강조합니다. 이 입장은 부를 통해 도덕적, 지적 발달이 가능하다는 복잡한 현실을 주장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을 고결한 사람으로, 부자를 부패한 사람으로 병치하는 전통적인 도덕성에 도전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에만 집중하도록 강요하여 도덕적, 지적 추구에 해를 끼치는 빈곤의 모든 것을 소비하는 특성을 강조합니다.
비유와 사례:
지식과 도덕적 철학을 대표하는 책들이 끝없이 늘어선 도서관을 상상해 보세요. 부유한 사람들은 평생 회원권을 가지고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어 다양한 통로와 주제를 탐색하며 지성과 윤리적 이해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입장료를 낼 수 없어 도서관 입구에 갇혀 있고, 어떻게 하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을지 더 시급한 문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는 것은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조건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사회의 냉혹한 판단이 잔인한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지혜의 도서관 입장이 거부된 사람의 학자적 성향을 판단하듯, 가난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사람의 도덕적, 지적 능력을 측정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합니다.
문장:
예술 작품은 독특한 기질의 독특한 결과물이다. 그 아름다움은 작가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는 예술가가 아니라 둔하거나 재미있는 장인, 정직하거나 부정직 한 상인이됩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술가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술은 세상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렬한 개인주의의 방식입니다. A work of art is the unique result of a unique temperament. Its beauty comes from the fact that the author is what he is. It has nothing to do with the fact that other people want what they want. Indeed, the moment that an artist takes notice of what other people want, and tries to supply the demand, he ceases to be an artist, and becomes a dull or an amusing craftsman, an honest or a dishonest tradesman. He has no further claim to be considered as an artist. Art is the most intense mode of Individualism that the world has known.
설명:
이 구절은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타인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화자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청중의 욕구에 대한 상품화된 반응이 아니라 자아의 표현으로서 창의적 표현의 순수성을 강조합니다. 이 주장은 예술의 상업화에 도전하고, 예술이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영혼을 구현하는 자기 성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노력이라는 점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있습니다.
비유와 사례:
예술가를 나무로 상상해 보세요. 나무는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모양을 갖추지만, 주변 숲의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나무의 자연스러운 성장 패턴에서 비롯된 진정성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다른 사람들, 즉 대중이 원하는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구부러지고 비틀어진다면 나무를 나무답게 만드는 본질을 잃게 되고, 더 이상 자연의 진정한 예술성을 구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디자인에 맞게 변형된 제약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가 대중의 요구에 순응한다면 나무처럼 더 이상 자신의 예술성을 온전히 구현했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술은 영향을 받지 않는 나무의 성장과 같은 진정한 형태로, 여론과 상업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진정한 성향에 따라 발전해야 합니다.
문장:
예술에서 대중은 그것을 감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고전을 통째로 삼키고 결코 맛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입에 담는다. 이상하게도, 아니 이상하게도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고전에 대한 이러한 수용은 많은 해를 끼칩니다. 영국에서 성경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사가 제가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In Art, the public accept what has been, because they cannot alter it, not because they appreciate it. They swallow their classics whole, and never taste them. They endure them as the inevitable, and as they cannot mar them, they mouth about them. Strangely enough, or not strangely, according to one’s own views, this acceptance of the classics does a great deal of harm. The uncritical admiration of the Bible and Shakespeare in England is an instance of what I mean.
설명:
이 글에서는 대중이 예술을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그 뉘앙스를 진정으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탐구합니다. 화자는 고전 작품이 이해나 즐거움에서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회에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용인되고 존경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인용문은 예술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진정한 참여를 방해하고, 개인의 생각과 평가보다는 무비판적인 수용 문화를 조장하는 사회적 규범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비유와 사례: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저녁 식사 파티에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이 제공되는데, 손님들은 그 음식이 맛있거나 복잡한 맛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제공된 음식이기 때문에 음식을 소비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손님들은 개인적인 취향이나 요리에 대한 지식은 무시한 채 명성만으로 셰프를 칭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중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성경과 같은 예술을 소비할 때,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미식가들이 미식 요리를 진정으로 맛보거나 이해하지 않고 칭찬하는 것처럼, 이러한 작품이 전통에 의해 '고전'으로 선포되어 개인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음미하기보다는 존경받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장:
반면에 건강하지 못한 예술 작품은 스타일이 뻔하고 고리타분하며 흔하고, 작가가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이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주제를 선택한 작품입니다. 사실 대중이 건강하다고 부르는 대중 소설은 항상 철저하게 건강에 해로운 작품이며, 대중이 건강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항상 아름답고 건강한 예술 작품입니다. An unhealthy work of art, on the other hand, is a work whose style is obvious, oldfashioned, and common, and whose subject is deliberately chosen, not because the artist has any pleasure in it, but because he thinks that the public will pay him for it. In fact, the popular novel that the public calls healthy is always a thoroughly unhealthy production; and what the public call an unhealthy novel is always a beautiful and healthy work of art.
설명:
이 발췌문은 '건강한' 예술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비판합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건전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작품이 진정한 창조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에 편승하여 영감이 없고 독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대중에게 '불건전하다'고 치부되는 작품도 사실은 풍부하고 진정성 있는 예술 작품입니다. 이 구절은 예술을 판단하는 주류의 기준에 도전하며, 진정한 예술은 흔히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보다는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것에서 발견된다는 생각을 고취시킵니다.
비유와 사례:
예술을 영혼을 위한 영양분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대중은 심심하거나 익숙한 맛의 음식만 건강하고 이국적이거나 복잡한 맛의 음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믿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매일 같은 조미료 없는 국물을 먹으면서도 그것이 모험을 즐기지 않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기 때문에 건강한 영양소라고 주장합니다. '건강한' 요리를 선택할 때, 그들은 처음에는 생소하고 복잡한 요리를 피합니다. 영양학자가 다채롭고 다양한 식단이 신체에 진정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안목 있는 예술가는 예술의 진정한 건강은 대중의 입맛에 낯설거나 대담하다고 거부되는 깊이, 복잡성, 풍요로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중이 예술에서 '건강에 해롭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은 예술가에게는 가장 실질적이고 예술적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문장:
두 사람 모두를 위해 크게 후회할 일입니다. 바리케이드 뒤에는 고귀하고 영웅적인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두에 선 기사 뒤에는 편견, 어리석음, 헛소리, 엉터리 말고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 네 가지가 합쳐지면 끔찍한 힘을 만들어 새로운 권력을 구성합니다. 예전에는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언론을 가졌죠. 그것은 확실히 개선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매우 나쁘고 잘못되었으며 사기를 떨어 뜨립니다. It is greatly to be regretted, for both their sakes. Behind the barricade there may be much that is noble and heroic. But what is there behind the leadingarticle but prejudice, stupidity, cant, and twaddle? And when these four are joined together they make a terrible force, and constitute the new authority. In old days men had the rack. Now they have the press. That is an improvement certainly. But still it is very bad, and wrong, and demoralising.
설명:
이 인용문은 바리케이드 뒤에 서는 것과 같은 물리적 반란 행위에 존재할 수 있는 고귀함과 언론 뒤에 숨어 있는 편견, 어리석음, 공허한 말, 전통에 대한 무분별한 고수 등 종종 무시할 수 없는 자질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언론을 역사적인 고문 도구인 교수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사회적 규범을 강요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미디어의 파괴적인 힘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디어가 어떻게 더 노골적인 형태의 통제와 강압을 미묘하지만 비슷하게 파괴적인 영향력으로 대체했는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비유와 사례:
은유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언론을 현대판 꼭두각시로, 대중을 무의식적인 마리오네트로 상상해 보세요. 저항과 억압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나타내는 가시적인 바리케이드와 달리, 꼭두각시(언론)의 줄은 거의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교묘하게 조종합니다. 사람들이 순진하게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신념은 실제로는 그 잘못된 힘에 의해 신중하게 조율되고 있습니다. 언론의 교묘한 지시는 사회 전체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타인에 대한 편견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으며, 펜, 즉 오늘날의 키보드를 휘두르는 것이 대중의 의식을 형성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과거에 채찍이 육체를 부러뜨린 것처럼 언론은 그 방식대로 정신을 부술 수 있습니다.
문장:
개인주의는 또한 이타적이고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권위의 비정상적인 폭압의 결과 중 하나는 단어가 적절하고 단순한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왜곡되어 올바른 의미의 반대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예술에 대한 진실은 삶에 대한 진실입니다. 요즘 남자는 자신이 입고 싶은대로 옷을 입으면 영향을받는다고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서 감정은 이웃의 견해에 따라 옷을 입는 것으로 구성되며, 그 견해는 대다수의 견해이기 때문에 아마도 매우 어리석을 것입니다. Individualism will also be unselfish and unaffected. It has been pointed out that one of the results of the extraordinary tyranny of authority is that words are absolutely distorted from their proper and simple meaning, and are used to express the obverse of their right signification. What is true about Art is true about Life. A man is called affected, nowadays, if he dresses as he likes to dress. But in doing that he is acting in a perfectly natural manner. Affectation, in such matters, consists in dressing according to the views of one’s neighbour, whose views, as they are the views of the majority, will probably be extremely stupid.
설명:
여기서 화자는 진정한 개인주의는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이기심과 애정이 없다는 생각을 제시합니다. 실제로는 사회적 기대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위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진정성을 영향을 받거나 가식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사회의 경향을 비판합니다. 이는 권위주의적 영향으로 언어와 개념이 왜곡되는 것을 강조하고, 다수의 강요된 기준에 따르기보다는 개인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하는 것을 포용하는 세계관을 장려합니다.
비유와 사례:
패션의 맥락에서 활기차고 파격적인 복장을 선택하는 개인을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 감각을 표현하지만, 사회에서는 '영향을 받은 사람' 또는 '너무 노력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최신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정으로 애정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웃이 다른 사람의 정원을 칭찬해서 꽃을 심는 정원사와 비슷합니다. 진정한 정원사는 여론에 상관없이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심는 것처럼, 진정한 개인은 단순히 사회가 허용하는 이미지를 반영하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기 위해 옷을 입습니다.
문장:
예술가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 형태는 정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그의 예술에 대한 권위는 우스꽝스럽습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예술가들이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가들은 독재자들을 지배해야 할 신하가 아니라 방황하는 원더메이커, 매혹적인 방랑자로서 그들을 즐겁게 하고 매료시키고 고통받으며 평화롭게 창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The form of government that is most suitable to the artist is no government at all. Authority over him and his art is ridiculous. It has been stated that under despotisms artists have produced lovely work. This is not quite so. Artists have visited despots, not as subjects to be tyrannised over, but as wandering wondermakers, as fascinating vagrant personalities, to be entertained and charmed and suffered to be at peace, and allowed to create.
설명:
이 발췌문에서 화자는 예술가가 정부의 권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화자는 전제주의가 예술적 창작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반박하고, 대신 예술가는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기질에 따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을 때 번창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술은 정치적 구조와 제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해야만 그 진정성과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분명한 입장입니다.
비유와 사례:
예술가와 정부의 관계는 은유적으로 야생화와 정원사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야생화는 다양한 형태와 색으로 자유롭게 피어나며, 정원사가 성장이나 모양을 지시하지 않아도 번성합니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로 특정 기준이나 이념에 맞게 표현을 다듬고 다듬는 관리 기관 없이 야생화처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고의 야생화가 정원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초원에서 번성하듯, 최고의 예술은 정부의 제한적인 손길이 닿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나 자연 그대로의 영광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문장:
현대인의 삶에서 저속함과 어리석음은 매우 생생한 두 가지 사실입니다. 당연히 후회하게 되죠. 하지만 저기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연구 대상입니다. 그리고 현대의 언론인들과 관련하여, 그들이 공개적으로 누군가에 대해 쓴 글에 대해 항상 사적으로 사과한다고 말하는 것은 공평합니다. In modern life, Vulgarity and stupidity are two very vivid facts. One regrets them, naturally. But there they are. They are subjects for study, like everything else. And it is only fair to state, with regard to modern journalists, that they always apologise to one in private for what they have written against one in public.
설명:
이 섹션에서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저속함과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이 문제의 원인으로 현대 저널리즘을 지목합니다. 얄팍하고 교양 없는 행동과 생각이 두드러지는 실망스러운 현실을 인정합니다. 언론인이 공적인 비판을 사적으로 철회하고 사과한다는 개념은 개인적인 이해와 직업의 선정주의적 경향 사이의 불협화음을 시사합니다. 이 인용문은 사회적 악습뿐만 아니라 종종 대중의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업계 내의 이중성을 비판하기 때문에 영향력이 있습니다.
비유와 사례:
이러한 맥락에서 언론인의 행동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사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건강에 해로운 식단을 공개적으로 추천하는 의사의 행동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대중의 승인이나 선정성을 추구하면서 미덕이나 가치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속하고 비지성적인 콘텐츠를 전파하는 언론인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비밀리에 사과하는 의사처럼, 이들 역시 사석에서 자신의 진정한 관점을 드러내며 대중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어리석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관행은 의사의 위선에 속아 고통받는 환자들처럼 언론인의 개인적 진실성뿐만 아니라 사회의 집단적 지적, 도덕적 건강도 훼손합니다.
문장:
예술가는 결코 병적이지 않다. 그는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주제 밖에 서서 그 매체를 통해 비교할 수없는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병적 증상을 주제로 다룬다고 해서 예술가를 병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썼다고 해서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An artist is never morbid. He expresses everything. He stands outside his subject, and through its medium produces incomparable and artistic effects. To call an artist morbid because he deals with morbidity as his subjectmatter is as silly as if one called Shakespeare mad because he wrote ‘King Lear.’
설명:
이 성명서는 예술가의 역할은 어둡거나 불쾌한 것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측면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병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예술가를 옹호합니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삶을 반영하고 굴절시킬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암울한 주제에 대한 예술적 탐구를 예술가 자신의 병적 징후로 오해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 글은 외과의사의 기술과 치료하는 질병을 구분하는 것처럼 예술가와 작품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비유와 사례:
이 아이디어와 관련하여 예술가를 눈앞의 풍경을 비추는 거울로 상상해 보세요. 풍경에 암울하거나 음울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거울이 본질적으로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울이 제시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함으로써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에서 고통이나 죽음의 주제를 탐구한다고 해서 예술가를 병적인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은 거울에 비친 암울한 장면을 거울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거울이 절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예술가는 더 넓은 인간 경험을 위한 통로 역할을 할 뿐 병적인 것과는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따라서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의 비극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광기라고 비난하는 것은 거울을 실체와 착각하는 것, 즉 메시지와 전달자를 혼동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장:
물론 대중은 이 단어를 매우 무모하게 사용하죠. 워즈워스를 부도덕한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워즈워스는 시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찰스 킹슬리를 부도덕한 소설가라고 부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킹슬리의 산문은 그다지 훌륭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Of course, the public are very reckless in their use of the word. That they should have called Wordsworth an immoral poet, was only to be expected. Wordsworth was a poet. But that they should have called Charles Kingsley an immoral novelist is extraordinary. Kingsley’s prose was not of a very fine quality. Still, there is the word, and they use it as best they can.
설명:
이 발췌문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작품을 가진 예술가에게 '부도덕'이라는 용어를 오용하는 경향을 강조합니다. 워즈워스와 킹슬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이러한 판단이 종종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진정한 도덕성과 여론에 의해 부도덕하다고 비난받는 것 사이의 괴리를 시사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결함이 있는 판단 체계가 정보에 기반하지 않거나 피상적인 대중의 비판에 대한 비난이라고 지적합니다.
비유와 사례:
대중이 '부도덕하다'는 용어를 오용하는 것은 아마추어 정원사가 낯선 식물을 모두 잡초로 분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눈이 흔하지 않거나 이질적인 식물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생소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낙인찍는 것처럼, 대중은 심오한 예술이 기존의 관습이나 편안한 이해에서 벗어날 때 부도덕하다고 오인합니다. 대중은 '비도덕적'이라는 단어를 낫처럼 휘두르며 자신의 정원에서 벗어난 문학 작품에 무차별적으로 휘두릅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사용은 다양한 문학의 미묘한 성장과 깊이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워즈워스의 시나 킹슬리의 소설이 문화적 경관에 가져다주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평가절하하는 것입니다.
문장:
사람들은 매우 큰 범위에서 문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안 장식과 가구 등에서 혁명의 놀라운 성공은 대다수 대중이 그런 문제에 대해 매우 훌륭한 취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공평할 뿐입니다. 그것은 주로 사물의 장인들이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즐거움을 너무나 높이 평가하고 대중이 이전에 원했던 것의 흉측함과 저속함에 대한 생생한 의식을 깨우쳐 대중을 굶겨 죽였기 때문입니다. People have been to a very great extent civilised. It is only fair to state, however, that the extraordinary success of the revolution in housedecoration and furniture and the like has not really been due to the majority of the public developing a very fine taste in such matters. It has been chiefly due to the fact that the craftsmen of things so appreciated the pleasure of making what was beautiful, and woke to such a vivid consciousness of the hideousness and vulgarity of what the public had previously wanted, that they simply starved the public out.
설명:
이 부분에서 저자는 미학과 가정 장식에 대한 대중의 취향이 변화했음을 인정하지만, 이것이 대중의 선호도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보다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열정에 불타서 저급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믿는 것을 만들어낸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인들의 수준 높은 취향은 대중에게 변화를 효과적으로 강요하여 대중의 미적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유와 사례: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똑같은 디자인에 익숙해져 계속 같은 디자인을 요구했기 때문에 모든 건물이 똑같아 보이는 칙칙한 회색 도시를 상상해 보세요. 그러던 중 선구적인 건축가 그룹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선명한 색상과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한 본질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마을의 단색 청사진을 무시하고 더 이상 칙칙한 건축물을 짓는 것을 거부하며 생동감 넘치는 건축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화려한 건물들은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축가들이 더 이상 회색을 공급하지 않아 회색은 사라지고 이 마을은 다양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대중은 자신의 진화한 취향이 아니라 새로운 미학을 구상하고 구현한 건축가들 덕분에 회색에 '굶주린' 것입니다.
문장:
군주와 군중을 구분할 필요는 없으며, 모든 권위는 똑같이 나쁘다. 독재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신체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있다. 영혼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모두 지배하는 독재자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왕자라고 불립니다. 두 번째는 교황이다. 세 번째는 인민입니다. There is no necessity to separate the monarch from the mob; all authority is equally bad. There are three kinds of despots. There is the despot who tyrannises over the body. There is the despot who tyrannises over the soul. There is the despot who tyrannises over the soul and body alike. The first is called the Prince. The second is called the Pope. The third is called the People.
설명:
이 구절은 육체적 자아에 대한 것이든, 정신에 대한 것이든, 또는 둘 다에 대한 것이든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 통제를 비난합니다. 이 구절은 세속적, 종교적 지도자뿐만 아니라 집단적 대중(또는 여론)도 각기 다른 능력으로 폭정을 가하며, 따라서 개인에게 똑같이 해롭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특히 다수가 강요하는 획일적 사고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획일적 사고는 개인주의를 억압하는 일종의 전제주의라고 주장합니다.
비유와 사례:
세 명의 정원사가 넓은 정원의 각기 다른 부분을 관리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왕자를 대표하는 첫 번째 정원사는 모든 식물을 수평으로 자라게 하여 태양을 향해 위로 뻗으려는 식물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억압합니다. 교황을 상징하는 두 번째 정원사는 식물이 그늘에서만 자라야 한다는 믿음으로 식물을 세뇌시켜 햇빛이 해롭다고 설득합니다. 인민을 상징하는 세 번째 정원사는 모든 식물이 다수의 성장을 모방하도록 요구하는 합의의 폭정을 행사하여 다양성이 결여된 단조롭고 획일적인 정원을 만듭니다. 정원사가 다양하고 활기차던 정원에 제약을 가하는 것처럼 왕자, 교황, 인민은 각자의 영역을 통해 개개인의 표현을 질식시켜 궁극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다양한 인간 존재의 풍요로운 잠재력을 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