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특수학교 가기가 서울대 가기보다 어렵다고?

아이는 부모 마음대로 안되지만 국가는 국민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것 아닐까

"The Beggar's Opera" by William Hogarth (1728)
Hogarth의 'The Beggar's Opera'는 계급, 도덕성, 사회 정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아내며,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투쟁을 상기시킨다.


<이 글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픽션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운 좋게도 서울대를 세번(학-석-박) 합격하고 세번 다녔다. 좋은 학교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좋다고들 말하고 아무튼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기 어려운 학교가 있으니, 바로 특수학교다. 아동이익 우선원칙에 따를 때 특수학교가 좋은지 일반학교(통합교육)가 좋은지 많은 논쟁이 있지만, 일단 우리나라에서 장애학생 가족들은 명분보다는 현실의 문제로 일반학교를 강요받는 게 현실인 것 같다.

 아이가 학교를 입학할 나이가 되면 중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도 1년 전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겪었다.  어린이집 특수교사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특수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특수교육이 꼭 필요한지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실사 평가를 거쳐야 한다. 이 점수가 중요해서, 어떤 장애학생 부모에게 듣기로는 눈물을 머금고 아이가 떼를 쓰게 방치하거나 유도해야 유리하다고 한다. 평가 전에 일부러 밥을 굶기고 화장실을 안보내서 최하 점수를 받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러한 행동(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이 심각한 부정행위라고 생각하며, 동의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모로서 그러한 딜레마에 빠지는게 이해는 간다. 그날따라 (부모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순하고 착했던 우리 아이는 등수로 치면 경쟁자 30여명 중에 20등(특수학교에 갈 필요성이 높은 순서대로 셌을 때) 정도 했다고 들었다. 최종 합격자는 5명 정도라고 했던가. 과장을 좀 보태면, 울고 떼쓰는 경연대회라고나 할까. 합격 비결이 무엇이었을지, 어느정도 수준이어야 합격할 수 있을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어떤 기사에서는 경쟁률이 7:1 정도라고 하던데 그게 맞는 것 같다. 1년 입학 유예를 했으니 좀더 가산점이 있지 않을까, 시스템적인 해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 나라에선 과도한 희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나라를 무척 사랑한다. 그러니 국가도 우리를 좀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5명의 합격자에 들어가기 위해서 30여 가족이 고군분투, 악전고투하는 이 현실이 약간 블랙코미디처럼 보였다. 봉준호나 박찬욱, 홍상수가 이 아이러니를 영화적으로 연출하면 참 재밌을 것 같은데,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았다. 특수학교에 들어가는 게 아이에게 더 좋다고 믿었으니까, 아이의 이익을 우선으로 해서 나는 부정직한 짓을 했어야 하는 걸까? 지금 너를 괴롭게 해야 네가 저 학교에 들어가서 덜 괴로울 수 있어 라는 비겁한 대사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부모들은 답답하게 특수학교에 안보내고 일반학교에 보내서 남들한테 피해를 주는거야?"라는 누군가의 비아냥까지 더해지면 아이러니한 영화의 피날레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나는 통합교육의 장점에 대해 공감하고 분리정책이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에도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한 주장의 전제는 통합교육을 위해 필요한 인력과 자원, 환경이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할 말은 많지만 이 글에서 논하지 말자) 결국 일반학교에 1년 보내면서 부모로서는 한계와 절망을 많이 느꼈다. 장애인 화장실이 없다는 게 좀 충격이긴 했지만 선생님 개인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진심이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매사에 감사하고 존경스럽다. 다만 이 나라를 사랑하기가 정말 쉽지 않을 뿐이다.


(제도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개인의 잘못을 면책해주는 것은 아니다. 직접 경험해본 적은 거의 없지만 분명 세상에는 분명 악한 장애인도 악한 특수교사, 악한 장애학생 부모, 가족도 있을 것이다. 역시 운이 중요하다.)


 올해에도 신입생 선발을 위해 전국 특수학교 입학을 위해 많은 가족들이 실사평가를 받을 것이다. 누군가는 불합격해서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결국 체념한 채 일반학교 입학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족한 환경과 현황을 보게 될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는 뭐든지 헤쳐나갈 수 있다고 다짐하며 부모상담에 갔다가 좌절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끝내 헛웃음이 터질 지도 모른다. 그런 안타까운 영혼이 올해에도 브런치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장애인, 아동 당사자의 문제와 보호자, 가족의 문제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장애인 담론을 부모의 시각에 종속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다만 처참한 특수교육 현실은 때때로 관계자들의 놀라울 정도의 의견일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떤 현실은 우리의 상식과 통념을 아득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수도권은 경쟁이 더 심하다. 내가 학교와 직장을 바꿔서라도 지방에 갈까 했는데, 그런다고 아이의 입학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각종 발달치료센터가 수도권에 몰려있으며, 이주하는게 새로운 환경을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좋지도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누구는 '배가 불렀네'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지방뿐만 아니라 어디 정글이나 산꼭대기에라도 아이를 위한 환경이 잘 갖춰진 곳이 있다면 찾아가려는 부모가 대다수일 것이다.

 심지어 서울 어딘가에서 부모들이 무릎꿇고 특수학교 설치를 호소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언젠가부터는 슬픔을 넘어서 이런 현실이 신기하고 우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릎꿇기 정도가 아니라 물구나무 서서 트리플 악셀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일 것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세상이 단체로 리얼한 몰래카메라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게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나라라니.. 매트릭스, 트루먼쇼, 통 속의 뇌, 메타버스 뭐 그런건가 싶었다.

 내가 서울대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들이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다. 서울대생보다 부러운 게 서울대생 학부모들이라고. 아이는 부모 마음대로 안된다는 말이 그 유머의 포인트다. 그런데 나도 묘하게 비슷한 심정을 느낀다. 특수학교에 보낸 학부모들은 참 좋겠다 싶지만 그런 질투의 심정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최대한 눌러놓자. 아이는 부모 마음대로 안되지만 사회와 국가와 정책은 국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게 이 글의 포인트다. 세상을 바꾸기가 부담스럽다면 일단 마음이라도 먹자. 마음먹기가 부담스럽다면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기라도 하자. 인지하고 싶지 않다면 말과 행동이라도 조심하자. 최소한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일반학교에 보내서 민폐를 끼치느냐'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말자.


 p.s.  의식의 흐름대로 횡설수설했는데 속이 후련하긴 하다. 나는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상처가 될까봐 아무 말도 안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악의 없는 무지는 악플과는 다르고, 언제든지 후원자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당연히 나도 잘 모르는게 많지만 1년 후배 장애학생 부모들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서 글을 남긴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정부는 기독교를 칭하며 매일 예수를 처형한다-존 브라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