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ma Sep 28. 2021

정리, 그리고 정리


아, 정리해야 되는데
 


'정리'의 주어도 없이 저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중고등학생 때는 시험기간만 되면 책상 정리가 너무 하고 싶었다. 주위가 정리되어야만 나의 머릿속도 정리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항상 정리를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성적이 잘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하루에 해야 할 일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적인 부분만 정리해놓고 단계별로 끝내듯 줄을 그었던 습관이 나의 생활까지 들어왔다.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사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등을 적어놓는 것도 그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물론, 좋은 습관이었다. 하루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시간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하루라는 시간 안에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들을 해내곤 했다.


좋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잘 살아가고 있다고, 내 삶이 가득 채워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적어놓지 않으면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고 빨리 끝마친 날엔 뭘 해야 될지 몰라 멍 때리고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해야 할 일을 못하는 날에는 날이 서 있는 사람처럼 짜증을 부렸고, 그 모습이 나조차 낯설었다.


정리를 해야 되지만 뭘 정리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의 반복은 오히려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던 삶에 들어온 급브레이크에 나는 크게 넘어져버린 것이다.


혹여나 영영 못 일어날까 싶어서 나는 나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최소한의 해야 할 일들을 제외한 시간에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한 달 정도를 지내보기로 했다. 비 오는 날에는 모든 일을 미루고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영화들을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보고 싶은 만큼 보며 밤을 새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조금은 미뤄두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즐거운 것들을 하며 일어나기 위한 발판을 다져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 덕에 상처는 빨리 아물고 다시 일어서서 내가 달려온 길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달리기 시합처럼 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무얼 그렇게 빨리 달려왔던 것일까. 쫓아오는 사람도, 앞서가는 사람도 없는 오직 나의 길인데 내가 너무 조급했다는 것을 알았다. 최선을 다해 달린 것도, 넘어져서 그대로 멈춘 것도, 지금 걷고 있는 것도 그 어디에도 후회는 없다.


그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매일 밤 나에게 "오늘 행복했니?"라고 묻는 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무엇이 두려운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