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은 장식품이다.
넓은 거실 모서리를 썰렁하지 않게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덥고 힘들더라도 에어컨을 언제든지 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다.
그런 상징적 존재였던 에어컨이 올여름 열일을 하고 있다.
"인버터 에어컨은 그냥 쭉 틀어놓는 게 오히려 전기세가 많이 안 든다니까!"
몇 번을 얘기해도 엄마는 믿지를 않으셨다.
계속 꺼야 하지 않냐고, 물으셨다.
밤 새 틀어놓고 자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예전에 에어컨을 안 켰다고 하니 회사 후배가 한 마디 했다.
"돈도 많으면서 에어컨을 왜 안 켜요.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그래서 정확하게 팩트를 수정해 줬다.
"첫째, 돈이 많지 않고, 둘째, 에어컨을 안 켜는 것이 아니라 엄마 때문에 못 켜는 것이다"
라고.
그런데 올해, 에어컨을 켜기 시작했다.
우선 무덥다.
역대 최장 열대야 기록까지 깼으니 말이다.
역대 가장 더웠던 1994년 여름을 똑똑히 기억한다.
고등학교 2학년, 수업시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경험을 처음 했다.
지금처럼 모든 교실에 에어컨이 있는 시절이 아니다.
선풍기 한 대? 있긴 했었나? 하는 시절이다.
오른손으로는 필기도구를, 왼손으로는 부채를 계속 부치는 그런 시절이었다.
입시를 앞둔 고3 선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힘내라고 했던 기억도.
올해 입시 당사자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하는 기억도.
그래서 그해 여름이 얼마나 더웠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해보다 더 더운 여름이 바로 올해라고 한다.
에어컨을 켠 이유가 단순히 역대급 무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무조건 반강제적으로 켜고 있다.
엄마의 컨디션이 많이 좋지 않으신 것을 느낀다.
연세가 들수록 더위에 더욱 버티기 힘들어하신다.
입맛 없다며 식사도 잘 챙겨드시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서.
그 전기세 몇 푼이 뭐라고!
엄마의 의견은 묻지 않고 내가 더워 죽겠다며 핑계를 대며 에어컨을 틀었다.
애들이 있는 집은 24시간도 튼다던데.
엄마는 지금 내겐 아이와 같다.
오늘도 출근하며 엄마에게 신신당부했다.
나 없다고 에어컨 안 켜지 말라고.
9시부터 켜라고!
혼자 있어도 에어컨 켜고 시원하게 계시라고.
돈 몇 푼에 건강 잃는다고.
점심시간 전화하니.
엄마는 역시나 안 켜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