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갈 시간들
약속이 있어 친정에 아이들을 맡기고 밤늦게 돌아온 날이었다. 엄마가 없는 저녁,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 대화를 나누던 딸이 남편에게 물었단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돼?
할머니 말대로 다시 환생하는거야, 아니면 천국이라는 곳에 가?
할아버지는 이제 어디에 있어?
과학이 더 발달하면 엄마 아빠는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아?
올봄 장례식 때 동생들과 웃고 떠들던 딸은 화장장에서 관을 따르며 비로소 실감이 난 듯 엉엉 울었다. 지금도 가끔씩 할아버지한테 기도했어, 편지를 썼어, 하며 나름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남편은 딸에게, 아무리 의학 기술이 발달해도 사람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다. 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도 있다.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만날 수 없고, 죽은 후의 다음 세상도 지금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고. 그러니 이렇게 우리가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들이 소중한 거라고 답해줬다고 한다.
조용히 듣던 딸은 그런 생각을 하니 많이 슬퍼진다고 했다.
7년 전 이모가 돌아가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올해 아빠를 보낸 후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도 그 안에서 죽음과 만난다. 잠시 잊었다가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구나 깨닫는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나에게 남은 것처럼 내가 없을 세상에서 내가 자리했던 곳, 나와 관련된 물건들을 보며 나를 떠올릴 사람들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절에 다니는 엄마처럼, 독실한 크리스천인 친구처럼 죽음 이후를 확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안심하고 의연할 수 있을까. 여한이 없는 마지막이 가능할까.
어떤 기억들은 옅어지고 불현듯 생각나는 어떤 것들은 새삼스럽게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이모가 뻥튀기 봉지에 손도 대지 않는 나에게 젊은 여자애들은 주전부리를 달고 산다는데 넌 왜 통 먹지를 않니,라고 말했던 것이나 넓은 접시에 카레를 수북이 담아 건네며 이가 빠진 그릇은 쓰는 게 아냐. 시집가면 혹시라도 시부모님상에 올리면 안 된다. 이런 것들.
아빠가 매일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는 요양원 창밖의 도로를 지나며 아빠의 시선이 머물렀을 산을 바라보는 것. 이제 겨울이구나 싶어 아침에 아이들 두꺼운 패딩을 챙기다가도 아빠가 잠옷바람으로 밤늦게 헤매던 거리가 그땐 봄이라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아빠가 숱하게 다녔지만 낯선 길에서 느꼈을 두려움과 막막함에 닿는 것.
결국 가게 될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삶의 페이지마다 무엇을 쓰고 채워나가야 하나.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음으로 수렴되는데 안되는 것에 짜증 내고 아쉬워하는 게 덧없다가 한편으로는 흘러가는 순간들에 조바심 나기도 한다. 그러다 아이들을 돌아본다. 시간을 쪼개어 담아 많이 보고 느끼고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