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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 Dec 01. 2023

독서의 허기

구멍 난 쇼핑백 채우기

  어린 시절에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독서의 시작은 이끌림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엄마가 읽어주었던 링컨과 퀴리부인이 시작이었다. 다른 위인전들을 읽으며 장래희망이 수도 없이 바뀌었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중고로 들여 놓은 명작 전집과 추리소설에 빠졌다.  남들처럼 백과사전을 전집으로 사줄 수는 없는 형편이라 엄마가 어디선가 구해온 인명사전, 한국사, 세계사 3권의 백과사전을 닳도록 들여다보았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칠판 가득 빼곡히 도서 목록을 적어 주셨다. 책을 사랑한 본인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앞으로 가까이했으면 하는 책들을 써 주셨던 것 같은데 아마 그때 나는 한눈을 팔았었나 보다. 방학 중 읽어야 하는 과제로 알아들었다.


  거기에는 개화기 이후 한국 단편 문학들부터 브론테 자매, 헤밍웨이 등의 영미 문학과 러시아 문학까지 듣도 보도 못한 제목들이 펼쳐져 있었다. 입학 전에 아빠와 헌책방에서 사서 본 윤동주와 데미안을 빼고는 생소한 책들이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낯선 이름들을 여러 번 확인하며 노트에 적었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내미니 아직 너에게 너무 어려운 책들인 거 같은데,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꼭 읽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니 엄마는 막내 이모에게 연락을 하셨다. 이모부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방학 때 가서 며칠 머물고 서재에서 책을 빌려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엄마의 계획대로 이삼일 간 수학 선생님인 막내 이모와 공부를 하고, 오는 길에 양손 가득 책을 담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동생과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가며 집에 도착하니 책 무게를 못 이겨 쇼핑백 귀퉁이가 터져 있었다.




  갈등 구조와 서사가 뚜렷한, 특히 사랑 이야기가 있는 책은 잘 읽혔다. 현명한 제인 에어가 권위적인 로체스터와 결혼한 선택에 분개하고 똑 부러지는 엘리자베스가 거만한 다아시에게 쏘아붙일 때는 통쾌함을 느꼈다. 언제 써먹을 때가 있을까 인물들의 대사를 읊조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책은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도시 빈민들의 처절한 삶은 와닿지 않았고, '노인과 바다'는 책상 위에 펼쳐 두고 하루에 몇 페이지씩 약 먹듯 방학 내내 읽었다. 생각해 보면 책을 여러 권 늘어놓고 읽는 습관이 이때부터 시작된 거 같다.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짧은 방학 동안 선생님이 써주신 책들을 거의 읽었다. 그건 아마도 중학생이 됐으니 어른의 책을 읽는다는 허세에 고지식한 성격이 큰 역할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얼떨결에 시작된 독서 여정은 시간만 나면 서점에서 아는 제목 주변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고 옆에 꽂힌 책이 궁금해서 한 달 용돈을 아껴 한 권씩 사들이게 되었다.


   그 시절에 나는 너무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가정 형편, 외모, 성적 등 비교할 것은 천지였다. 날아갈 듯 달뜨다가도 한없이 가라앉기도 하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를 책에 파묻혀 다독였던 것 같다. 답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이야기 속 인물들과 엉켜 울고 웃고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그 당시 나에게 미친 독서의 효용, 이런건 모르겠다. 그저 좋았다. 책은 허기진 한 구석을 채워주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지난겨울 학창 시절 읽었던 책들을 꺼내들었다. 그동안 고전 제목들을 볼 때면 제대로 읽은 책이 없어, 라는 생각이 들어서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중에는 좋아해서 몇 년마다 한 번씩 재독 했던 책들도 있었지만, 읽긴 했지만 대강의 줄거리도 기억이 안 나는 책들이 태반이었다. 읽을 당시의 내 모습과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의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다시 읽으며 든 생각은 14살의 나도, 17살의 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 대의 나와 만날 수 있었다.

책장을 더 늘리지 않기 위해 매년 중고책방에 팔거나 정리하고 있지만...

  아이들 책도 있는 데다가 거실에도 방에도 책들을 쌓아놓게 되니 감당이 안 될 지경이다. 이제는 도서관을 이용하고 소장할 만한 책을 선별해 구입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놀이방 한쪽 벽에 자리해 있는 책장이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을 비워야 해서 책을 정리해야 하는데 계속 미루고 있는 중이다. 책마다 언제 어떤 마음으로 들였는지 하나하나 떠올라 빨리 진행이 되지 않는다. 하나를 읽으면 또 읽을 책들이 보이고 책이 고프다. 나에게 책은 지난 사랑이고 추억이라서 마냥 섭섭하고 미련을 떨치기가 어렵다.



*제목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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