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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수 Jun 26. 2020

쥐불놀이가 아닌 폭죽소리

<폭죽소리 / 리혜선 글 / 이담, 김근희 그림 / 길벗어린이>


그림책 <폭죽소리>는 199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문학성 있는 단편소설에 깊이 있는 그림을 얹어 그림책으로 펴낸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글 작가 리혜선은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태어난 조선족 이민 2세로서, 청나라 말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두고 조선족 아이의 삶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여기에 이담, 김근희 부부 작가가 깊이와 무게감이 있는 그림을 더했습니다. 밀랍을 녹여 종이에 바른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 방식은 주인공의 거친 삶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잘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간되던 해에 볼로냐 아동 도서전 우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표지에는 쥐불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컴컴한 밤 불빛에 역광으로 비추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두운 실루엣으로만 표현되어 있고요. 그런데 왜 제목은 쥐불놀이가 아닌 폭죽소리일까요? 그런가 하면 페이지를 넘겨 본 속표지에는, ‘폭죽소리’라는 제목 아래에 폭죽놀이 장면이 제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큰 기와집 마당에 폭죽이 터지면서 기와집이 훤히 빛나고 있지요. 쥐불놀이와 폭죽소리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은 청나라 남강, 왕 씨 일가가 사는 기와집입니다. 어느 날 커다란 개 헤이랑이 창고에서 컹컹 짖습니다. 부잣집 쌍둥이 딸들이 놀라 지켜보는 가운데, 관 속에서 깨어난 아이, 연둣빛 낡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놀란 눈을 한 이 아이가 바로 이야기의 주인공 옥희입니다.



옥희는 조선족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고작 곡식 한 되에 팔려온 것이었습니다. 청나라 부잣집 딸들과 대비되는 조선족 옥희의 삶은 가련하기만 합니다. 옥희는 노망 든 할머니를 돌보고 빨래를 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는 일도 잦습니다. 그러나 옥희는 개 헤이랑과 염소 순돌이를 친구 삼아 씩씩하게 이겨냅니다. 제기놀이를 매개로, 말도 통하지 않던 이웃집 밍밍이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요.


담담하게 옥희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작고 여리기만 하던 옥희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설에는 폭죽놀이를 하는 청나라 아이들에게 조선의 쥐불놀이를 가르쳐 줍니다. 마른 들에 불을 놓아 태우는 쥐불놀이로 아이들은 한결 친해집니다. 그러나 이곳은 옥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옥희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고,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밤, 옥희는 조용히 집을 나와, 조선족들이 모여 산다는 남강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곳에서는 때마다 쥐불놀이를 하는 개간민들 때문에 연기가 자욱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족이 살던 남강은 연기가 많아 ‘옌지’라고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연길’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리혜선 작가가 사는 연길이 바로 옥희가 살던 남강인 것입니다.


오래전 설 연휴에 중국 북경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 값이 싸다는 이유로 떠난 여행이었는데, 연휴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폭죽 소리와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연기에 둘러싸여 버렸습니다. 그제야 새해를 맞이하는 중국의 폭죽놀이 풍습에 알게 되었고, 왜 비행기 값이 싼지도 알게 되었지요.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소음과 공해에 폭죽놀이를 하는 풍습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어린 옥희가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 중국 부잣집에 팔려가 생활할 때는 그 낯섦과 소외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이제야 이 책의 제목과 표지가 전하는 깊은 여운을 느끼게 됩니다. 쥐불놀이를 하는 풍경, 옥희의 마음속 풍경을 그려놓고, ‘폭죽소리’라는 제목을 역설적으로 달아놓으니, 옥희가 대변하는 중국 조선족들의 처지가 더욱 와 닿습니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중국의 연길이라는 땅에,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혹은 알고도 자꾸 잊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옥희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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