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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형지 Sep 11. 2021

오랜만에 CPR을 쳤다.


※ CPR : 심폐소생술


오늘은 Extreme하게 바쁘진 않았지만 쫌쫌따리 바쁜 일이 있어서 하소연하듯 적고 자려고.

무엇보다 간만에 CPR 치는데, 울부짖는 보호자 소리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이런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해야지. 그리고 표출해야지. 그래야 오래오래 버틸 수 있다.


사실 바쁜 날이 아니고는 근무 일지를 딱히 적을 일이 없다. 

큰 이벤트나 문제가 없으니 굳이 새겨둘 필요가 없거든.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요즘 나의 듀티는 스테이블의 극치를 달리다가, 간만에 바빴다 이거지. 


6시 조금 넘었을 때 배가 너무 고프고 힘이빠져서 밥 후딱 먹고 나왔는데 얼마 안 돼서 별안간 CPR 시작했지. 이미 인계 때부터 도파민, 도부타민, 노에핀 더블로 고용량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 추가되는 order에도 혈압이 60대였던 환자는 CPR 시작직전 혈압은 30~40, 맥박은 50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보호자 면회를 잠시 진행한 뒤, 맥박이 본격적으로 늘어지기 시작했을 때 CPR을 시작했다.


워낙에 심기능이 좋지 않고, 심장을 뛰게 하는 한 혈관이 꽉 막혀있는 심근경색 환자라 

급사/CPR 가능성에 대해 보호자에게 고지되어 있었고, 

때문에 CPR칠 준비도 미리 해둔 터라 큰 문제 없이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오늘은 자동흉부압박기 루카스도 구비되어 있었고. 



자동흉부압박기 루카스 : 녀석을 환자 흉부 위치에 맞춰 끼우면 알아서 압박을 시작한다. 



다만 30분 정도 치다가 막판에 배터리가 나가서 2cycle 정도는 매뉴얼로 압박했다. 

그동안 가슴 한가운데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역시나 선홍색 피가 구강으로 역류했다.


오늘 내 포지션은 앰부배깅이였는데, 항응고제를 사용한 환자여서인지 (Ambubag. 고용량 산소를 수동으로 제공할 수 있는 장비.) bag과 연결된 E-tube는 물론 구강,비강으로 피가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줄줄 새나왔다.' 그래서 일회용 매트에 피 닦고, 배깅하고, 닦고, 배깅하고를 반복했지.


처음엔 석션도 몇 번 했지만 나중엔 소용이 없더라고.

이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미세하게 뛰는 심장을 잡아보겠다고 피로 뒤덮인 목선을 헤집어 경동맥박을 확인하고, 장갑선 밑으로 흐르는 피를 모른체하고 앰부배깅을 해댔지.


11번의 에피네프린과 약 30분의 compression 끝에 환자는 사망했다. 어쩐지 허무함이 피어올랐다. 

근래 의료, 간호 윤리와 그에 파생되는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 본 경험이 있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선연한 대상을 다룰 때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나. 

반복되는 허망한 사망에 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임상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가.

내 몸이 고되다는 이유로 '어차피 사망할 텐데, 이게 무슨 소용일까'라고 한숨 쉬지 않은 적이 있나.

동일한 조건과 비용을 지불하고도 상대적 중환자 앞에서 내팽겨치져지는 다른 환자들의 욕구는 어떻게 해소, 보상될 것인가. 환자의 권리를 최우선 한다 외치며 앞다투어 장전을 내어놓으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하지 않은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한 한국의 의료계와 간호계에는 과연 일말의 기대점이 잔재하는가. 등. 

 

숱한 딜레마와 고민 속에서 오늘도 한 영혼이 세상을 떠났다. 속절없이. 참으로 황망히. 

대개 CPR 이후 환자의 외관은 말도 안 되게 엉망이 되기 때문에 

(체구가 작고 지방이 적은 사람은 부서진 갈비뼈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

보호자 면회 전에 빠르게 사후 처치를 하고 널브러진 장비와 카트를 치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환자를 뒤덮고 있던 도관을 제거하자 자리마다 끝없이 피가 흘러나온다.  

사후 완전히 열려버린 항문에서 잔재하던 변이 질질 새어 나온다.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환자를 옆으로 돌리니 구강에 남아있던 핏물이 쏟아진다. 

피부와 모니터링 기계의 선마다 피가 덕지덕지 굳은 채 묻어있다. 벅벅 문질러 닦는다.

축 늘어진 시체를 들어 일회용 매트를 여러겹으로 깔아낸다. 어찌저찌 사후처치가 끝난 대상의 입에 

마스크를 씌워드리고 주변을 정리를 마친다. 7~8명의 보호자가 그제서야 중환자실로 들어선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이 퍼렇게 변색된 육신을 잡고 울부짖는다. 

오열한다. 

소리 지른다.

'왜, 아빠마저 이러면 어떻게 해. 가지 마, 으흑흑, 아흑.' 

순간 심장을 세차게 망치로 때려맞은 양 울컥함이 두 눈 위로 오른다. 


그러면서 내가 맡은 환자들을 몰래 훑어본다. 3/4가 명료한 환자들인지라,

다들 눈은 감고 상관없는 척하지만 어쩐지 불편한 얼굴색이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CPR 소리와 사망선고, 이어지는 보호자들의 울음소리에 마음을 편히 둘 수 없었겠지.

묘하게 긴장감이 서린 그 얼굴들을 바라보니 어쩐지 감정이 더 울컥거린다. 


꽉 막힌 천장, 공포스러운 모니터, 기계 소리, 그리고 한 섹션 너머로 죽어가는 타인과

뒤따르는 기괴한 처치 소리, 어색한 정적은 나 역시도 버티기 힘들 거다. 연민 비슷한 것이 든다.

마지막 라운딩을 돌며 안정된 목소리를 건네는 것을 간호 삼아 환자들의 안위를 살핀다. 




지인을 비롯해 이웃들은 나에게 참 열심히도 산다, 

당신 덕에 자극받는다며 칭찬 겸 응원을 종종 건네준다.


이에 나는 항상 같은 이유를 들어 대변하듯 답을 한다. 

생의 불공정함이 가장 두드러진 병원 침대 위를 매일 같이 들여다보면, 

나는 뭐라도 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게 된다. 

불수의적이고 자의가 아닌 상황을 버텨내고 수용하려면, 그만큼 후회 없이 생을 짓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신의 차별에 맞설 수 있는 인내심과 정신력을 길러야 한다. 


부디 미래를, 내일을, 1시간 후를, 아니 1초 후를 함부로 자신하지 말자. 

죽음이라는 거대한 것을 친밀한 존재로 조각하기 위해 자꾸 떠올리고 곱씹어 보자. 

동시에 온갖 편견과 비난을 뒤집어쓴 죽음의 억울함을 한 꺼풀 벗겨 내주자. 


번잡함과 고민, 슬픔, 우울함 따위가 신기하리만큼 명료하게 정리될지도 모른다. 

행복한 감정들을 무척 잘 저축하는 우수 예금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확고한 취향과 신념으로 삶을 꾸려가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죽음은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보답해 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덧붙여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나에게 소소한 감사를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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