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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금아 Nov 01. 2024

작별

  


  


  하얗게 웃던 미카엘라의 미소가 떠오른다.  

  결혼하면서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두 시동생과 함께 살았다. 나와 동갑이었던 작은시동생은 군대를 갔다 오고도 몇 해가 지나서야 대학에 들어가느라 졸업이 늦었다. 취직도 느직하게 했지만(, 쉼표 추가) 금세 결혼 상대를 만났다. 핏기라고는 없는 백옥 같은 얼굴에 한 줌도 안 될 성싶은 허리가 걱정스러웠지만 정장 수트 차림에 맑은 눈, 단정히 묽은 머리가 아리잠직하고 순되어 보였다. 나처럼 딸부잣집 딸이고, 뚝뚝한 맏딸인 나와 달리 막내딸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시동생에게 준비해 둔 결혼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부모님은 세상을 뜬 뒤여서 맏이인 우리가 부랴사랴 혼례를 준비했다. 그즈음 우리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여윳돈이 없었다. 부족한 대로 서울 변두리에 작은 셋방을 얻어주었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예비 동서가 전할 말이 있다며 찾아왔다. 꾹 다문 입이 첫 번째와 달리 조금 고집스러워 보였다. 한마디도 않고 있어서 어디 불편한가 싶을 정도였는데 갈 때가 다 되어서야 건넨 말이 아연했다. 형님네는 좋은 동네에 살면서 왜 신혼집을 그런 곳에 얻어주느냐는 것이었다. 남편의 외벌이로 여덟 식구를 건사하면서 시동생 학비까지 대줬는데 기가 막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는 걸 보고서야 울음이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어머님이 세상 떠나고 남자들뿐인 집안에서 홀앗이로 부엌을 지키노라면 많이 외로웠다. 명절과 제사 때 음식 간 한 번 맞춰줄 이 없었으니 어서 동서가 생겨서 오순도순 자매처럼 살기를 바랐건만 그 사건으로 나는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 같다. 몇 달 후에 결핵을 진단받고는 더 피폐해졌다. 요양하느라 시골로 이사하면서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한식 때였다. 시부모님 산소에 갔다. 동서도 왔지만, 눈길이라곤 주지 않았다. 성묘를 마치고 갈 때도 막 꽃망울을 터뜨리던 산벚나무에 눈을 고정한 채로 타박거리며 걸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였다. 앞서 걷던 동서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내게로 달려왔다. 무릎을 꿇고는 큰 실수를 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닌가. 사회 출발이 많이 늦었던 시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오래 실업자로 있었다는 걸 감추고 싶었던지, 하지도 않은 직장생활을 꾸며 말하고 번 돈은 형수에게 맡겼다고 했단다. 내가 월급을 챙기고도 변변찮은 셋집을 얻어준 줄로 알았다며 개개빌었다.

  낯빛은 희다 못해 파리했고, 소맷귀에서 흘러나온 손은 임신으로 불룩해진 배를 감싼 채 떨리고 있었다. 올무를 빠져나오려고 바르작거리는 작은 새 같았다. 그 순간, 내 속을 채우고 있던 미움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서를 일으켜 세우고서 꼭 껴안아 주었다. 그만한 일로 내가 자발없이 왜 그리 타끈했는지 부끄러웠다.

  나흘 후였다. 입덧이 끝나간다는 말에 새 김치를 좀 담가서 보내고 싶었다. 김칫거리를 사다가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담그고 나니 여러 통이었다. 허리가 아파왔지만, 다음날 김치통을 건넬 생각에 씨엉씨엉 콧노래가 나왔다.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침착했다. 언제나 본론부터 말하는 그가 여느 때 없이 망설이더니 몇 번이나 다짐을 시켰다. “제수씨가‧‧‧‧‧.” 하는 순간, 동서가 죽었다는 말이 심장에 꽂혔다. 

  그날 장례식장은 빈방이라고는 없었지만, 내 울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결혼 십여 년을 지나는 동안 안간힘으로 살았건만 부모님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또 맞은 죽음 앞에 무너져 내렸다. 심장마비였다. 짧은 시간 내가 작심하고 내비쳤던 냉대가 동서와 뱃속 태아의 작은 심장을 얼어붙어 버리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두 개의 관을 싣고 동서를 묻으러 가던 길, 하늘에는 산벚꽃이 회한인 양 흩날렸다.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동서가 잘못을 빌던 순간에 나도 미안하다고 한마디라도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영혼은 땅에 매여버리고 말았다. 

  매일 밤 꿈에 동서가 발가벗은 아기를 안고 찾아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더니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낮에도 깜빡 잠이 들면 찾아왔다. 와서는 말없이 있다가 갔다. 동서는 우리 집이 거처인 양 밤낮으로 와 있었다. 무서워 집 안에 머물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가 남편이 퇴근할 때를 기다려 같이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며 길에서 시간을 보냈다. 잠 못 이루는 날이 계속되면서 결핵은 심해졌고, 신경 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밤이었다. 그날, 꿈에서 동서는 눈이 부시도록 해맑았다. 저만치에서 무어라 말을 하는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달려가 묻고 싶었지만, 내 발은 땅에 묶인 듯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동서는 어딘가를 향해 멀어져 갔다. 쏟아지는 빛 알갱이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녀를 애타게 부르다가 잠에서 깼다. 

  큰바람이 부는 듯, 침실 창이 덜컹거렸다. 창 너머 희붐한 공기 속으로 벚나무가 하염없이 꽃잎을 날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동서는 오지 않았다. 내가 청하는 용서를 들어주려고 그 먼 데서 찾아왔을까. 영혼의 매듭을 풀기까지 일 년여, 불편한 동거를 해주고 그날 새벽에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던 걸까. 나는 더는 밖을 떠돌지 않았다. 

  꽃이 질 때보다 빨리 가버린 스물아홉 생이었다. 미카엘라, 다음 생엔 금세 지고 말 꽃잎으로는 오지 마시게······. 

  동서가 가고 벚꽃은 서른 해도 넘게 피었다. 올해도 벚꽃이 진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려나. 흩날리는 꽃잎이 종소리가 되어 울려온다.  ‘사랑도 용서도 산 자의 특권’. 

  꽃잎에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미움과 반목과 불신‧‧‧‧‧‧. 불화했던 나의 모든 시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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