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래진 종이 끝들을 바라보자면 사진 속으로만 만나보았던 - 나보다 더 어린 나이의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 몇몇 바래고 구겨진 종이 끝을 보고자 하면, 그때의 엄마가 얼마나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생기기를, 건강히 태어나기를, 그리고 무탈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기셨을지 상상이 되어 괜스레 마음 한편이 찡해진다. 이런 보물 같은 책들이 바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애정의 증표 아니겠나.
그 수많은 책들 중 유일하게 내가 읽은 책이 한 권이 있는데, 바로 내 초등학교 시절에 유행했던 정선혜 작가님의 «엄마가 딸에게 주는 사랑의 편지»라는 책이다. 어려울 때마다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으로 쓰신 그 책의 마지막 챕터는 <탠디가 되렴>이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아버지가 생일날 사주신 인형을 빼앗겨 슬프게 울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길을 지나가던 청년이 다가와, 굉장히 중요한 걸 빼앗겨서 슬프겠지만 더 중요한 걸 알려주겠다며 아이를 달랜다; 바로 그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는 “탠디”라는 것을 알려주겠다고 말이다.
“응, 탠디란 ‘사랑하는 힘’을 말한단다. ‘용서하는 힘’이기도 하고, 또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기도 하지”
“내가 탠디란 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탠디는 탠디를 알아보거든! 탠디는 온 세상에 드문드문 퍼져 있거든, 너도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탠디족들을 알아보게 될 거야. 탠디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어.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에 탠디가 끼어들면 서로 용서하게 되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탠디는 힘을 주지. 낙심하는 사람에겐 용기를 주고, 우는 아이에게는 웃음을 찾게 한단다. 그래, 어쩌면 너는 나보다 더 큰 탠디가 되겠구나! 절대로 그 힘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단다.”
[…]
너는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그 아이가 바로 엄마란다. 이제껏 엄마는 내 딸이 ‘탠디’란 말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단다. 이제 너에게 ‘탠디’라는 명명식을 거행하고 싶어.
이제부터 너는 자신이 탠디임을 잊지 마렴. 탠디는 자기 주변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단다. 누구든지 너를 보면 네 눈동자의 맑음을 보게 되고, 이윽고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지.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은 잃었던 것들을 되찾게 한단다. 그러나 너, 탠디는 거기서 머물러 만족해서는 안 돼. 더 많은 탠디 형제들을 만나렴! 그래서 세상이 탠디족으로 하나의 나라가 되기까지 열심히 너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엄마가 딸에게 주는 사람의 편지» p. 171-173 발췌
그런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감명받으신 엄마는 나에게 또한 '탠디' 명명식을 거행하셨고, 그렇게 나의 닉네임이자 영어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다. 탠디라는 운명적인 삶.
이 책의 정확한 부분을 발췌하기 위해 오랜만에 그 책을 펼쳤는데, 왜 엄마가 나에게 그 영어 이름을 주셨는지 - 20대의 끝자락에 저문 지금, 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세상을 향해 잃지 않은 힘. 시련이 다가와도 용서하는 힘.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이처럼 개인 스스로가 이루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들을 "탠디족"이라는 낭만적인 공동체를 통해 힘을 얻길 바라지 않으셨을까?
나는 워낙 어릴 적 해외에 나오게 됐는데, 그 당시에는 부르기 쉬운 서양 이름을 짓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내 한국 이름을 종종 헷갈려하며 일부만 불렀고 (대체 사람들은 언제쯤 우리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미들네임이 아니란 걸 학습할 수 있을까?), 발음 자체를 워낙 어려워했기에 나는 자연스레 닉네임처럼 “탠디”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철없는 친구들이 “Tandy, Candy”라고 놀리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전학 갈 때 즈음에는 학을 떼면서 내 이름을 고수하게 되었기에 – 사실 “탠디”는 그저 마음속에만 간직했지만 불리지 않은, 어릴 적 한 자락의 기억과도 같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리운 내 어릴 적 이름을 빌려, 부모님과 함께 겪고 또 여전히 겪고 있는 일상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지 7년이나 되었지만¸ 연구라는 명분 하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지 어연 2년. 그 시간들 속 겪은 60대 부모님과 사는 못난 20대 딸내미의 하루하루이자, 특별히 요상했던 2020년 (특별히 록다운!)과 올해 2021년을 버티며 화풀이 일기처럼 시작되었던 글. 이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원치 않게 역사의 순간을 겪은 사람으로서 대체 나중에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다고 전해줄 수 있을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거창한 이유들을 늘어놓았지만 내 자체가 워낙 생존의 욕구가 강한 원초적 인간이기에, 사실 그저 먹고, 마시고,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금방 화해하기를 반복하는 나날들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