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찐의 영화 감상문 1 “얼굴”

나는 못난이라서 더욱 반성한다

by 투명물고기


나는 문찐이다. 초등학생 딸이 내게 새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문화 찐따. 아들은 나더러 틀니 딱딱거리는 사람처럼 굴지 말라며 “틀딱”이라 부른다. 애들이 유튜브와 인스타에 너무 젖어 살다 보니, 내게는 낯선 말을 자꾸 배워와 가르친다. 변명 대신 인정한다. 나는 문화 소비에 취약한 계층이고, 내 정서는 확실히 핵 꼰대다.


대학 시절에는 교양 수업 과제로 고도를 기다리며나 서푼짜리 오페라 같은 극을 보러 다닌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여자 친구들과—남자친구는 없었다—예술의 전당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20년 넘게 공연장 문턱을 밟지 못했다. 아이 셋을 기르느라 어린이 뮤지컬을 보며 박수 유도하는 일은 많았지만, 그뿐이다. 그래서 나는 문찐 인증. 요즘 젊은 엄마들이 육아와 경제적 여건 때문에 문화생활을 포기한다고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 아이를 키운 내 입장에서는 “요즘은 애 키우기 괜찮네” 하고, 씁쓸하게 꼰대 인증까지 마친다.


그런 내가 어제 본 영화에서, 이상하게도 꼭 글을 남기고 싶어졌다. 추석 연휴 늦은 밤, 무대인사를 다니느라 고생하는 감독과 배우들을 보며, 내 삶만 팍팍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중년의 내 마음을 말랑하게 한 젊은 주연 배우의 사인과 셀카 응대도 차치하고, 나는 이 영화를 곱씹고 싶었다. 영화 해설을 찾아보기보다 내가 1차 비평가가 되어 다시 되짚어 보고 싶었다. 로맨스 영화가 아니면서도, 이렇게까지 다시 떠올리게 되는 작품은 드물다.



문찐이자 꼰대가 되기 전에도, 나는 열등감 덩어리였다. 여전히 그 안에서 사는지, 아니면 해석과 치유를 거쳐 괜찮아졌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내 영혼을 꿰차고 앉아 있던 피해의식을 자각한 사람이다.


못생긴 얼굴과 뚱뚱한 몸으로 살아온 내 삶은 “녹록지 않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얼굴과 체형을 연구하며 혼자 소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만큼 자료를 모으고 논리를 세웠다. 가난한 사람보다, 공부 못하는 학생보다 못생긴 사람이 훨씬 더 고단하다고 믿었다. 나는 대체로 너그러운 사람이지만, 외모에 관한 한 잔인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으니, 마음의 찔림도 없었다.


그래서 영화 얼굴의 도장 장인이 곧 나였다. 그는 보지 못했기에,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에 가장 잔인하고 날카로운 칼을 꽂을 수 있었다. 볼 권리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곱지 않은 것에 극악무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열등감이 괴물이 되는 순간, 최악의 가해자가 평생 스스로를 피해자라 믿으며 눈물짓는다. 꼬인 마음이 펴지지 못한 채 성공을 거머쥐면, 그 빛은 썩는다. 빛을 따라 맹목적으로 걸어가다가 온몸이 흑암에 잠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며 곰팡이에 뒤덮여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번지르르함과 그들의 텅 빈 찬양을 헛되이 붙드는 삶.


아… 내 사고력과 표현력, 학문이 이 모든 것을 다 말해내지 못해 답답하다.



나는 양비론자의 비겁함을 싫어한다. 차라리 욕을 먹어도 한쪽을 드는 무모한 용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옳고 그름 앞에서만큼은, 남은 생애도 양비론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도장 장인의 아들. 눈을 뜰 수 있었지만 끝내 감아버린 그의 선택을 감히 누가 단죄할 수 있을까.


“나라면 다 밝혔을 것”이라 단정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의 유아적 치기를 확인하고 더는 깊이를 나누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눈을 떴다고 믿지만, 태생과 과정 속에서 씌워진 불투명한 렌즈—짙은 선팅창 같은 것—를 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단정할 자격조차 없는 게 아닐까.



그리고, 영희의 얼굴. 지금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질 듯 뜨겁다. 그녀가 그런 욕설을 들어야 할 만큼, 치욕을 짊어져야 할 만큼 흉한 얼굴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허공에 “모든 것엔 아름다움이 있다”는 싸구려 외침을 던지고 싶지 않다. 나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속물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영희는 예쁘지는 않지만 흉하지 않다.


세상의 영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너는 곱다. 너는 내게 그렇다” 하고 말해주고 싶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두 사람을 떠올려 본다. 귀여운 외모와 밝은 성격 덕분에 사랑받으며 다름을 특별함으로 누리는 경우. 또, 비난과 탓에 익숙해지며 점점 쪼그라드는 경우. 결국 남을 밟는 것으로도 달래 지지 않는 병든 마음을 끌고 가야 하는 경우.



흥미와 기사거리를 좇던 여자 PD가 끝내 ‘선’으로 회귀한 인물인지, 아니면 내가 어리숙해서 의심을 거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초저예산으로, 배우들의 헌신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작품에 예술가들이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나는 연기를 모른다. 하지만 박정민 배우의 눈시울이 붉어질 때, 내 눈도 아렸다. 배우로 성공한 그는 이 시나리오에서 무엇을 봤는지 궁금해 미치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해 폭발할 지경이다. 글에서는 내 천박함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생각이 병목처럼 막혀 숨이 막히니까.



예술을 다시 생각한다. 가장 무서운 감정은 열등감이라는 통찰을 붙들며, 이 초안을 마친다. 더 끌어갈 힘은 남지 않았지만, 언젠가 또 꺼내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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