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린 Oct 06. 2022

말라비틀어진 나무

나는 이따금씩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푸른 숲의 주인이 아닌 황폐해져 버려진 땅을 지키는 스산한 분위기에 가담하는 배경처럼. 비틀어진 시각 속에서 바라본 것들을 하나씩 기록하기로 했다.
 
 아픔은 세월을 거쳐 치유가 되고 재생이 되기도 하지만 뿌리에 박힌 상처는 잔해를 남긴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구현되느냐는 개인의 기량이지만 과거를 청산하기엔 기억이 과거를 붙들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흘러간 시간만큼 고통에 무뎌지고 작은 생채기엔 거들떠보지도 않는 순간이 오면 세상이 흑백으로 보인다. 흑백으로 뒤덮인 세상엔 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명백한 외로움뿐인 곳이다. 그곳에선 어떤 고통이 닥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감각을 경험한다. 마치 신이 된 것만 같았다.
 
 무뎌진 것이 무색하게도 내가 자란 시간은 오래 지나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랗게 어린놈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그저 침묵을 유지한다. 그들이 바라본 세상과 내가 걸어온 세상은 명확하게 다를 테니까.
 
 아무도 내 아픔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경험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해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한낱 시끄러운 소문이 되어 물어뜯기 좋은 하나의 안주거리가 되는 것보단 고통에 몸을 맡긴 채 침식당하는 것이 좋다. 불합리적인 방법이지만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젠 감정조차 고통에 침식당했다. 감정에 이름 붙이는 게 어려울 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어 왔다. 감정이 풍부했을 때의 나는 어땠었는지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내 과거의 모습이지만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렇게 기억조차 소실되어 간다.
 
 기억은 과거의 추억을 잡아먹는다. 추억에 기생해 대체로 좋은 기억을 양분 삼아 부정적인 기억들을 부각한다. 시간이 흐르고 추억을 헤집어 볼 때쯤이면 언제 행복했는지 어떤 것을 좋아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만큼이나 세게 다가온다. 행복보다는 불행을 더 정확하게 기억한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는 탓에 사람들은 자신을 합리화하며 기억을 왜곡시킨다.  
 
사람이란 종족이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하나의 우상인 것처럼 떠받들리는 것과는 모순되게 자신이 우선되기 마련이니까. 버려진 땅에 묶인 나무들을 바라볼 틈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재고 있는 꼴이 세상을 더럽히는 것 같았다. 그래, 세상은 순수한 아이가 바라보는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모두에게 더러운 세상이다.

 처음엔 세상이 무채색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곱게 자란 아이의 시각에선 넓고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조금 더 자란 소년의 시각에선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자본주의의 세상을 알고 손익을 조금씩 계산하기 시작할 것이며 어른의 시각에선 추악한 진실에 대해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그저 시각을 달리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우리가 아직 세상을 다 경험하지 못한 탓에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낙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