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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May 17. 2023

여전히 미생

미약하고도 오만한 어떤 미생의 이야기


한때 취미랄까, 종종 하던 기분 좋은 행동이랄까, 암튼 즐기던 시간이 있었다. 밤 열두 시 즈음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사 와서 드라마 미생을 켜 두고 꿀떡꿀떡 마시던, 아주 비밀스런 밤이. 대학 졸업반이던 시절, 곧 다가올 사회생활과 서울 라이프를 꿈꾸며 신입사원 장그래, 또는 한석율, 또는 장백기에 자신을 투영해 가며 열심히 공부 아닌 공부를 했더랬다. 나름의 준비라고 봐도 될지, 한가로운 학생의 사회인 놀이라고 해야 했을지 모를 그 시간들은 켜켜이 쌓여 이후 회사 생활에 톡톡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사회로 나가기 위해 해야 할 준비, 그러니까 여타 자격증이나 어학 점수 같은 건 일절 준비하지 않은 채로 그저 드라마나 돌려봤다는 것은 지금 생각할 때 조금은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과거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대학교 4학년 시절의 나를 마주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주 조금은 센치해지기도 한다. 왜 사회로 나갈 준비를 안 했는지 떠올려버린 것이 잘못은 아닐진대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암튼 그때 미생 틀어 놓고 들이켜는 맥주 그 시원한 맛이 영 좋았다. 그들의 사회생활을 공유하는 느낌이었달까, 인생을 통달하는 것 같았달까, 쓰디쓰다가도 문득 달달해지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잊고 이 맛에 산다고, 회사생활도 그 맛에 하는 거라고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해 버리는 모습은 졸업을 앞둔 나에게 낭만이었다. 그렇지, 인생은 그토록 쓰고도 단 것이지 되뇌었다. 그 달고 씀의 괴리를 느끼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졸업할 때 즈음, 또는 졸업 직후 즈음에는 작가로 등단해 있을 줄 알았다. 꽤나 이름을 알린 신인 젊은 소설가. 북토크도 다닐 줄 알았다. 북토크 때 어떤 말을 할지 혼자 생각해 보며 주접을 떨기도 했고, 나중에 악스트나 릿터 같은 문학잡지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 어떤 질문을 받을지, 나는 어떤 답변을 하면 좋을지 망상에 빠져 보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한때 품었으며, 언젠간 이룰 거라 광적으로 믿고 있는 꿈으로 고착화돼 버렸지만, 어쨌든 그 시절 내 문학들은 센치하기도, 낭만적이기도, 시원하기도 했다.

그런 내 문학에는 글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책도 펼쳐 들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당시 나에게 문학은 ‘삶’과 ‘이야기’ 그 자체였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어 아름답다던 인간의 삶은 어찌나 문학적인지, 구닥다리가 돼 버린 신념이랄까, 사색이랄까 하는 것들이 여전히 호흡하는 세계는 현실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는 누군가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장그래는 실패한 승부사였다. 단 그가 띄우는 승부수는 작품 내내 호조다. 오상식 씨는 이를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이라고 격하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실력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생각의 전환은 결코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이 장면에서 강해준 대리는 장그래더러 “정답은 모르지만 해답을 아는 친구가 있다, 장그래 씨가 그렇다”라고 평한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다. 정답이 아닌 해답. 영감을 많이 받았는지, 글을 쓸 때도 읽는 이가 정답보다는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쓰려 애썼다. 그의 기보와 대국이 회사에서 해답이 되듯 내 문학과 글이 일상에서 해답이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나는 해답 집착러다.

완생으로 나아가지만 완생에 다다를 수 없는 존재, 한없이 미약하면서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존재, 지극히 불완전하기에 가엾기도 하면서 그렇기에 아름다운 삶. 우리는 어쩌면 영영 못미칠 곳에 염원을 두며 끝없이 노를 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가여운 노 저음 속에 해답이 있을까, 그것을 긍휼히 여기시는 창조주께 해답이 있을까.

이제부터 나는 선지자다. 창조주에 해답을 두고 나를 비롯한 모두가 오롯이 그 답을 찾아 가기에 부단히 힘쓰는, 그런 부류. 언젠가 후회가 밀려올지, 신의 은총이라 고백할지 모를 조금 힘든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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