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교수님, 목사님들이 차분하고 선하게 글을 써주셨던데, 경험이 일천하고 재주가 모자란 나로선 거칠디 거친 이 모양으로밖에는 안 나오는 거다. 모르겠다- 라는 말로 일축하고 속리산쯤 가서 칩거하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하나님 주신 사명은 또 또렷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거칠고 소심한 글이나 던져본다.
나는, 이거 완전, 반대다.
10월 27일 오후 2시, 광화문광장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 반대 연합집회가 진행된다. 이번 집회는 200만 성도 집결과 200억 헌금을 홍보하며 압도적인 숫자와 돈의 힘을 앞세우고 있다.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 동성애에 대한 죄 시인 등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 이와 같은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짚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먼저 대규모로 모여 교세를 과시하는 듯한 이 집회는 과연 성경적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굳이 ‘200만 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장 100만, 온라인 100만으로 집계된 200만이라는 숫자는 교계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을 때 이 정도 규모로 모일 수 있다는 숫자로써 하는 세력 과시가 아닌지, 민주 사회 속에서 숫자, 즉 여론으로써 그 뜻을 관철하려 하는, 지극히 이 땅의 방법이 아닌지 하는 것이다.
왜 200만이 모여야 하는가? 왜 많은 숫자가 모여야 하는가? 왜 대규모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많이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해야 일하시는 분이신가? 작은 시골에서 몇 사람이 기도하면 일하지 않으시는 분인가?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이유가 교회가 쇠퇴하여 그 사회에서 비주류로 밀려나 도무지 힘쓸 수 없었기 때문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주류에 있을 때 일하시는 분인가?
또한 광화문광장이라는 장소가 갖는 상징성이다. 광화문광장은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 그 쟁점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정부와 소통하기 위해 민중이 모이는 공간이다. 즉 현재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상징성이 가장 강한 곳이 광화문광장이라는 것이다. 한데 그토록 정치적인 장소에 구태여 100만이라는 사람이 모여 집회를 연다는 것을 두고 어느 누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이 통과되었을 때 나타날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다만, 동성애가, 그러한 잘못된 것이 교회를 무너뜨리는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그러한 죄들이 교회를 무너뜨리는가? 교회에 들어와 잘못된 사상을 전염시키고 영혼을 죽이는가? 오히려 사랑과 복음으로써 천하만민을 품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했어야 할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가 더욱 만연해지며,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교회의 무너짐은 이미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지식에 기인했던 기복주의와 고지론 등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교회의 교회 됨을 해쳤던 것은 결코, 외부 요인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포괄적차별금지법으로 인한 사회적 여파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무너진 교회로 인하여 그것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만연해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와 같은 집회는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모든 소수자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다. 힘대힘, 강대강으로 그 법안을 두고 싸우자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어디에서 압도적인 힘과 세력으로 일하셨는가. 힘으로 세상 죄악을 쓸어버리는 것, 그것이 정답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던 새벽,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가 내려왔어야 했다. 로마를 전복시키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웠어야 했다. 오직 힘으로 이방 민족들을 밀어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를 세웠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곳에 거주하던 이방 민족들을 진멸한 후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성경은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성경 역시 가나안 입성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목적은 전 인류 구원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죄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류가 짊어진 죄의 사슬을 끊고 용서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경은 이어졌고, 예수님은 이 땅의 힘 앞에 구태여 약해지셨다.
아울러 싸움은 본질을 잃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싸움 초기에는 명분이 분명하고 그럴싸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공동체의 입장, 주장 등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의 이유, 본질은 흐려지고 싸움 대상에 대한 혐오만 남게 된다. 이러한 형국에서 그런 흐름을 탔을 때, 더 이상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요원해진다. 구원의 문을 닫는 것이다. 퀴어축제 당시 구간마다 맞서 시위하며 싸우던 기독교 집단을 기억한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럴 것이다. 과연 그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온오프라인으로 200만 명씩이나 한자리에 모여서 정죄하고 싸움을 걸어오는 곳에, 사랑이 있고 복음이 있다고 생각할까?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구태여 동성애에 대해서만 이토록 공격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이유, 바로 그 영역에 대한 깨끗함과 자기 확신 아닌가? 자신은 동성애라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우리 스스로 동성애에 취약한 존재라고 인식한다면 과연 이와 같이 공격적인 방식으로 그들과 싸울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금의 세태는 오만에 가깝다. 분명 기억해야 하는 건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 십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이와 같은 정치적 시위성이 짙게 나타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밖에는 안 된다. 동성애를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동성애는 분명한 죄다. 죄를 죄로 보는 것, 그것을 죄로 말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존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성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연약한 죄인으로서 오늘날 이와 같은 형국이 왜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먼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복음적 태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십수 년 전부터 동성애에 관한 법률들이 물밑에서 은밀하게 수정되고, 더 이상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못할 방향으로 흘러왔다. 언론에서는 동성애로 인한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교육 역시 그와 궤를 같이했다. 왜일까. 다른 영역의 죄가 아닌, 굳이 동성애만 왜 이런 흐름으로 시대를 잠식해가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류의 죄가 씻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마땅히 아름답고 존귀한 자녀로 거듭났다. 그 이름을 믿고 시인하는 자는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게만큼은 그 은혜가 적용되지 않았다. 교회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들은 정죄당하지 않았던 적 없었다. 시대를 거듭하며 공인된 교회로부터 핍박받았으며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했다. 다른 죄는 몰라도, 동성애라는 죄를 달고서는 결코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이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존재적으로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만난 시류가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인본주의였다. 상대성을 강조하고 절대적 가치를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동성애는 차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탄압받던 인권은 인본주의에 근거해 보호받아 마땅한 존엄한 것이 되었고, 어떠한 가치가 반드시 옳다는 절대성을 부정하는 시대 속에서 더 이상 동성애를 틀렸다, 죄악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흐름이 나타났다.
결국 지금 이 형국에 치달은 것은 그들을 품어본 적도, 사랑해본 적도, 제대로 복음을 전해본 적도 없는 교회의 잘못에 기인한다. 2,000년 전 교회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따뜻하게 맞아줄 수 있는 교회는 많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흐름은 서양권에서는 이미 진행되었고, 동성애 합법화라는 결론으로 종결되었다. 현재 유럽과 북미지역 등지에서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동성애로써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가 합법적으로 인정된다. 성 정체성과 평등 등의 측면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랄한 일들이 벌어지며 심지어 오직 소수자를 위한 역차별까지 나타나고 있다.
과연, 유럽에서, 미국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되고 입법될 때, 그곳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통곡했던 사람이 없었을까? 기독교 율법에 기초하는 헌법으로서 세워진 미국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흐름이 없었을까? 심지어 민주화가 가장 잘 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위도 분명 더욱 체계적으로 가능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응 또한 민주적이었을 미국에서?
그럼에도 막지 못한 것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이다. 때문에 이는 지난날 교회가 그들을 품고 사랑하지 못했던, 복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던 죄악에 기인한 시대 흐름이다. 막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범죄하여 멸망했던, 그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처럼, 이것은 막지 못할 시류다. 곧 벌어질 대규모 연합집회와 같은 방식은 죄악의 반발심만을 키울 뿐이며 교회 역사 내내 그래왔던 것처럼 악의 확대 재생산으로 돌아올 게 뻔하다. 악의 확대 재생산. 오늘날 포괄적차별금지법과 같은 법안이 나타나고 이것이 통과되는 것 또한 교회의 정죄 아래 이루어진 악의 확대 재생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다가올 시대에 대해 두려워하며 그것을 막기 위해 힘과 숫자로써 맞설 게 아니라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역사 속 교회 모습을 회개해야 한다. 그간 그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올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정죄만 해 왓던 교회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담대함을 갖추고, 그 시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 세상을 향해 어떻게 사랑을 드러낼 것인지 그 지혜를 구해야 한다. 죄가 만연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써 복음을 전해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가진 사명이자 우리 삶의 목적일 테니 말이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몰고 올 여파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 심각성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 자녀들이,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순간 역시 잦다. 나 역시 곧 태어날 한 아이의 아빠니까.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더 오직 복음으로써 깨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고 지킨다는 명분 속에서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철저히 유럽 교회의 이익에 기반한 전쟁이었으며, 로마의 기독교 공인 아래 천 년 가까이 몸집을 키운 교회의 교세를 과시하던 참상이었다. 그러나 1차 원정을 제외한 모든 원정이 실패했고 본격적인 교회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무엇이 교회의 본질인가? 이 땅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악의 창궐에 맞서는 게 교회가 할 일인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에 드러내고 그로써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로 이끌어갈 소명이 아니었나? 그 말씀 속에, 악은 반드시 저지하고 때에 따라서는 힘을 과시하고 정죄를 해서라도 막으라는 명령이 있는가?
“사자의 승리는 어린양의 방식으로.” 예수님은 동성애자를 사랑하신다. 오직 약해지심으로 죄악을 이기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사랑의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죽어가던 영혼들에게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정죄와 맞선 대규모 시위가 아닌, 온갖 질타와 수군거림 속에서 그들에게 담담히 따뜻한 손을 건네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다.
이것은 플랜비, 대안이 아니다. 복음이다. 복음의 모양이고, 복음의 흐름이고, 복음의 방식이다. 사도행전 초대교회가 세워지던 과정 역시 약함 속에서 흥왕하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강함으로 나타나신다. 과연, 이토록 힘을 과시하고 맞서는 방식이 맞나? 정죄로써 전하는 게 복음인가? 복음은, 결코 인간의 인위적인 힘과 숫자 속에서 퍼져나가지 않았음을, 오롯이 약할 때 강력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와 사랑으로써 전파되고 열매가 맺혔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