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리뷰
가벼울수록 완벽하다
가벼울수록 완벽한. <헤어질 결심>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요.” <러브레터> 속 말갛게 새하얀 설원에서 울린 히로코의 이츠키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떠올린다. 절절하게 건네는 인사가 실은 마침내 그 사랑을 가슴 한편 저 멀리 떠나보내겠다는 결심이었다는 걸 기억한다. 이츠키가 도서 대출 카드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했던 순간을 생각한다. 그제야 이츠키는 뒤늦게나마 동명이인이었던 자신을 향한 이츠키의 사랑을 깨닫는다. 하지만 엇갈린 순애(純愛)는 끝을 맺지 못했다. 사랑의 끝과 시작을 전달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의 종말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인물들이 관습이나 환경에 지배당하여 희생돼 사랑이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러한 애매함이 비통한 희열을 만들어서 관객에게 멜로를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줬다. 그 때문에 멜로드라마에서 완결한 사랑을 찾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헤어질 결심>은 뜻밖이었다. 미결이 그 자체로 영원이 될 수 있다는, 미완된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감정이라는 결론을 보여줬다. 역설적인 모호성에서 나타난 너무나도 자명한 창조였다. 창조적인 종말이다. 그때부터 <헤어질 결심>의 붕괴가 일어났고, 무너지고 깨져 철저히 해체되었다. 영화를 하나하나씩 곱씹어 음미할 수 있는 시작이 열린 셈이다. 끝에서 열린 시작에 새로운 발을 내디뎠다. 마침내.
<헤어질 결심>은 질곡동 사건 수사의 부진으로 골머리를 앓던 형사 ‘장해준’이 구소산 정상에서 추락사한 ‘기도수’ 사망 사건으로 그의 아내인 ‘송서래’를 만나며 펼쳐진다. 서래는 남편이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했다는 이상한 말을 하며 오히려 담담한 태도로 수사에 일관해, 해준을 비롯한 형사들의 의심을 사 용의 선상에 오른다. 해준은 그런 서래의 조사를 담당하면서 그녀의 답변과 행동을 통해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호의를 가진다. 이후 해준이 잠복수사를 자청, 서래의 일상생활을 관찰하면서 동정과 사랑을 키워가고 서래 역시 해준의 섬세하고 반듯한 모습에 호감을 느끼며 서로 잦은 만남을 갖는다. 동시에 예상치 못한 진실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형사가 등장하여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범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흐름을 보면 <헤어질 결심>이 필름 누아르의 구조를 답습하여 스릴러의 탄력적인 긴장감을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때 해준과 서래의 이어질 수 없는 고달픈 사랑을 보여주며 분위기를 팽배하게 이끈다. 작품이 내외적으로 관객의 몰입을 주도면밀하게 이끄는 것이다. 그것의 중심에는 사랑의 주체인 ‘송서래’가 있다.
그는 따지자면, ‘팜므파탈’ 로서 해준을 파멸로 이끄는 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서래는 해준의 불면증을 해결하여 그가 오랜만에 단잠에 들 수 있게 했고 정안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가슴 뛰는 청초함을 선사했다. 진실이 밝혀지고, 사건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또다시 용의자로서 해준 앞에 나타난다. “당신은 살인도 있고 폭력도 있어야 행복하잖아.” 해준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직업의식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엉킨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자와 만남을 지속하려면 용의자로 태어나 그의 선상에 존재해야 한다. 서래는 해준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삶의 안정을 반납한 채 죽을 수밖에 없는 곳으로 돌아와 비슷한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그리고 사건의 실마리를 내던진 그곳에서 모래를 퍼내며 스스로 바닷물에 침전된다. 산에서 기도수를 살해했으므로 지혜롭게 바다로 가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서래는 이 사랑이 영원할 수 있도록 제 것을 붕괴시켜 궁극적인 에로스를 향해 달려갔다. 생명의 바다를 필연적인 죽음으로 변화시키면서까지 가질 수 없는 호미산처럼 올곧은 타자를 쟁취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모습을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의 발현이 여성에게 일어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언제나 ‘작품을 파멸과 공멸의 서사로 이끄느냐’의 주도성은 사건과 갈등을 파헤치는 남성에게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여성들은 영화 속에서 폭력에 희생되고, 신체에 엿보기 심리가 작용해 야릇한 관음의 대상이자 욕망의 객체에 불과했다. 작품을 꿰뚫는 사건 속에서 남성이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얽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래라는 여성은 직접 긴요한 사건을 만들어내 해준이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들었고, 그들의 사랑이 미결로써 영원하도록 에로스의 궤적을 완성한다. 스릴러의 구조가 전부임을 시사하다가 애절한 사랑의 전진 속에 화두를 던진 <헤어질 결심>의 총체와 닮아있는 것이다. 부산과 이포, 구소산과 호미산, 질곡동과 기도수 사망 사건 등 이질적이면서도 닮아있는, 기준과 그것의 거울상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연결해 반사와 재연에 숨어 그 속을 꿰뚫는 울림을 전달한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의 총체. 두 바다는 해준과 서래의 장소 선호에 대한 공통점으로 둘이 동족이라는 걸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서래의 손으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침전된 비밀과 죽음의 메타포로 만들어 의미가 변질됐고, 구소산과 호미산은 각각 서래가 본인과 기도수의 악습을 끊어내고자 결심하는 소유의 절단을 형상화함과 동시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해준에게 마음을 전달하여 진정 소유하고픈 건 당신임을 나타내는 욕망의 땅이었다. “가인이한테 ‘나 너 때문에 고생 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 주세요.” 드러내지 못했던 심장을 언어로 뱉어내 가감 없이 표현했던 산오는, 종말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질곡동 사건에서 진정한 사랑의 화신이 될 수 있었다.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그들 사랑의 거울상이었던 질곡동 사건을 보며, 서래는 그 닮음비의 만조와 간조 사이를 이용하여 자신이 잠기고 상대가 영원히 자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계산해냈다. 짙은 안개와 팽배한 파도, 바닥과 꼭대기를 오가는 죽은 자의 시선. 화학적인 성질 차이부터 물리적인 고저의 아찔함을 살리는, 끝없이 현란한 이질적인 대조의 중심에는 서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준은 초장부터 반해버린 서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도 못한 채 긍지 높은 직업윤리와 갈등하다 끝내는 세찬 파도에 휩쓸린다. 우산으로 빼간 친절한 형사의 심장은 서래로부터 바다에 침전되어 까마귀 깃털로 적힌 상이한 이해로 남았다. 문자의 이해에 있어 심장이 맞느냐는 서스펜스는, 그것이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서래의 대답에 묵살되어 자칫 넘어갈 수도 있었던 장르의 주도성이 완벽하게 역전된다. 또한 끝에서 열려 이루어질 수 없었던 다른 멜로 영화들에서 나타난 사랑이, 서래가 영화의 2부가 시작하기도 전에 새로이 열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로맨스로써 완성할 수 있는 치밀한 설계가 가능했다. 설계부터 완성까지, 내외적인 메타포의 겉껍질부터 진의까지. 죽은 것들의 눈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래를 조명한다. 이 담대하고 당당한 활보를 보여주는 이가 어떻게 영화의 주체가 아니겠는가? 순수하지만 섬뜩한 의도와 결론을 이용해 서래가 영화의 의미를 만든다. <헤어질 결심>은 무엇하나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게 없다. 앞서 말한 메타포들은 짙고 뿌연 안갯속에서 멀어지고 간드러진 정훈희의 ‘안개’에 휘둘려 시·청각적으로 방해를 받아 관객에게 전달되기가 어렵다. 그저 두 남녀의 필연적으로 스러질 수밖에 없는 사랑을 보여줄 뿐이다. 서래의 행적들만이 붕괴하며 그 운율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육각형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어서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서래와 인어공주는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찢어 죽음으로 만들었다는 선택이 닮았으나 그 행위의 진전이 다르다. 인어공주가 타자인 정령으로부터 불멸의 영혼이라는 구원을 받았다면, 서래는 스스로 구원의 양동이를 이용해 영원이 되고자 했다. 이 발전의 흐름 역시 영화가 고전을 계승하면서도 낙후된 것을 미루어 생생한 새로움을 창조해내겠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생각이 있다는 걸 나타내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창의와 창조의 아슬한 줄타기에서 전면에 내세운 광대로 서래를 선택한 점이 탁월하다. 거추장스럽고 번지르르한 상징을 연거푸 늘어놓지 않아도 그녀가 이 영화를 여성주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해석과 주체의 전환은 고전을 다시금 생산해 청자가 오롯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 고전은 현재와 시대적인 상황이 판이했을 때 만들어졌으므로 현대에 적용하면 은근히 불편해질 수 있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이 보여준 선택적인 취사가 고전을 즐기기에 있어 덜어냄의 미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
덜어낼 결심이 만든 독창적인 가벼움이 또 어떻게 작용하는가? “사실 원전은 완전 안전하거든요.” 그의 영화에서 언어유희는 빼놓을 수 없는 장치와도 같다. 불편한 사자대면이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이런 말들은 우스꽝스럽게 굴러가, 극단적으로 과장된 폭소와 민망하기 그지없는 언어들로 쌓여 과도하게 수축한 긴장을 부드럽게 이완시켜준다. 스릴러와 서스펜스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긴장의 이완과 수축은 필연적이다. 어딘가 모자라지만 열정적인 형사 ‘여연수’를 2부 내내 등장시킨 것도 같은 이유일 테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는 섬뜩하면서도 꽤 우스운 행위와 말투로 경주여자교도소 주변 사람들을 도와준다. <아가씨>의 숙희는 말투부터가 정감이 느껴지고, 히데코의 진실이 드러나자 바로 처음부터 나쁜 년이었다고 단정 짓는 독백이 웃음을 자아냈다. 이렇듯 냉정하고 우스운 감정들을 널뛰듯 제시하며 강렬한 폭력과 금기의 넘나듦,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 속에 하고픈 진담을 섞어내는 게 박찬욱 감독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헤어질 결심>에서는 결과론적인 진담으로의 이행을 멈추고 두 사람의 사랑을 은근하게 그려내는 것에서 그쳤고, 강렬한 폭력과 금기 역시 과도함 없이 깔끔하게 표현한다.
특히 숏(Shot) 하나하나 위엄이 느껴질 정도로 품격 있게 잡아내는 예술적인 미장센이 가장 섬세하게 드러났기에, 고전 예술 작품을 즐기는 듯한 품위와 우아함이 느껴졌다. 더불어 현대적인 웨어러블 기기를 서사 속에 적극적으로 녹여낸 점이 인상 깊다. 메시지가 전달되는 딜레이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연출은 해준의 애타는 심정에 투영할 수 있도록 했고, 서래가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중국어를 번역기로 해석하여 전하는 장면들은 번역을 진행하는 시간 동안에 관객에게 자연스러운 궁금증을 가져다줬다. 서래가 기도수를 살해했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도 스마트폰에 존재하는 기록을 이용한 점은 참신한 도구를 사용해 현대의 사회상을 잘 녹여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사용할 수 없었던 기기들의 참신한 활용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일종의 친숙함을 유발하여 어려울 수 있는 복잡한 사랑의 내면에 한층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나아가 해준이 서래를 잠복수사하는 일종의 관음적인 행위로 볼 수 있는 장면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불쾌함을 최대한 배제해 청자의 공감각을 극대화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세운다. 그 후 자신을 지켜주는 듯했다는 서래의 보충 의견으로, 여성의 신체를 성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철저히 해체하였던 과거 영화에서의 관음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켰다. 비 오는 날 산속의 외딴 사찰에서 한 층씩 북소리를 쌓아갔듯이 점진적이고 소극적인 해준의 사랑은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가 모호하다. 이에 해준이 서래를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음에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그녀의 숨결과 향기를 느꼈던 이 장면은 그가 서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사랑을 언급하지 않으며, 붕괴라는 표현과 위험한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럴수록 동적이고 가변적인 사랑의 모양이 어슴푸레해서, 그만큼 복잡하고 애매한 게 사랑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걸 정면에 반박하여, 미결로써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고 창조한 순간은 멜로가 할 수 없었던 로맨스적인 해피엔딩에 부합하는 완벽한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다던’ 그 얄궂은 사람의 마음의 엇갈림을 이용하여 만든 매끈한 결말을 보니 붕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마침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