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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Jul 06. 202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모든 걸 가능하게 할 수 없는 모든 곳에서의 그 모든 "가능성"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적 재현의 한계를 뛰어넘다?’

 세상은 복잡다단하다. 여러 군상이 상호 작용하며 다양한 감정과 사건을 만들어 낸다. 사회적인 사건과 현상,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감정을 교류하며 벌어지는 놀라운 일들은 유한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한 겹씩 쌓인다. 그 추억이 새로운 기억으로 뒤덮이게 되면 그 이전의 내용은 완벽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해진다.

 우리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둘러싸인 기억의 층위 하나를 도려내어 단면으로 재생하는 법을 만들었다. 영화가 그렇다. 슬프다가도 기쁘고 기쁘다가도 슬픈 감정의 연속인 우리 삶을 기쁘거나 슬펐던 순간으로 잘라낸 뒤 이야기의 힘으로 재생하는 것. 그 파노라마를 보게 되면 이야기 속에 물들게 되어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몰입과 공감으로 온 마음을 다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멈추고 다시 세상으로 넘어오게 되면, 망각의 작용을 이기지 못하여 이야기가 담고 있던 결말의 울림을 현실로 전하지 못하게 된다.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이야기가 재생될 때 변화하지 않았고, 영화가 말하는 이분법적인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으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을 구성하는 공간은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허구적 세계와 현실이 그대로 이동한 경험적 세계로 나뉜다. 대개 전자는 극영화, 후자는 다큐멘터리로 본다. 극영화는 모방이라는 특수성 아래 시공간을 조작하여 편집으로 재단해 공들인 이야기로 현실을 재현한다. 반면에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사건과 현상을 재연에 가깝게 ‘전시’하여 현실 공간 자체를 이동시킨 것과 같게 만든다. 두 이야기는 각각 그동안 자세히 알 수 없었던 세상의 진실을 고백하거나 폭로한다. 이러한 두 가지 ‘말함’-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유효기간이 있다. 영화적 재현과 전시가 실재를 반영한다 해도 관객이 다가가거나 넘어설 수 없는 어떠한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브리씽>)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영화는 부질없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거의 그대로 본떠 만든 모방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원형인 현실이 잠시 멈춰야만 재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의 장엄한 서사가 시작하고 끝을 맺어 특정한 결론에 도달해도 그동안 우리 삶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그 때문에 극장 좌석처럼 일정한 곳에서 구속된 채 영화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흐름을 시청하여 감동한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사회적 행동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영화가 말하고 있는 거대 담론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움직임은 실습 없이는 불가능한 복잡하고 정교한 것들이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처럼 수많은 실패와 이어진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다. 관객은 멈춰있던 현실이 재생되면 곁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영화를 떠나보낸 채, 망각에 의해 차츰 사라지는 극적 행동을 혼자 힘으로 다시 ‘재현’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이러한 위험을 넘어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극영화가 보여준 영화적 재현의 한계는 관객이 영화를 넘어서서 홀로 이상을 실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사뭇 다른 한계를 갖는다. 다큐멘터리가 전달하는 감정은 극영화보다 사실적이고 불편하다.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관객은 ‘진짜 눈물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한 사실성을 이겨내고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건 극영화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에브리씽>은 정신없는 연출을 통한 강한 원심력 속에서 구심력을 잃지 않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었다. 필연적 거리감을 깨부순 것이다.

다가오는 영화

 극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은 철저하게 ‘외부인’이다. 그 세계는 현실을 모방한 허구라는 보편적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외부인의 역할에서 허구적 세계의 이야기에 동조하면,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내부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내부인’으로서 내부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둔 채 다시 현실이라는 외부 공간으로 빠져나오게 되면 혼란이 가중된 채 망각을 맞이한다. 이때 영화의 메시지를 현실에 전달하고자 하는 필사적 움직임은 더욱 어려워진다. 관객을 이야기 안쪽으로 이끌었던 영화는 현실이 다시 움직임과 동시에 정지하여, 현실에는 메시지를 쥔 관객 혼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허구와 현실, 영화와 관객과의 거리감은 필연적인데, <에브리씽>이 깨부순 게 바로 이러한 필연적 거리감이다. <에브리씽>의 이야기는 이탈 이후까지 그 힘이 잔존한다는 것이다.

 극영화의 이야기가 기억을 한층 벗겨내어 단면으로 재생한다는 간단한 작업에서 출발할지라도, 그 끝의 메시지는 대국적인 결론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가령 현실의 사회 문제를 제기한다든지, 다양한 세대에 축적된 고질적 악습을 꼬집는 것이다. 홀로 남은 관객이 이러한 문제를 현실에서 영화처럼 해결할 수는 없다. 한편 <에브리씽>의 목표는 매우 소박하다. 그저 내 옆 사람, 동반자에게 다정하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친다. 조부 투파키라는 사악한 악당이 전 우주를 박살 내려는 이유도 그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줄 이 세계의 에블린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메타버스에서 시작한 전 우주의 생사가 관련된 거대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가족 영화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에블린과 조이가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한 뒤 껴안는 장면은 행성이 충돌할 만큼의 강력한 파급력을 지닌 것처럼 묘사된다. 이때부터 <에브리씽>은 서슴없이 필연적 거리감을 좁혀 다가온다. 그동안 다수의 극영화가 놓치고 있었던 극적 목표의 크기와 전달의 괴리를 해결한 것이다. 

 현실을 저며낸 영화가 그 현실보다 더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의 목표와 결론으로 다루는 건,  이야기가 허구적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과 동시에 지나친 이상향을 다룬다는 뚜렷한 한계를 드러낸다. 영화의 힘이 멈춘 채로 현실로 넘어온 관객이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 같은 영화를 본 불특정 다수가 뭉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영화가 보여준 극적인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다. 법 근간을 전복시켜야 하거나 하나의 거대한 제도 자체를 제고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적 연출’이 없는 세계에서 영화를 재현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즉 거대한 담론을 야기하는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변화를 논하는 건 이론에 불과한 이상향이 된다.

 반면에 <에브리씽>은 현실 세계 속 거대 담론 문제에 대한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 영화가 원한 건 그 세계의 미시적인 ‘관객의 세계’였다. 조이의 말처럼 영화가 부질없는 것이라고 해도 <에브리씽>을 직접 목격한 관객, 그 관객과 가장 가까운 동반자의 세계는 변화시킬 수 있을 테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를 회복시킨 것도 단 하나의 작은 몸짓과 말 한마디에서 시작했다. 이처럼 영화에서 현실로 빠져나간 관객은 아직 영화의 힘이 담긴 메시지를 쥔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내적 환경은 바꿀 수 있다. 그 마음이 함께한다는 건 영화가 끝나고 현실의 시간이 재생됐음에도, <에브리씽>의 재생 원리가 관객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허구적 세계를 넘어서 관객에게 영화의 동행이 다가온 것이다. 이 동행은 관객과 나머지 단 한 사람 혹은 관계까지만 변화하기를 바란다. 멀티버스를 활용한 복잡한 SF 어드벤쳐물에서 에블린 가족의 관계성을 논하는 서사로 자연스레 교체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에브리씽>에서, 우리는 모두 혼자선 쓸모없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현실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처럼 영화 없이는 영화 같은 현실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웃음과 연출 그리고 오마주의 힘

  <에브리씽>을 보다 보면 자꾸만 ‘장르 영화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는 영화가 현실의 모방품이라는 한계를 연상케 한다. 이 세상은 연속적이기 때문에 한 단면만을 가지고 이분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여 현실에도 적용시키는 건 어렵다. 나아가 ‘메시지의 전달’ 자체도 어려울 수가 있다. 영화를 현실에 재현한다는 것은 전달자(관객)가 원형의 목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영화가 달성해야 할 1차 목표는 이야기에 담긴 힘을 관객에게 온전하게 흡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장르 영화란 관객에게 전달하는 정서가 하나인, 장르적 관습을 그대로 이행하는 영화를 일컫는다. 가령 <7번 방의 선물>은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로 인한 애절한 감동만을 전달한다. <에브리씽>이 장르 영화와 다르다는 것은 작가주의 영화처럼 슬픔과 기쁨, 공포와 웃음 등 다각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개성이 강한 영화임을 말한다. 장르 영화는 단일한 정서를 전달하기 때문에 메시지 전달은 쉽지만, 그 이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영화(이야기)만의 힘이 훨씬 부족하다. 작가주의 영화는 다양한 정서를 전달하므로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관객의 노력이 수반되지만, 정교한 이야기의 힘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문제 제기의 여운이 강력하다. 그렇지만 역시 유효기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에브리씽>은 웃음과 이탈을 통해 다른 영화들과 정말 ‘다른’ 지점을 만들어내어 두 분류의 단점을 보완했다.

 <에브리씽>이 온전한 작가주의 영화라고 하기는 힘들다. 장르 영화적 색채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인데, SF 장르로 보기 쉬운 소재를 연이어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웃음을 자아내는 연출이 숨어있다. 바흐친은 공식적 축제와 구별되는 카니발만의 특성을 정립한 바 있다. 요컨대 카니발은 질서와 형식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공식 축제와 다르게, 자유의 법칙 내에서 경계 없이 만인이 만인을 향해 웃고 떠드는 독특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카니발에서 인간은 엄격한 경계가 풀어져 지켜야 할 형식이 붕괴한 채 서로가 자유롭게 맞닿고 풀어지며 즐거움을 추구한다. 여기서 웃음이 지닌 격하의 원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웃음은 육체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기에 중세에는 악마적 본성으로 치부되어 억압받았지만, 문예 부흥을 통한 인간 신체를 향한 미학적 탐구가 이루어지면서 폭소가 지닌 해방과 자유의 힘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웃음은 쓸데없이 엄숙한 것들을 벗겨내어 그 속에 담긴 다양한 정서를 끄집어내어 촉발한다. 이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축적된 기억을 벗겨내는 예술 문화의 방향성과도 상통한다.

 인간은 타자를 갈구하여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 타인과의 관계는 날 선 공격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관계성은 비로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교류에서 시작한다. 그러려면 그의 내면을 탐구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의 내면 또한 보여주리라는 약속이 필요하다. 조이는 에블린과의 포옹 이후 어색하다며 웃었다. 립밤을 먹고 뾰족한 무언가를 엉덩이에 꽂는, 황당하기 그지없고 통계적으로 개연성 없는 행동인 ‘버스 점프’ 설정은 어색하고 웃음이 나온다. 이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성을 만들어 가겠다는 <에브리씽>의 포부임과 동시에 영화가 가진 쓸데없는 권위를 내려놓겠다는 격하의 원리이다. 영화라고 마냥 엄숙하고 권위 있는 예술적 이야기만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닌데, 작가주의 영화는 대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에브리씽>은 단일한 장르로 해석할 수가 없이 복잡한 작가주의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그 편견을 벗겨내기 위해 웃음이 지닌 해방과 자유를 마음껏 이용한다. 그러면서 영화가 의도한 메시지인 다정함의 연대라는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폭소로 해방을 즐긴 관객은 감동적인 가족 영화적인 모습에 영락없이 당하고 만다. 히어로처럼 그려지는 에블린을 보며 어드벤쳐의 오락적인 재미를 즐기다가도 기쁘고 슬픈 감동을 여과 없이 느끼는 것이다. <에브리씽>은 영화가 달성해야 할 일차적 목표를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것과 함께 질주하는 <에브리씽>의 힘은 연출을 통한 ‘장르 이동’의 효과와 오마주가 만든 영화와 관객, 관객과 관객 사이의 연결이다.

 <에브리씽>은 SF 장르와 에블린 가족의 서사를 담아낸 가족 영화 그리고 조부 투파키에 맞서는 에블린을 통해 슈퍼 히어로물까지 넘나들고 있다. 중심 소재로 채택한 멀티버스처럼 장르 역시 매우 다양하게 서슴없이 이동하는 것인데, 그럴수록 관객은 진정한 ‘광기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연출로 체험하게 된다. 영화의 연출은 관객에게 큰 충격을 줄수록 관객이 무의식-상기하자면 해방된 채 내면이 드러난 상태-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대개 공포영화가 그렇다. 이처럼 <에브리씽>은 빠른 컷 편집, 시끄러운 음악,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서사 등 무시무시할 정도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맥시멀리즘’을 선사한다. 하여 관객은 무의식 속에서 모든 걸 경험하기 시작한 최악의 에블린처럼 다중 우주 속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겪는다. 이후 관객은 최악의 에블린처럼 모든 게 절망적인 허무주의와 그런데도 희망을 말하는 온정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이때 가장 외적인 장르가 SF에서 가족드라마로 바뀌며, 웨이먼드를 통해 다정함을 깨우친 에블린, 에블린을 통해 또 다른 온정을 느낀 조이를 보여준다. 관객은 내부인이 되어 이야기의 감동을 온전히 느끼고, 모든 곳에서 모든 걸 경험할지라도 다정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해야겠다는 소박하고 미시적인 메시지를 흡수하게 된다. 이처럼 화려한 연출의 뒤편에 숨은 자연스러운 장르 이동은, 거시적 담론의 얘기에서 시작하여 개인 차원으로 귀결되는 양상에 개연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작은 세계부터 변화하는 미시적 회복탄력성을 역설한다.

 이는 영화가 선사한 오마주의 연대까지 이어진다. <에브리씽>에는 다양한 오마주가 등장한다.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않고 스타가 된 에블린의 삶은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하고, 손가락이 소세지가 된 세상의 시작은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마주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오마주 장면은 영화사에 방점과도 같은 추억으로 남은 것들이기 때문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들을 반가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부분은 삶을 단면으로 잘라내어 엮어 만든 재현의 예술 속에서 또다시 단면으로 잘라내 ‘재연’의 힘을 재생시킨 것과 같다. 재현이 상황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라면 재연은 상황 자체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재연의 반복성은 주체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나 객체에 다가가려는 접근이 존재하지 않아, 바라보는 객체자가 오히려 진실한 ‘주체’로서 재연에 다가설 수 있게 만든다. 

 <에브리씽>이 세상에 등장할 수 있게 한 좋은 선례인 영화들을 반복한 것은 존경의 표현이자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자 하는 이해심이었다.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답답할 정도로 모자란 딸이고, 딸인 조이에게는 도저히 얘기가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어머니였다. 그녀는 제3의 눈을 개안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싸우며, 과거에 중요했던, 알지 못했던 진실을 현재와 연결한다.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서운함이 있었지만, 공공은 몰랐다. 조이와 에블린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에블린의 사랑을 깨닫자 조이는 ‘에브리씽 베이글’에서 홀로 빠져나왔고, 에블린은 아버지와 베키를 연결하는 중심이 되었다. 관객은 이와 같은 연대와 오마주 장면에서 추억을 향수하고, 에블린 가족의 감동에 스스럼없이 다가가며 가까운 이와 연결되고 또 연결되리라는 다짐을 갖게 된다.

 삶 같은 영화가 보여준 연출은 역설적으로 영화 같은 삶에서 이루어 낼 수 없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에브리씽>은 교묘한 장르 이동을 통해 영화의 연출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멀티버스를 포함한 SF 장르 연출의 힘을 재현할 수는 없겠지만, 큰 장애물이었던 세무조사 따위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삶이 행복해진 3부의 에블린처럼 가족드라마의 향수는 재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정해야 한다는 건

 작금의 시대는 비정하다. 또 슬프다. 디지털 기기로 다른 의미의 ‘버스 점프’가 가능해지면서, 조부 투파키와 에블린처럼 타인의 삶과 삶으로 옮겨 다니며 모든 경험을 간접적으로 겪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른 삶을 체험하고 빠져나온 이들은 극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자기 삶의 소중함을 잃고 있다. 개인에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부담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다.

 타인의 비극을 너무나도 쉽게 기록할 수 있게 됐다. <놉>에서 ‘진재킷’을 담아내려고 혈안이 된 인간이자 괴물들이 현실에도 만연하다. ‘이태원 참사’에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보다 훨씬 먼저 도착한 것은 쓰러져 흰 천에 덮인 생명을 기록하려는 스마트폰 불빛이었다. 쉽게 기록된 비극은 훨씬 더 쉽게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나 힘들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느냐’며 버티거나 포기하라는 말과 같은 신조어로 조롱당하기 일쑤다. 영화 같은 삶을 잃어버린 지는 오래다. 현실은 언제나 살기 어려웠지만, 그 힘듦을 전면에 드러내어 희롱하는 장치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인간적인 정이 없는 세상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건 타인을 향한 혐오나 공격성뿐이다. 나 혼자만 건사해도 다행인 세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미래를 그리는 희망찬 포부는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동화 같은 이야기처럼 남게 됐다. 조부 투파키의 세상이 되어 간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게 한꺼번에 의미를 잃고 있다. 

 <에브리씽>은 이곳에서 단 한 사람과의 교류를 통한 작디작은 회복이 일어나기를 믿고 있다. 그것을 가족 관계로 국한하지 않았다. 가족이 그런 관계가 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손가락이 소시지가 된 세상의 에블린을 보면 알 수 있다. <에브리씽>은 그러한 사람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영화 자체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에블린이 웨이먼드에게 어떻게 디어드리의 세무조사를 늦췄냐고 묻자, 그는 그저 그녀와 얘기만 했을 뿐,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무섭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가 머지않은 무서운 미래 속에서, 청년들은 그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혼란스러운 부담을 경험한다. 더욱 냉철해진 사회 속에서 노인과 중년층은 이해와 포용이 사라진 지금의 시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낄 테다. 이제야 세상 빛을 본 세대는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거대한 문제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웨이먼드의 말처럼 현실이라는 공간 자체와 현실 사람들은 무섭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서로에게 날 선 태도를 일관할 수밖에 없다. 하여 <에브리씽>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진실인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연대와 소통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나아가 스스로가 보기에도 형편없을 정도로 엉망인 상태라면 너그러운 사람 혹은 너그러운 영화, <에브리씽>이 다정한 우주에서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희망과 다정함을 믿고 살 수가 있는 세상인가. 그것들을 노리려는 배신과 음모가 더 큰 세상은 아닌가. 사랑과 다정을 나눠주라는 말은 뻔하디뻔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부정할 수 없다. <에브리씽>은 그 이상의 것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이 현실이지만, 그런데도 다정함을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다 부질없다는 것을 인정한 염세주의와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 냈다. 그렇지만, 뻔한 이 메시지를 제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삶 같은 영화의 마지막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허무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다정함으로 채워가는 것, 그 희망으로 세상을 따스하게 감싸는 것 말이다. 그것이 ‘좋은 영화’이자 ‘좋은 대중문화’의 한 가지, 어쩌면 총체적인 가능성이다. 문화는 삶의 양식이다. 때로는 내 안을 채워주는 온전한 행복이 되기도 한다. <에브리씽>은 문제뿐만 아니라 행복 역시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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