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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일주일살이'를 마치며

by 제니아

강진 '일주일살이'를 마치며 ('24.11.)

<강진 일주일살이를 준비하다.>

정작 책이 예쁘게 엮어져 나왔을 때는 감정이 녹초가 됐다. 이 상황에서 기이하게도 허탈함마저 함께 왔다. 그대로 집에 있기보다는 한 바퀴 돌아오고자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강진으로 마음을 정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배정 받아놓은 새벽 전례를 해결하는 것이다. 열흘 동안 세 번을 수행해야 하는데 가장 절친인 은희 씨가 성지순례중이어서 부탁할 이가 마땅치 않다. 어렵게 주선하여 스리쿠션의 방법으로 바꾸긴 했으나 출발하기 한 주일 전에 바꾼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란 만만치가 않았다. 세 번의 당번은 그것도 해설이어서 사전준비에 어려움이 있다.

이제는 짐을 꾸려야 한다.

다른 소소히 필요한 것은 그이가 잘 챙겨주지만, 문제는 부엌 거리이다. 착착 챙기면 되지만 문제는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이든지 사면되고 매식하면 된다는 통에 양념하나 챙기는 것도 무안을 당하기 일쑤다.

나는 여행을 가면 현지에서 재료를 구해 와 직접 요리도 원하지만 그리도 즐기는 행위를 못내 못마땅해한다.

허나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한 번이라도 틀린 적이 있었던가.

가장 기본이 되는 양념부터 챙긴다. 여기에 누룽지가 필수다. 맛집을 찾지만, 그 많은 끼니를 챙기기엔 매식 장소와 시간이 마땅치 않을땐 숙소에서 간단히 때우는 것도 필요하다.

이번에는 <강진 일주일살이>에 관한 글을 써 볼 생각이다. 유홍준 님의' 남도 답사 일번지'라는 글로인해 많은 사람이 강진을 사랑하지만 나는 내가 보고픈 걸 보고 내가 가고픈 곳을 갈 것이고 내 먹고 싶은 걸 먹을 것이어서 다분히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면서, 나름의 시각으로 강진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자면 노트북과 충전기를 챙겨야 하고 두툼한 노트도 한 권 챙겨야지. 나름 성능 좋은 펜도 가져가자. 나를 후원하는 지지작가의 명단도 가져가보도록 하자.

인터넷의 힘을 빌기로 했다. 사실 나는 제주도 한 달 살기와 영월 열흘 살기 등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강진은 내게 남겨진 강한 인상과 친구가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작년과 올해 내리 두 번을 나를 실망시켰다. 나는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속마음을 더 알아봐야 했고 무엇보다 나는 손해를 봤기 때문에 섣불리 입 밖에 내기가 마땅치 않았다.

강진군 문화관광재단 관광마케팅팀(061-434-7995) 사이트에 날짜를 지정하고 가능하다는 숙소를 예약했다. 그 숙소는 가우도가 가깝다고 했다. 아침을 먹기 전 한 시간쯤, 가우도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하여 무조건 엔터키를 눌렀다. 하지만 직접 통화에서 그곳은 간단한 취사도 어렵다고 했다.

지금은 성수기가 아니라서 빈 숙소는 남아 있었다. 나는 연밭이 어우러진 방죽을 지닌 ‘임이랑 농장’으로 예약했다. 다만 다음 주까지 연잎이 서리를 피해 남아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은근히 연잎 몇 장쯤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래! 강진이야

강진 일주일살이의 글은 어디에 주목할 것인가.

-장소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혹은 인물인지

-성장하는 나의 자아인지

글 가는 대로다.


내가 스무 살 초반일 때 한 친구는 조금 일찍 결혼했다. 강진에서.

나만의 기억. 그 친구 결혼은 시댁에서 행해졌다. 모든 식이 끝나고 우리는 우인으로 안방으로 안내되어 시댁에서 마련해 둔 잔칫상을 받게 됐다. 아마도 부잣집이었던지 그 상은 어마어마했다. 나는 제일 먼저 곶감 탕에 눈이 갔다. 막 그 음식에 손을 대려는 순간, 신랑이 냉큼 그릇을 집어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게 아닌가. 그때의 허탈감이라니.

나는 며칠 후 선배 몇이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상대의 대답. ‘그 곶감 탕 내 결혼식에 와서 먹어라’ 나는 몇 해 동안 은근 기대했으나 그럴 일이 없게 되었다. 강진하면 곶감 탕이요 곶감 탕하면 그 선배가 되었다.


거스러미. 오른손 약지에 일정한 시간이 가면 거스러미가 인다. 난 그 사실을 잊었다. 거스러미가 거스를 때면 남편이 손톱깎이로 잘라주곤 했다. 까시럽고 심하게 거슬리며 심지어 뒤집혀 피가 나던 증세가 사라질 수 있게.

하지만 나는 손톱깎이를 잊었다. 마치 요가 동작이 생각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것처럼 약지의 거스러미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시간이 가니 슬그머니 거슬리기 시작했다.


강진은 정약용의 정기가 서린 고장이다. 관공서의 프로그램이나 길거리 안내판 그리고 음식점의 현판 하나까지 모두는 조선 최대의 실학자를 모태로 기억하는 소도시이다.

강진의 여러갈래 여행 중 다산 실학의 4대 성지인 사의재, 보은산방, 이학래의 집, 다산초당을 돌아보는 방법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의재>

다산 정약용(1760-1836)은 내리 18년(1801-1818)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사의재는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 처음 도착하여 만 4년을 기거하던 역사 공간이다. 임금의 신임을 받다가 정조가 승하하자 종교 신앙 문제의 표면적 이유와 정쟁 제거에 희생되어 정약전과 함께 머나먼 귀양길에 오른다. 큰형은 흑산도로 그리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임금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충신이 낯선 곳에 도착해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처음 의지한 곳이다. 조선조 정신의 상징이자 실학의 정점이었던 고독한 선각자가 유배 생활을 시작했던 슬픈 곳이지만 다산 실학의 장엄한 첫 성지이다.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키라“는 의미로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라 칭하고 학문에 정진한 곳이다.

영락없는 주막이지만 1801년 겨울 맨 처음 오갈 데 없는 다산을 받아들여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주모의 집이기도 하다. 대단한 여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문전 박대하는 현실에서 무얼 보고 유배자를 받아들였을까? 유배 초기 술로써 시름을 달래던 석학을 알아보고 그를 채근하여 후학을 기르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다잡고 지극정성을 다한 이 모녀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다산과 실학사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걸쭉하고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의, 혜안의 주모 또한 길이 기릴만한 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8년을 유배지에서 버텨낼 수 있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하여 정신적 기반을 다잡아 학문연구에 정진하게 한 여인이다.

한 가지 의문, 그동안 주모는 업을 폐하지 않았을진대 들고 나는 주막에서 학문연구가 가능했을지가 의문이다.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의 도움으로 보은산방에 거처를 마련하고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를 돈독히 나누던 곳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는 산길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제자 이학래의 집 조성 터>

산중의 스승을 안타깝게 여겨 다산을 집으로 모셔와 후학을 가르치는 데 더욱 매진하게 한 곳이다.

제자가 스승을 집으로 모신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나라면 아들의 스승을 집으로 모셔올 수 있을까. 강진에 도착 후 가장 먼저 돌아보고자 한 곳이다. 안내지에도 나와 있지 않고 <조성 터>라는 명칭만 있다. 어림잡아 지도를 내비게이션에 대조하며 찾아간 곳은 철새도래지 상류쯤이었다. 집, 터.

‘이학래길’ 중간쯤 멍석에 앉아 농작물을 손질하던 어른께 물었더니 ’애초에 잘못됐다‘는 말만 계속했다. 차에서 내려 이학래길 이정표를 따라 계속 걷다가 나이 드신 남자 어르신께 다시 물었다. ‘이학래 집’을 아시나요. ‘저만치 주차장 터요’ 그 터에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를 이학래가 심은 나무라 하여 집을 복원하려 했으나 중간에 나무가 고사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했다.

<다산초당>

이듬해, 그의 제자들과 정약용의 외가 윤 씨들이 탐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귤동 마을 만덕산 자락에 다산초당을 마련한다. 다산초당은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 년 동안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가 풀리기까지 10여 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저서를 저술하는 등 위대한 업적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다산 유배길은 그가 다니던 길, 즉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 보은산 보은산방까지 다산의 사상이 녹아있는 길이다.

국내 소도시들을 소개하는 로컬 프로젝터 님들의 소개 글이 넘쳐나는 강진에 나만의 시각으로 선택하고 돌아보는 기회이다. 이학래의 집이 아직 조성터인 것이 못내 아쉽다.


<다산청렴연수원과 수류화개의 추억 >

강진다산청렴연수원과 수류화개의 추억 (2021.9.27.~2021.9.29.)

몇 해 전 강진다산청렴연수원의 2박 3일 연수에 참가했다. 대구 사무관 연수 때 동기들끼리 신청하기로 약속한 바 있으나 언제 어떻게 신청하자는 약속을 못 한 채 헤어져 아쉬움만 남은 곳인데 그러던 이태 후 가을날, 로주 샘이 연수생 모집공지가 떴다며 연락이 왔고 홍 사무관도 동참했다.


그렇게 강진다산청렴연수원의 공직자 청렴 연수에 참여하다.

낮에는 연수원에서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밤에는 푸소 농가에서 묵는 형식인데 그때도 백련사, 다산초당, 사의재, 다산박물관 등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전에도 익히 개별여행으로 몇 번 와 본 경험이 있어서 새삼스러울것 없지만 온통 다산으로 어우러진 도시는 그에 걸맞은 자부심이 있었다. 특히 그때는 공직자의 마음가짐에 초점을 둔 교육이었기에 나름 다부진 자신만의 열의와 자부심을 가졌던 기억이다. 청백리를 지향했을까.

그곳의 프로그램으로 밤에는 푸소 농가에 묵었는데 달빛 한옥마을의 ’수류화개‘ 안 주인의 환대를 받는다. 여주인은 쪽빛 염색 조각보 커튼과 십자수 장식 등으로 집을 꾸미고 인사동의 찻집과 청담동의 한식집에서나 볼수 있을법한 상차림이 가능했다. 온갖 종류의 텃밭 음식으로 반찬을 마련하고 후식으로는 직접 담근 청귤 차와 4색 과일, 직접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솜씨를 발휘했다. 2박 농가, 퇴임 경찰관 댁에선 송편과 삶은 밤, 그리고 전복찜과 매생잇국으로 우리를 칙사대접했다.

그 후 나는 집으로 손님을 초대할 때마다 그때 대접받은 상차림을 참고한다.

낙지 무침, 돼지고기찜, 홍어 묵은지 삼합, 고등어구이, 가지나물, 콩나물 미나리나물, 멸치볶음, 토란대 들깨 볶음, 도라지 오이생채, 돌나물 된장소스 샐러드, 열무 깻잎 상추쌈, 황태 두붓국, 우거짓국, 죽순 들깨 볶음 등의 메뉴이다.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수류화개에 전화했다. 그 전에 연수원생으로 하룻밤 묵었다고 했더니 반가이 응대하였다. 예상대로 빈 방이 없다고 했는데 하룻밤에 2인 160,000원이라고 한다. 자유여행에 한 번쯤 다시 가고픈 숙소이나 우리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

<강진 '임이랑 농장' 에 묵다. >

’임이랑 농장‘ 푸소 숙소에 묵다.

강진 일주일살이를 계획한 후 제일 먼저 강진군문화관광재단(061-434-7995)사이트에 접속해 숙소를 지정했다. 오래 묵어야 할 숙소인지라 인터넷 검색도 병행하고 직접 안주인과 통화도 시도했다. 너그럽고 푸근한 목소리로 안내하신다. 간단한 식사 정도는 조리 가능한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그리고 대문사진의 연밭 또한 내 마음을 끈다. 연잎. 구해오리라. 연엽주를 담고 연잎밥을 하리라. 거기에 연꽃잎차도.

주인댁과 나란한 별채가 한적하고 깔끔하다. 목욕시설과 주방기구도 잘 갖추어진 별도공간이라서 두 팀이 들 수도 있고 대가족이라면 합해서 한 가족이 편리하게 묵을 수 있다. 우린 그 중 한 방에 들었다.

새벽 어스름 녘에 집 앞길을 한 바퀴 돌다. 잘 정돈된 집들이 마을 길과 함께 정갈하다.


도착했을때 안 계셔서 인사 드리지 못했던 바깥 어르신이 아침식사를 먼저 하셨다며 우리만 먹게 됐다. 내일 아침은 겸상하시자고 권해놓았다. 나는 어른들과 잠깐의 대화로도 그분의 깊이를 알아본다. 시골에 계신 지긋이 나이든 어르신. 그분들에게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는 존재한다. 아들 며느리에게 적당한 노선을 지키고 조상을 모시는 것에도 나름 소신을 갖고 계신다. 문중의 일과 마을 일도 병행하시고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에게도 당신의 인품이 엿보이게 한다. 나는 그분의 멋스러움을 금방 알아봤다.

무엇보다 그분은 내 초임지의 곽 장학사님을 알고 계셨다.


주인장 부부의 성을 본떠 지었다는 ‘임이랑 농장’의 상호는 짐짓 아닌 척하나 ‘내 임이랑’ 이라는 것도 알아챈다.

밥반찬으로 나오는 음식이 정겹다. 파를 데쳐 돌돌 말아 양념장에 찍어 먹는 파 숙지, 우리 방 앞마당에 거적을 둘러친 곳에서 자라는 표고버섯볶음, 서로 떼주면 안 된다는 깻잎장아찌. 삼 년 묵은 배추김치, 아침에 쑤셨다는 도토리묵 무침, 대밭에서 직접 수확하신 죽순 무침, 여자만 꼬막무침, 꼴뚜기 젓갈, 말갛게 볶아낸 멸치볶음, 알맞게 익은 홍갓, 그리고 민어 튀김과 소고기 듬뿍 썰어 넣은 미역국 등이 영락없는 엄마 밥이다. 이른 일곱 시의 아침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이다.

하루를 지내고 나는 나의 혜안을 믿게 됐다.


'배추 김장 천 포기를 어디에 쓰는걸까?' 필시 나름 유명한 김치찌개집 일거야.'

밭에서 직접 심은 배추로 손수 담가 한 곳으로 납품한다고 하셔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고객은 그분의 고객에게 선물로 돌린다고 하는 대답에 더는 묻지 않았다. 벌써 몇 해째 그러하시다니 믿음 그 자체다. 아침상에 나란히 놓인 3년 묵은 배추 김치와 1년 묵은 배추 김치를 선보인 내게 냉장고와 냉동고를 보여주신다. 온갖 농작물의 수확물이 들어있다. 가공을 준비하는 저장물과 내다 팔 신선채소와 온갖 밭작물의 종자....다행히 내가 원하던 연잎과 연꽃 말린 것도 있다. 잠깐 아는 체하는 내게도 넉넉히 내어 주신다.

어느 아침, 간이 전동차를 타고 당신의 전답을 자랑하고픈 안주인을 따라나섰다. 아직도 너른 밭들에는 푸른 채소가 가득하다. 온 밭에 가득한 배추는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 아직 파란 쑥은 떡으로 만들어져 지인에게 보내질 것이다. 보리와 땅콩은 물론 마늘과 양파, 고추나무, 대파와 홍 갓등 김장 부재료가 가득하다. 이들은 모두 나이 든 억척마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당근과 대파는 일정량씩 다듬어 읍내 로컬마켓 으로 출하한다고 하셨다. 저녁 무렵 비닐 포장을 하는 작업을 도와드렸다. 깨끗이 씻은 당근을 저울에 달아 서너 개씩 소포장하고 대파도 500g씩 긴 비닐에 가지런히 넣는 작업이다. 덕분에 금방 끝났다며 좋아하시는 것을 보며 언제까지나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농촌 일은 끝도 없다. 나처럼 숙련된 보조는 긴히 필요하겠으나 나는 아주 오래전 그런 일에서 졸업한 기억이 있다.

한가지 문제점은 시간이 갈수록 하염없이 정이 든다는 것이다. 나는 숙소와 정이 들고 말았다. 서울로 돌아와 오래도록 그 곳에서 지낸 며칠의 기억이 포근하게 남았다.


<병영 상인>

'북쪽에는 개성상인, 남쪽에는 병영 상인' 이라는 말이 있듯 병영 상인의 역사는 아주 깊다.

강진은 서해안과 남해안이 만나는 지점이고 중국과 일본의 중간거점으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장보고의 군사시설 청해진의 설치 후 병영 상인이 등장해서 청해진이 폐지 후 쇠퇴했다가 고려청자 생산을 계기로 빠르게 부활하여 전라 병영성이 축조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병영에서 아이를 낳을 때 잘 나오지 않으면 ’옜다 저울‘하면 금방 나온다.'

'병영 상인들은 말꼬리로 만든 붓 12자루만 있으면 밖에 나가 1년 먹을 것을 벌어 온다.'

'병영 상인들은 강진군수 할래? 장사꾼 할래 하면 다들 ’장사꾼 할라요‘한다.’는 말이 있다.'


<병영 오일장>

어제는 마량항에 가보았지만, 축제를 끝낸 쓸쓸한 뒷자리의 느낌이었다.

오늘이 병영 오일장이라는 걸 서울에서부터 검색해왔는지라 맘먹고 나서기로 한다. 컴퓨터 작업이 늦어져 간단히 점심을숙소에서 때운 후 3~40분 거리의 행로에 나서다. 하지만 분명 오일장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자리에 펄럭이는 의류와 걸어놓은 옷가지 상인 몇 명이 보일 뿐이다. “여기가 오일장인가요?

’장에 나오던 노인네들이 모두 돌아가셨소‘. 아침 일찍 잠깐 장이 서고 이내 시들어진다는 것이다. 서운하게 여기며 대신 병영성과 하멜 기념관을 둘러보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 제일방앗간에서 참기름을 한 병 샀다. 그리고 병영양조장 건물을 발견했다. 전통주 빚기 반에서 강진 여행을 간다고 하니 남도의 막걸리를 꼭 사서 맛보라고 권유한 친구가 생각나서 반가이 방문했다.


<강진 오일장>

병영장과 달리 이튿날 일찍 서둘러서 강진 오일장의 김장철 기분을 맛보려 했다. 김장철이라 생배추도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예전에는 모두 배추를 직접 절여 김장해서 강진 오일장이 매우 분주했다 한다. 그때는 절인 배추로 김장하는 것에도 흉을 보는 시대였는데 지금은 모두가 완성된 김치를 농가에서 직접 주문한다는 말씀에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그래도 옛 정취와 명성은 그대로 남아있어 김치 부재료인 파와 갓, 생강 마늘이 즐비하고 수산전에는 생새우와 생굴 그리고 청각 등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나는 지금 심각한 고민에 있다. 해남 절인 배추를 주문해 놓았는데 주인댁의 완성된 김치와 바꾸어서 주문할까를. 꾀가 나는 것이다. 80k의 배추를 김장 하자면 지금부터 사들여야 하는 부재료는 차치하고라도 그걸 버무려 내는데 들어야 하는 공력과 저울질해대는 것이다. 암튼 오일장을 두루 돌아보면서 계속해서 생각 중이다. 나의 결론은 어디로 가 닿을지. 기다려 볼 일이다.

오일장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 짐칸에는 시골 오일장의 풍미가 가득하다. 김장 부재료도 가득하다.

<해남 대흥사 가는 길>

가을이 알맞게 무르익어간다. 만산홍엽이다. 비를 동반한 바람 한 번에 우수수 쏟아져 내릴듯한 단풍이 마지막 빛을 발한다.

’백두대간에서 단풍을 놓쳤거든 해남 대흥사에 와서 그 단풍을 잡아라‘ 는 말이 있는데 그 단풍이다.

이번 여행은 강진에 묵고 해남에 가다.

매표소 주차장 앞 전주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경내로 이어지는 화려한 단풍 터널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들어선다. 차를 세우고 대흥사로 올라가는 길. 단풍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저절로 우리를 벤치로 인도한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이끼가 세월을 짐작게 한다.

몇 해 전, 유선관에 묵은 적이 있다. 1914년에 사찰을 찾는 방문객과 수도승을 위해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이라고 한다. 그동안이 궁금하기도 하고 예스러운 숙소와 묵었던 툇마루도 보고 싶어 유심히 들여다보니 길 쪽으로 난 출입문을 담으로 곱게 쌓아 길손이 내부를 기웃거리지 못하게 막아놓았고 계곡 쪽으로 어지럽던 임시 건물도 모두 정리하여 단장해 놓았다. 출입문을 내놓은 뒤 작은 가림막으로 출입자를 안내한다. 궁금함에 들여다보면서 정갈함에 아쉬움이다.


대흥사 절로 올라가는 길.

일주문 안 부도에는 50여 개의 승탑과 비석이 있어 사찰의 위용을 말해준다. 일주문 지나 해탈문. 해탈문에 들어서면서 멀리 고개를 들면 만나는 풍경은 그 고즈넉함이 탄성을 자아내는 장관이다. 그 언젠가 교과서에서 ’대흥사 가는 길’이라는 기행문을 접했던 기억이 난다. 눈이라도 내려쌓이는 날에는 그 광활함이 가히 짐작이 간다. 무염지 심진교 쪽과 반대로 대웅전 개천을 지나 북쪽으로 자리한 연리근에 눈길을 돌리며 대흥사 3층 석탑으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왼쪽으로 멀리 돌아 어제 완공기념 축제를 했다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호국 대전까지 도착해 걸어 온 길을 내려다본다.호흡이 멈춰지는 장엄함이다.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7곳의 사찰 중 하나이다.


강진과 영암 사이에는 ‘도갑사‘라는 절이 있다. 아마도 월출산을 오를 때 그 절을 통과해서 올랐던 기억이 있다. 대흥사 가는 길에 들를 수 있다.

당시 직원 중에는 젊은 청춘 남녀가 많아서 휴일이면 함께 산에 가곤 했다. 월출산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등산복이나 등산화의 개념도 없이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으로 선배 언니 오빠들을 따라나섰다. 역할 분담도 확실하여 선두에는 길을 잘 아는 이가 앞장서고 뒤쪽에는 힘이 좋고 걸음이 빠르며 아우르는 힘이 좋은 선배가 담당했다. 나는 선두주자의 바로 다음 자리, 조금 늦어지면 따라잡기가 어려우므로 늘 그렇게 두세 번째였다. 그때는 날쌔고 눈치도 좋아 산에 갈 때마다 남의 짐이 되지 않고 잘 따라다녔다.

<강진 가우도 일주>

내게 가우도는 곽 장학사님의 추억이 있다.

첫 임지였던 남쪽 바닷가 교육청에 근무할 때 그 전에 매스컴을 통해 알고 있었던 분이 부임해 오셨다. 제28회 전국과학전람회에서 <밀물과 썰물에 관한 우리들의 관찰>이라는 주제로 대통령상을 받은 강진 가우도 분교의 지도교사가 장학사로 온 것이다. 그런 분과 동료로서 지내는 게 신기해서 자랑했는데 훗날 그분은 강진 교육장과 완도 교육장을 역임하셨다는 보도를 접하고 반가웠다.

가우도 일주를 계획한 날 아침, 숙소의 어르신은 그분을 잘 알고 계셨다. 아주 반가워하셨을 텐데 아쉽다고 하셨다. 강진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시면서 지역의 유지로 존경을 받았다고 하며 가우도 분교의 학교터를 일러주셨다.

바닷길을 따라 섬 앞에 도착해 차를 주차한 후 다산 다리를 건너 가우도에 들어섰다. 섬으로 가는 길이 이리 간단한 행로인데 그 당시에는 학생이 6명뿐인 섬 분교이고 들고 나는 길이 열악해서 벽지 점수의 대상이었다니 당시를 상상해본다. 섬을 오른쪽으로 돌아 데크길을 걸으니 몇 해 전 스무 명이 넘는 친구들과 왔었던 모노레일과 짚트랙 승차장이다. 그때는 왁자지껄 한없이 어울리며 수학여행을 온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기억이 난다. 주말이 아니어서 짚트랙은 운행하지 않아 아쉽게 생각하면서 청자 다리 중간까지 걷는다.

섬을 한 바퀴 돌기 위해 오솔길을 거쳐 출렁다리를 건너 해안 데크를 걷는다. 굳이 이 지점에 출렁다리를 세운 의도는 알겠으나 다분히 인위적이어서 내 마음엔 마땅치 않았다. 숲길을 빠져나온 바닷길에 다산 정약용 쉼터를 만나다. 안내판에 유배지의 아버지 다산을 찾아온 아들을 만나 이곳에서 잠깐 머물던 곳이라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을지 못내 마음이 짠하다.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 다산 다리 조금 못 미쳐서 폐교된 가우도 분교의 터를 만날 수 있었다.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은 세월의 뒤안길이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자리했을 영광의 시간을 짐작하면서 평생 학교 밥을 먹은 이의 감회는 새삼 새롭다.

귀로에 가우도를 뒤돌아보니 찐빵을 네댓 개 뭉쳐놓은 듯 구획이 나뉘어 보인다. 짚라인과 모노레일로 대표되던 곳. 강진 하면 늘 주된 뒷배경으로 쓰이던 가우도를 다녀가면서 나는 아주 오래전 초임때 동료였던 장학사님을 추억한다.

간단한 조리도 곤란하다하여 들지 않았던 숙소의 인연도 기억한다.


내일 매상할 벼를 갈무리해서 100 가마 분량을 차에 싣고 준비를 끝냈다며 친구가 연락해 왔다. ‘그래 만나자’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 결혼식이 있고 난 후 40년만에 처음 마주하게 될 곶감 탕의 주인공도 함께 나와 우리 신랑과 넷이서 동석하기로 한 것이다. 한우촌에 자리를 잡고 제일 먼저 그 잔칫상에 관해 얘기했더니 ‘한 그릇 더 달라고 하시지.’ 그리 쉽게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잘 키워 여우 살이 한 아들의 얘기와 젊을 적 많이 아파 힘들었던 기억, 그리고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살림을 일구고 사회활동도 병행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나도 내 얘기를 하기엔 시간이 조금 부족했던 듯하다.

하지만 여러 곳을 물색하다 이곳으로 결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친구와 함께 하는 자리.


서울로 돌아오는 길. 차를 가지고 기착지역으로 마중 나온 경희 언니를 만나 30년이 훌쩍 지나버린 나의 옛 근무지에 들르고 한바퀴 시내 구경도 했다.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일행은 먼저 올려보내고 나는 중간 기착지 그 도시의 플랫폼에 내려 그를 만나다. 거의 한 시간의 용기를 낸 만남은 플랫폼 의자에 앉아 예약해 둔 다음 열차가 다가올 시각까지였다.

재직기간이 그래서 좋은 거다. 그때는 주인공이었으나 지금은 다분히 과객의 느낌이다. 한 발 비켜난 퇴임자로서 그때를 추억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니 말이다.

경희 언니도 퇴임하여 역으로 차를 가져오지 않았고 근무지 교육청에 다시 가보는 것도 의미를 퇴색한 행위다. 플랫폼의 만남을 행하기도 이미 시간이 흘렀고 그곳엔 내 추억만 부유하고 있다.

지금은 다만 그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에필로그-김장 덧 작업과 강진 일주일살이를 마치며>

강진 여행과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여행사이에 김장 날이 있긴 했다.

여행을 가기 전날, 마냥 신나서일까. 휘뚜루마뚜루 해치운 김장이 허여멀겋게 김장통을 채우고 있다. 서울식도 남도식도 아닌것이 되고 만 것이다. 관광차 안에서 친구들이 그랬다.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야 해’ ‘김칫소를 숙성해야 해.’ ‘낱낱이 꼼꼼히 양념칠을 해야 해.’ ‘김치통 윗면에 천일염을 뿌려야 해. 나의 김치 작업에 모두 한 마디씩 보탠다.

급한 마음에 발왕산 케이블카도 염두에 없다.


덧 작업 중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육수를 진하게 우리고 찹쌀죽을 쑤어 식힌다. 과일을 갈고 무도 넉넉히 믹서기에 간다. 새우젓과 멸치액젓을 넣어 양념소를 만들어 둔다. 고춧가루도 넉넉히 준비한다. 한참 동안 숙성을 위해 기다린다.

가득 담긴 김치통을 모두 다시 꺼내 넓은 대야에 덜어내어 켜켜이 쌓는다. 잠시 쉬어야 한다. 아니 몸이 개운해질 때까지 요기하고 기다려야 한다.

배추 뿌리에 소금을 조금 얹는다. 그리고 됨직하게 준비된 양념소를 켜켜이 가미한다. 한 조각을 마치고 갈무리할 때의 기분이라니.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있다. 80k, 이리 쌓인 김치에 언제 다 덧 작업을 해야 하나. 마치니 오후 두 시다.

이제야 내가 원하던 남도식이 되었네.

”그래, 김장은 남도식이지“”얘들아, 이제 괜찮아졌다“


강진 일주일살이를 정리한다. 가장 많이 자랑했던 시간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행복했던 시간이다. 올 한해 드물게 실속있게 살았고 역설적이게도 ’근무하지않고 이리 자유로이 살았어야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함께 였다.

지금 나는 다가올 다음해도 기대한다. 마음 뿌듯이 잘 살아낼 자신 있다.

’나를 아는 모든이가 나로 인해 지그시 미소짓길...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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