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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Aug 03. 2023

그림공포증이 그린 그림

때는 초등학교 5학년, 과학상상그리기대회. 반나절 동안 초등학교 전체가 그림 그리기 대회를 하느라 수업이 

없었다. 첫 시간에 스케치를 끝내고, 두 번째 시간에는 채색을 무난하게 하고 있었다.1) 수채화 물감을 플라스틱 팔레트 위에 쭈욱 짜고 물을 묻혀 붓칠을 슥슥 시작했다. 그런데 스케치에 비해 생각보다 색이 너무 안 입혀졌다. 그 순간 어지럼증과 두통으로 보건실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있다가 교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그림 제출은 모두 끝나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림을 제대로 제출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두통은 그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만들어 낸 탈출구였으리라. '이 상태로 망한 작품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못 그리다니!' 나는 스스로 정신적 아픔을 피하고자 신체적 아픔을 만들어 냈다.


그림공포증은 그 이후로 계속됐다. 내 그림실력은 형편없다. 특히 사람을 그릴 때와 공간지각력이 필요할 때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피카소 그림이 탄생한다. 짝꿍 초상화 그리기가 그래서 제일 싫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칸딘스키나 마르코 폴록, 즉 추상화 화가였다. 만약 미술사에 추상화라는 화풍이 없었다면, 내가 시초가 되었을 거라 확신한다. 심지어 상담할 때 그리는 그림도 부담돼서 사람은 모조리 멀리 있는 뒷모습으로 그렸다. 그조차도 원근이 어긋나 어색했지만 말이다.2)




그런데 내가 왜 제주 청년센터의 아크릴화 수업에 신청했을까. 하필 이럴 땐 기가 막히게 조상님의 은덕을 받았는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내가 선정됐다. 대망의 첫 수업 날엔, 나는 아크릴화 수업에 늦는 꿈을 꾸면서 일어났다. 무의식조차도 그림이 무서웠던 거지.


첫 수업도 제일 늦어서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 (꿈인가?)

그리고 나만 남자였다,

그리고 또 남은 자리는 선생님 바로 앞자리였다.


아, 절 주목하지 마세요, 제발!




첫 도전으로 아크릴화는 좋은 선택이었다. 그림이 망해도 무제한으로 덧칠할 수 있다는 안정감은 나를 조금 편안하게 했다. 선생님의 친절하고 쉬운 설명을 맨 앞에서 듣는 것도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선생님은 내 붓터치가 좋다고 칭찬을 열심히 해주셨고, 내 신난 손놀림은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뭐지, 이게 왜 되지?'


구름을 넣을 자리를 남겨두고, 그럴듯한 작품이 완성됐다. 멀리서 보니 '나 쫌 치네?' 만족감이 쏠쏠했다. 나는 남들이 뭉게구름을 그릴 때 호기롭게 새털구름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과는? 아이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아크릴화가 덧칠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해도, 고칠 수 있는 수업 시간은 정해져 있다.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두통이 없었다. "망해도 괜찮아." 어릴 때와 달리 스스로 다잡을 힘이 생겼다.


그렇게 열심히 붓도 바꾸고 붓터치도 바꿔가며 덧칠하니 의외로 뭔가 느낌이 있어졌다. '오오, 이거다!'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손을 놀렸다.

선생님이 새털구름을 잘 살렸다고 폭풍칭찬을 해주신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 걸 보면, 새털 같은 칭찬일 수는 있지만 나는 이미 구름 위에 앉은 느낌이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속으로 끝까지 상상을 해버렸다.



'나... 어쩌면 소질 있을지도...?'



우도의 톨칸이 해변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빨간 건 뭘까?




덧붙이는 말.

내가 만약 수행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보다 더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림을 무서워한 시간을 돌이켜보니 퍽 애틋하다.




주석

1) 뭘 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 나는 "모든 걸 해주는 시계"를 꿈꿨던 적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자비스가 내장된 시계다. 플러그인이 잔뜩 들어간 ChatGPT가 작동하는 스마트워치니, 상용화되려면 1~2년밖에 안 남은 것 같다. 20년 만에 상상이 현실이 되긴 되는구나! 통일보다 빠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2) 다행히도, 그림 그리기가 아닌 만들기 수행평가는 못 하진 않았고, 시험도 달달 외우면 됐기에 미술 성적은 나름 우수했다. 땡큐, 칸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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