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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형 Jul 16. 2020

13. 4막 1장 <나의 얘기>

4막 1장 (2015-2017)


#1. 군대.. 아아ㅏ아악.... 군대라니....!!!!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대화의 80%는 군대 얘기였다.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친구, 시민권을 취득하여 군 면제를 받은 친구, 특수병에 합격하여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 군대 얘기만 하면 줄담배만 연거푸 피던 친구 등 다양했다. 사실 나는 당시 햇수로 10년 동안 영국에 거주했기 때문에, 영주권 지원이 가능하였다. 여기 저기 알아보기도 했는데, 그때 당시에 꿈이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적 변경 또는 이중 국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늘 삶을 함께 기획하고 꿈을 꾸던 친구가, "큰 사람은 그 그림자도 큰 법이다. 깔끔하게 다녀오자" 한 마디에 현역 입대를 결심했다. 게다가, 아킬레스건 재파열으로 당시 4급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그때는 현역이라는 '배지(badge)'가 간절했다. 동기 중 3명이 카투사에 동시 지원했는데, 그해 모두 불합격했다. 전날 그 중 한명의 집에서 모여 술을 먹고 아침에 일어나 확인했다. 친구가 먼저 불합격 통보를 받자 나는 속으로 "내가 됐구나"하고 몽롱한 정신을 바로 잡고 집으로 뛰어가 확인했다. 웬걸, 나도 불합격이었다. 그 친구의 결과는 나의 결과와 독립변수였던 것이었다. 일정 영어점수 이상이면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발되는 카투사인 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었다.


대안으로 의무경찰(이하 의경)에 지원했다. 현역이지만 사회에서 군 복무를 할 수 있고, 99% 이상이 원하면 주소지에 배치됐었고, 당시 새로운 경찰청장이 부임하고 선진병영문화를 내세우며 모든 악습을 없애던 시절이라, 의경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다. 지역마다 달랐지만, 내가 지원한 지역은 경쟁률이 평균 30:1 이상이었다. 실제로 동기 한명은 10수에 합격하여 들어왔다고 한다. 합격하면 최소 5-6개월을 기다린 후에 입대가 가능하여, 졸업식을 포기하고 선발시험을 위해 한국으로 날아갔다. 전역 후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늦어도 12월에는 입대해야 9월에 전역하여 9-10월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이라도 떨어지면 이 계획이 무산되기 때문에, 나도 도박을 해야만 했다.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줄을 서서 신분확인을 했다. 체력시험을 위해 반팔 반바지로 환복하고 인적성 검사를 쳤다. 아, 그전에 팬티만 입고 문신 검사를 했다. 조금 수치스러웠지만, 의경은 아무래도 사회에서 시민들을 직접적으로 대하다 보니 외모단정을 중요시했던 것 같다. 문항이 어림 잡아 350개 정도였다. "나는 가끔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다", "나는 가끔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등 상식적인 질문과 함께, 정치, 국사, 사회, 문화, 시사 각 6개의 항목의 꽤 난이도 있는 질문들도 있었다. 유학생활을 오래 한 나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기억을 짜냈다.


체력시험은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제자리 멀리뛰기, 쪼그려 앉기가 있었다.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고도비만이 아닌 이상 윗몸일으키기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멀리뛰기에서도 10명 중 1명 정도만 떨어졌다. 악명 높은 팔굽혀펴기에서는 우수수 떨어졌다. 팔굽혀펴기 20개라고 하면 "에이~ 그거도 못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일반적인 팔굽혀펴기와는 달랐다. 감독관 구령에 맞춰 하나에 내려가고 둘에 올라와야 하는데, 내려가고 올라오는 시간이 2-5초 정도 돼서 20개 하기가 은근히 어려웠다. 무엇보다 자세불량이어도 과감하게 떨어뜨렸다. 나는 15개쯤 했을 때 체력이 남아서 합격이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마지막 하나는 솔직히 조금 힘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뚫고 나면, 최종 면접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내 기수 4(?)기수 밑으로는 면접에서 추첨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재밌는 건 그 작은 사회에서도 면접을 보고 들어온 기수, 아닌 기수 구분하여 조롱하는 문화도 존재했다). 다대다 면접으로, 5명이 한 조였고 면접관은 4명이었다. 3명은 경찰관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외부인사인듯 했다.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 같았다. 나이도 많고 유학 경험이 많은 나는, 다른 지원자와 다르게 질문 폭격을 받았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한국의 장유유서 문화를 알고 있느냐", "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모님이 음주운전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노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이가 많은데 나이 어린 선임이 지시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등.... 생각나는 건 여기까지. 종합해보면, 나이도 많고 한국 문화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와서 잘할 수 있겠냐? 우리를 설득해봐라 느낌이었다. 나는 오히려 나이가 없는 문화에서 자라와서, 나이에 따른 구분보다는, 계급에 따라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겠다고 대답했고, 폭력에 관해서는 물리적 폭력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폭력을 언급하며 유학생활 당시 겪었던 인종차별과 연관 지어 대답했다. 어떤 질문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대답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면접관 모두 흡족한 표정을 지었던 것만 기억난다. 2-3일 뒤에 합격 통보를 받았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가 입대일이었다. 졸업식을 생략하고 도박한 것이 먹혀 들어간 것이었다.


입대 날짜도 확정받았겠다, 공공부문 인턴을 3-4개 거치니, 민간부문에서 경험을 쌓아보고 싶었다. 무언가 더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대까지 6개월 남은 상황에서, 경제 싱크탱크에 지원하여 근무했다. 1980년대 기업 발전과 한국 경제성장에 관한 연구를 했고, 창업, 기업가정신을 주제로 한 해외칼럼과 논문을 가공하여, 국내 현지화된 콘텐츠를 개발했다. 컨퍼런스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각계 유명인사들을 만나는 것도 고무적이었다. 


인턴과정을 수료하고, 훈련소 입대일을 겸허하게 기다렸다. 의경 관련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하루에 여러번 출석하며 유치한 질문을 올려보기도 했다. "머리 기를 수 있나요?", "공부할 시간이 충분한가요?", "얼마나 자주 나올 수 있나요?"





논산훈련소, 경찰학교, 기동대 자대배치, 중대장 비서 및 운전병 발령 등을 거쳐 21개월 간 군생활 끝에 만기전역 했다. 좋은 선후배들을 많이 만났고, 사회에 나와서도 종종 연락하며 보기도 한다. 느낀 건, 어디 가서든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군 생활은 나에게 또 하나의 dot이 되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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