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애송이는 결혼준비 중.
0.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지 말고 평생 아빠랑 살자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결혼 할거야 아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건 몰라도 결혼은 꼭 하고 싶었다.
나에게 결혼은 '꼭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하고 싶은 것'이었다.
1.
내 머릿속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보면 떠오르는 몇개의 잔상들이 있다.
그건 그리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잔잔하고 평화롭고 소소하다.
무더운 여름날 거실에 대나무 돗자리를 펴놓고 그 위에서 가족이 모여 티비를 보며 수박을 먹던 순간.
엄마 아빠 남동생 다같이 거실에 이불을 깔아놓고 영화를 보다 잠들었던 순간.
과학실험 숙제를 한다고 부엌에서 엄마와 함께 포도와 설탕을 끓이던 순간.
옥상에서 아빠와 고드름을 따서 한 번 햝아본 순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남동생의 생일파티를 한다고 다같이 촛불을 끄던 순간.
그 기억이 다른 기억들에 비해 어쩌면 선명하지는 않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아주 분명하게 기분 좋은 잔상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 별 것도 아닌 걸 하는 순간들이다.
그렇게 한 번의 잔상들로 남기에는 너무 행복했던 기억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남겨주고 싶은 행복의 순간들.
그래서 나는 결혼이 꼭 하고 싶었다.
2.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것,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삶의 터널을 함께 의지해서 나아간다는 것,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불안정함을 완벽히 안정감으로 바꾸어 줄 수는 없겠지만 나만 불안정한 게 아니라는 공감과 불안정해도 괜찮다는 위로의 존재일 나의 반쪽.
그리고 그와 만들어 갈 가족의 행복한 순간들.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어쩌면 가족을 꾸려 살아가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더라도, 힘들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그렇게 결혼에 대한 계획과 마음이 확실했던 어린 소녀는
내가 그리는 따뜻함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결혼은 안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사람이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기대를 품고 사는 청춘으로 이십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곳 제주에서,
스스로 애송이라고 칭하고 있는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인 나이 스물일곱의 나이에,
기어코 결혼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