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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기록

by Yujin Kim


만성 염증 같은 기억이 있다. 떼어 내려해도 없어지지 않고 어김없이 생각나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은 그런 기억. 2025년 10월 21일 결혼 20주년이 되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 결혼기념일에 다시 생각난 건 그날이 남동생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16년 서른아홉에 드디어 남동생이 결혼을 했다. 내 결혼 이후 십 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어 답답해하던 부모님은 귀한 아들의 결혼에 일생의 과업을 달성한 듯 뿌듯해했다. 미국에 살고 있던 나는 남편, 아이 둘과 함께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오래간만에 대식구가 모여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결혼식 당일 부모님과 나는 남동생이 운전하는 차로 메이크업 샵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동생은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가는데 1박에 얼마 하는 호텔을 할인받아 정가보다 저렴하게 간다고 신이 나 떠들고 있었다. 내가 결혼할 당시에도 몰디브는 최고급 신혼여행지였다.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결혼식 비용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나로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신혼여행지였다.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남편 가족들과 한국 여행을 계획해 놓았고, 결혼을 한 후 바로 독일에서 살 예정이었기 때문에 굳이 안 가도 괜찮다고 생각한 신혼여행이었다. 남편이 동남아로 짧게나마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해서 가성비 좋은 곳으로 세부를 골랐었다.


“네가 가는 몰디브의 1박 가격이 내가 신혼여행으로 갔던 세부 4박 5일 가격이랑 맞먹네.”


몰디브가 비싼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비쌀 줄은 몰라 놀라서 한 나의 말에 뒷좌석에 타고 있던 엄마의 반응이 더욱 놀라웠다.


“아, 내 딸의 운명.”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 딸'이라는 다정한 단어를 '운명'에 맡기니 차가웠다. 차 안의 좁은 공간이 나와 나머지 세 사람으로 나눠지는 느낌이었다. 남매인 나와 남동생은 엄마의 말로 다른 부류가 되어 있었고, 그 말에는 애틋함이 없었다. 엄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좋은 선 자리를 모두 마다하고 네가 선택한 결혼이니 어쩌겠냐는 말이었을까? 경제적 기반이 없던 연하와 결혼했으니 뭘 바라겠냐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냥 내뱉은 말이었을까. 복잡하고 멍한 마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남동생이 결혼하는 좋은 날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다.


엄마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 딸을 차별하기는 했지만 딸이라고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다. 반대하던 결혼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는 한국에서 하는 결혼이니 우리 쪽에서 결혼식 비용을 부담하는 게 맞다고 쿨하게 비용을 지불했고, 남편에게 눈치를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국에 처음 와 보는 시댁 식구들이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맛있는 식사 대접을 했고, 시동생들 선물도 꼭 사주라고 나에게 당부하며 챙기던 엄마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했던 결혼이었는데 남동생 결혼식날 한 엄마의 한 마디는 그 이후로 가끔씩 마음을 찌릿하게 눌렀다. 명치끝에서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와 타는 듯한 통증을 일으키는 역류성 식도염 같았다. 아꼈다면 좋았을 불필요한 말은 나와 엄마의 관계를 어느 정도 멀어지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맞다는 걸 그날 배웠다. 엄마의 말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더 잘 살고 싶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마의 쓸데없는 말 역시 오랜 기간 나를 괴롭히는 일이었지만 차마 글로 쓸 수가 없었다. 글로 써 버리면 잊고 싶던 기억이 명백한 기록으로 남을 것 같았고 가만히 두면 낫는 상처처럼 그날의 기억을 스르르 잊고 싶었다. 엄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고,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내 결혼기념일에 다시 기억이 떠오른 걸 보니 쉽게 잊힐 일은 아니었나 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내 운명을 언급한 엄마의 말은 분명 실언이었다. 엄마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쁜 말을 한 사람이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엄마였기에 이해하기 더 어려웠지만, 엄마도 완벽하지 않은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나는 만성 염증 같은 이 기억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잘 정리하기 위해 기록해 두기로 했다. 버릴 수 없다면 잘 담아 놓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어렵게 시작한 나와 남편의 결혼은 수많은 일을 겪고 20년을 채웠다. 앞으로 우리의 결혼이 어떻게 전개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서로의 말을 경청할 것이고 깊이 생각할 것이고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할 거라는 것. 엄마의 딸은 어떤 운명을 타고났던지 간에 운명보다 조금은 낫게 살 거라고 조용히 엄마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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