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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Jun 11. 2024

시키고 싶은 자와 하기를 거부하는 자(1)

Chore Wars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시키고 싶은 자와 하기를 거부하는 자.' 여기에서 '시키고 싶은 자'와 '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각각 누구일까요? 첫 번째 퀴즈는 다들 쉽게 맞추셨을 것 같아요. '시키고 싶은 자'는 저이고, '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바로 저희 아이들입니다. 이 문장에서 실종된 목적어를 찾는 게 두 번째 퀴즈입니다. 저는 과연 아이들에게 뭘 시키고 싶은 걸까요? '공부, 책 읽기, 운동?' 두~둥 정답은 바로 '살림'입니다.


5월 마지막주 3일간의 짧고 굵은 기말고사를 끝으로 23-24년 수업연도가 마무리됐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8월에 학년이 바뀌고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8월 둘째 주 개강 전까지 두 달 반가량의 긴 여름방학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는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종일반 여름캠프에 보내야 했습니다. 보통 스포츠 캠프, YMCA 캠프 등 저렴한 캠프 위주로 보냈음에도 엄청난 비용 때문에 여름만 되면 무척 부담이 됐습니다. 그 당시 제일 싼 종일반 캠프가 일주일에 500불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럴 거면 내가 왜 회사를 가나 할 정도로 월급이 제 통장에 아주 잠시 머물러 가던 시절이었지요. 


아이들이 다 큰 지금은 자기 관심분야를 확장시키기 위한 캠프를 갑니다. 큰 아들은 남가주에서 진행되는 운동 캠프를 6주 동안 가고 나머지 기간은 수학, 생물 공부를 하고 자기가 소속된 클럽에서 자원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아들은 현재 활동 중인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10일간 콘서트 여행을 갑니다. 투어 가기 전 6일 동안 매일매일 아침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리허설을 합니다. 투어 기간 10일 중 콘서트를 4회나 진행하는 빡센 일정이라고 하네요. 남은 방학 동안에는 새로운 곡 연습도 하고 다음 학기 배울 화학과 수학을 미리 공부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여름 계획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제가 이제 하루 세끼를 해야 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원래 요리를 잘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제 주종목은 한식인데 아이들은 매일 한식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점심, 저녁을 하고, 아이들이 아침을 준비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토스트나 달걀 프라이만 먹어도 상관없으니 한 명은 아침 식사 준비를, 다른 한 명은 설거지를 1일 1회 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이런 제안을 한 것도 있지만, 큰 아이는 내년 여름이면 이제 집을 떠나니 자기 밥은 자기가 차려먹는 것에 익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줄리 리스콧 하임스 박사가 쓴 "어른을 키우는 법 (How to raise an adult)"라는 책에 보면 아이를 집안일에 적극 참여시키면 책임감과 협동심을 기를 수 있다고 합니다. 몇년 전 저희 동네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하임스 박사의 북투어에서 박사님을 직접 만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를 아낄수록 집안일을 많이 시켜라"는 박사님의 말씀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엄마들이 엄청 환호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특히 "하기 싫지만 참고 해내는 힘을 기르는데 집안일이 큰 역할을 한다"는 점에 크게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름을 아이들 교육 기회로 삼고자하는 저의 숭고한 뜻은 제안과 동시에 와장창 깨졌습니다. 아이들의 반발이 예상을 뛰어넘었거든요. 제안 거부의 이유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너무 많다"는 겁니다. 이미 자기들은 '쓰레기통 비우기, 빨래, 밥상 차리기, 식탁 닦기, 잔디 깎기'를 하고 있어, '매일 아침 준비'는 무리한 부탁이라고 합니다. 눈치 빠른 저는 '이거 통하지 않겠다'라고 단박에 판단했습니다. 결국엔 '밥은 제가 다 준비하고, 아이들은 하루에 한 번 설거지'하는 수정안에 합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일단 물어는 봤잖아요. 에효~~ 앞으로 두 달 반 동안 삼시 세끼를 도대체 뭘 해줘야 할까요? 만들기 간편하면서도 애들 입맛을 사로잡을 레시피를 찾아 오늘도 인터넷을 헤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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