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소통을 이루는 장(場)으로서 미술의 가치
부지런함에는 벌이 스승이오,
민첩함에는 벌레가 더 빠르다네.
지혜는 더 높은 존재에 더욱 풍부하나,
예술은, 오! 인간이여, 당신 혼자만이 갖고 있다네.
― 프레데릭 쉴러의 <시> (Die Gedichete)
故 이건희 회장이 남긴 수많은 미술품이 큰 화제이다. 삼성가의 화려한 컬렉션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들의 눈길을 끌어왔다. 그중에서도 단언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림은 바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전에서 삼성의 비자금으로서 소개된 이 작품은 100억에 달한다는 그 엄청난 거래 가격으로 전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벌써 20여 년 전의 가격이니 지금 물가로 치면 200억쯤 될 것이다. 당시 <행복한 눈물>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대체 무엇이기에'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미술이 대체 무엇이길래' 시장경제에서 이 정도의 상품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당시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꽤나 부정적이었다.
20여 년 사이 미술시장은 크게 변화하였다.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유명한 작가의 진작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삼성과 같은 최상위 자산가가 아니더라도, 시장경제 전반에서 어느새 미술품은 엄청난 투자가치를 지닌 일종의 '상품'으로서 크게 각광받고 있다. 한때 '주식보다 미술투자가 좋다'는 말도 나왔을 정도이다. 미술품이 지닌 매력은 이중적이다. 투자가치를 지녀 금전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계량화되기 어려운 다양한 만족감까지 충족시켜준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서 오는 심미적 만족감, 예술을 향유하는 문화권력의 소유자라는 사실로부터 주변 사람들이 보내는 선망에 따른 사회적 만족감 등은 미술투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미술시장의 형성과 대중화는 미술에 대한 현대인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미술은 고차원적인 특수한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 부여가 가능한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미술은 독특한 재능을 지닌 작가의 창조물이다. 보통은 미술관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미술품은 일상생활과는 다소 동떨어진 존재로, 아름답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미술은, 내게 있어서 미술의 의미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미술은 '세상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열린 공간'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주체는 작가일 수도 있고, 관람자일 수도 있다. 하나의 미술 작품을 접하는 자는 그를 통해 타자의 생각과 만나거나 자신의 생각과 만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관람자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생각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때 관람자가 파악하는 것은 작가가 의도했던 내용 그대로일 수도 있고, 자신의 고유한 시각을 투영한 내용일 수도 있고, 또는 비평가와 같은 제삼자의 영향을 받은 내용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은 미술이라는 교차로 위에서 서로 마주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술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 자아와 타자를 확인하며 그들이 모두 공존하는 인간 세상을 확인하는 열린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바로 빈 센트 반 고흐의 <끈이 달린 구두>라는 그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하이데거, 샤피로, 데리다의 논쟁이다. <끈이 달린 구두>는 고흐가 캔버스에 낡은 구두를 그린 정물화이다. 고흐 특유의 두꺼운 붓터치가 잘 살아있기는 하지만 얼핏 보기에는 명작으로 보기 어려운 이 작품이 유명해진 것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를 통해서이다. 하이데거는 저술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이 그림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일상생활의 구두가 아니라 농민의 삶과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구두인 것이다. 이를 통해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 속에서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다양한 생각을 피력한다.
그런데 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묘사에 대해 미술사학자 샤피로가 반기를 든 것이다. 샤피로는 그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것이 아니라 몽마르트르 언덕을 밟던 고흐 본인의 구두라고 주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주장 속에 당시 나치가 선전하던 '대지와 농민의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구두가 농촌에 속한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피력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두 사람의 '싸움'을 본 데리다는 어느 주장도 사실이 아니며 어느 쪽이 명백히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로 논의의 장을 더욱 확장시킨다. 데리다는 샤피로가 하이데거의 논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샤피로의 주장을 일축하며, 하이데거가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으로서의 '해석학'에 대응하여 자신의 고유한 '해체론'을 주장한다. 세 명의 걸출한 학자가 평생에 걸쳐 형성한 사고방식은 이렇게 고흐가 구두를 통해 제공한 열린 공간을 매개로 하여 서로 만나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앞서 말했듯, 미술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자신을 확인하고 또 상대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의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개인은 자신의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내게 있어 미술의 가장 값진 의의는 바로 이 소통적 가치에 있다. 따라서 미술은 작가와 관람자 모두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해하며 수용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을 접하는 최초의 방식은 대개 학교라는 미술교육이다. 그것은 보통 제도권에서 형성된 틀 안에서 교사가 주제를 제시하고, 학생들은 이에 따라 작품을 만든 후 그에 대한 점수를 부여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점수의 부여기준은 교사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대개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에 좋은 점수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이 '재능'을 지니지 못한 사람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아름다운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특수 활동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미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작가가 작품 속에 담아낸 자신만의 생각과 그것이 관람자들에게 주는 다양한 울림 속에 있다. 물론 창의적인 생각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되는지, 얼마나 독특한 울림을 주는지 또한 미술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흔히들 '아름답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현대미술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게 있어 미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리고 '소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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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다음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옮김, 예경, 2005.
박정자, 『빈센트의 구두』, 기파랑, 2005.
사카이 다케시, 『니체의 눈으로 다 빈치를 읽다』, 남도현 옮김, 개마고원, 2005.
움베르토 에코, 『미의 역사』, 이현경 옮김, 열린책들, 2004.
진중권,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