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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연 Aug 16. 2021

벚꽃동산에 열린 여섯 개의 감

목계, <육시도(Six Persimmons)>, 료코인, 교토

K에게 


아침에 보내준 메시지에 답장을 쓰는 대신 펜을 들었어. 지금 내가 산이라 인터넷이 잘 되지를 않네. 오늘은 새벽부터 신칸센으로 도쿄에서 교토까지 이동한 후 버스로 1시간 동안 산길을 올라오는 험난한 여정을 보냈어. 지금은 다시 교토로 내려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 워낙 외진 곳이라 배차간격이 상당하네. 캐리어 윗면을 책상 삼아 쓰는 글이니 울퉁불퉁한 글씨는 용서해줘.


논문 심사가 코앞이라고 같이 점심도 못 먹었는데 또 일본에 왔다고 해서 조금 놀랐지? 이번 논문에 들어갈 목계의 <육시도(여섯 개의 감)>라는 그림이 공개된다고 해서 조금 무리를 했어. 직접 보지 않은 그림을 논문에서 다루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여기는 MIHO 미술관이라고 하는 곳인데 무려 신흥종교 단체의 교주가 세웠대. 그래서 공간을 다루는 스케일이 엄청난데, 산 전체를 미술관의 일부로 쓰고 있어. 버스에서 내리면 우선 벚꽃이 가득 이어지는 산책로를 한참 걸어야 해. 중간에 커다란 터널이 한 번 나오는데 반대편 구멍을 통해 저 너머로 시라가키 산이 한눈에 들어와.



터널의 끝은 기둥도 없이 위태로운 모양새로 계곡을 연결해주는 다리로 이어지지. 그 다리를 건너면 그제야 일본 전통가옥 특유의 기와지붕을 연상시키는 작은 건물이 하나 보여.



고생 끝에 도착한 게 이렇게 작은 건물이라고 잠깐 방심하면서 안으로 들어오면 밖에서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어. 내려갈수록 점점 커지는 내부 공간은 유리 지붕을 통해 시라가키 산골과 연결된 덕분에 자연과 예술을 동시에 즐길 수 있지. 전시관 입장 대기줄에서 브로슈어를 읽어보니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로 유명한 I. M. 페이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모티프로 해서 건물을 지었대. 왠지 별세계에 온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일까?



 

시라가키는 원래 도예로 유명한 곳이야. 그래서 MIHO 미술관을 여기에 세운 걸지도 모르겠어. MIHO는 다도용품 컬렉션으로 유명하거든. 내가 다도 전문 미술관까지 와서 그림을 보게 된 것은 일본에서 <육시도>라는 그림을 다도용품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야. 사실 <육시도>는 미국의 동양미술사 책에서는 유명한 작품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작품이야. 먹의 농담 변화와 구도의 미묘한 차이만으로 여섯 개의 감을 표현한 이 그림은 분명 기교 없는 치졸한 소품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거야.


목계(牧谿), <육시도(六柿圖)>, 13세기 후반 이후, 종이에 수묵, 36.0×38.0cm, 교토 료코인


그런데 흥미롭게도 서양에서는 이 작품을 아주 모던한 예술적 경지로 이해했더라고. 1920년대 이후 이 그림을 접한 서양인들은 이미 13세기에 모더니즘을 달성한 듯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어. 그림을 그린 이가 천재적이고 기이한 승려화가라는 설명 때문에 신비감은 더욱 고조되었을 거야. 감이라는 과일이 서양에서 그리 친숙한 과일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이런 신비감에 한몫했을 거고. 선불교에 영감을 받던 20세기의 서양인들에게 <육시도>의 미니멀리즘은 선문답의 짤막하면서도 강렬한 경구처럼 다가왔던 거지.


 정작 일본 사람들에게 이 그림은 정말 ‘감’처럼 생각된 것 같아. 기록에 따르면 16세기에 센노 리큐라는 다인(茶人)이 <육시도>를 벽에 걸고 가을밤에 모임을 가진 적이 있어. 내 눈길을 끈 건 그날 낮에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접했다는 사실이야.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을 모실 때는 자리에 맞는 최고의 기물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물건을 빌리거든. 그러니까 리큐는 히데요시를 대접할 도구를 빌려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감사의 자리를 열었고, 그런 마음을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해 목계의 감 그림을 걸었던 게 아닌가 싶어. 왜냐면 이때 감은 귀한 음식이라 선물용으로 많이 쓰였거든. 오다 노부나가가 총애하는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감을 선물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할 정도니까.




그래서 이렇게 사람마다 평가가 극을 달리는 그림을 직접 본 나의 소감은 어떠냐고 넌 묻겠지. 어차피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린 단순한 그림인데 굳이 산 넘고 물 건너까지 와서 들여다보는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직접 실물로 그림을 보는 것과, 복제된 이미지로 접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복제된 이미지가 포착할 수 없는 물성을 파악할 때 비로소 그림에 한 발짝 다가간 기분이 들거든. 공간 속에서 그림이 발하는 존재감, 오래된 종이 특유의 세월감, 먹이나 인장의 미묘한 빛깔, 그들이 종이와 이루는 관계와 같은 물리적인 속성 따위의 것들 말이야. 그림도 결국 본질은 ‘오브제’니까.


오늘도 고생은 했지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해. 벽에 걸린 그림을 직접 보니까 느낌이 많이 달랐거든. 상상했던 것보다 꽤 큰 느낌에 우선 놀랐어. 분명 수치로 그림의 크기는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정말 중근세에 그려진 작품이 맞는 걸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어. 종이의 빛깔이나, 그 위에 착 가라앉은 먹의 묵직한 느낌을 보면 확실히 오래된 그림은 맞아. 이 그림과 관련해서 내가 찾은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세기 말인데 그보다 후대에 그려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리고 다도구로서 벽에 걸린 모습을 보니 왜 일본인들이 이 작품을 크게 주목하기 어려웠는지도 이해가 가고. 종이 자체의 색이 생각보다 많이 진한 탓에 책에서 본 것처럼 먹빛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느껴지지는 않더라고. 물론 갤러리스코프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섬세함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 은은한 빛 아래에서 차를 마시며 벽에 그림을 걸어둔 상황이라면 그런 식의 관찰은 불가능하지. 이렇게 당시의 사람들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에서 그림을 보고 그들의 마음으로 그림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조금이나마 이 학문을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일 거야.

 



이제 버스가 온다. 오늘 느낀 내용을 논문에 잘 담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을 빌어줘!


2019년 4월 20일

MIHO미술관에서

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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