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일기 07.
최근에 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영희와 영옥 편이 자꾸 머릿속에 맴맴 돌았다.
그 에피소드를 보며 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그 모든 것에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번에도 거의 대부분 모두가 그 편을 보고 울었다.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모두’라기보다 가족에 대한 부채감을 품고 있음과 동시에 외면하고 있는 ‘그’ 모두를.
영희와 영옥 편은 장애가 있는 가족을 다룬 사회적 메시지가 뚜렷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일반 가족들에게도 대입해 볼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일반 가족’이라는 게 어디 있어. 다 같이 똑같은 가족이지.
8남매 중 둘째인 우리 아빠에게는 소아마비에 걸린 동생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한 동생의 등하교는 아빠의 몫이었다. 삼촌이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빠가 등에 엎고 다녔다고 했다. 정릉 그 동네에서는 유명한 8남매 집안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여전히 넷째 삼촌 이야기를 하면 눈물바람이다. 큰 아빠, 고모들, 삼촌들은 아빠에 비하면 꽤 냉정한 사람들인데 아빠가 유독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릴 적 명절에 큰 집에 모여 주안상을 거실 한가운데에 차려놓고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성이 오고 갔다. (그 자리엔 없던) 넷째 삼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모들은 삼촌이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해 답답해했고 그 불만에 대한 방패막이가 되었던 건 우리 아빠였다. 아직도 아빠의 목울대가 뻣뻣하던 그 목소리가 선명하다.
“경원이가 저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경원이 학교 다닐 때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피 철철 흘리고 있을 때 니들은 뭐했어? 내 등에 업혀서 경원이 피가 바닥에 빗방울처럼 떨어졌어. 니들은 경원이가 동생인 게, 형인 게 창피했잖아. 쟤라고 번듯하게 두 다리로 걸으면서 사회생활 안 하고 싶겠어? 좋은 색시 만나서 결혼 안 하고 싶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그럼 안 되지.”
우리들의 블루스 15회에서 영옥의 눈에 분노와 슬픔이 담긴 눈물의 대사가 그랬다.
“내가 아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제발 영희 같은 애를 낳아라, 아니면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거나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나 돼라… 억울해. 왜 나한테 저런 언니가 있는지, 억울해. 근데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영희는 저렇게 태어난 게 얼마나 억울하겠어.”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혹은 외면하고 싶은 나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근육이 점점 퇴화하고, 기력이 떨어져 조금만 격한 움직임에도 근육이 마비되는 열다섯 살짜리 우리 집 강아지. 정해진 시간 없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뒤틀리면 그도 겁이 나 사람이 울부짖듯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낸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병원에서 응급으로 처방해준 상비약을 먹이고 근육 마비가 진정될 때까지 품 안에 꼬옥 안고 달래는 일 뿐이다. 내가 일을 나간 시간 동안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눈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귀가 잘 들리지도 않는 우리 집 강아지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 많은 것도 알고 있다. 가장 두려운 건 늦게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 강아지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다.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다. 새벽녘 눈을 뜨고 몸을 쭉쭉 뻗고 자는 강아지 심장에 손을 얹는다. 따뜻하게 뛰고 있는 그 순간 나는 크게 안도를 한다. 그럼에도 내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건 이 친구의 외로움. 혼자 있는 긴 시간 오로지 나만 기다리며 잠만 자는 게 전부인 우리 집 강아지의 외로움을 나는 애써 외면 중이다. 외면하지 않으면 나는 사회 밖으로 나갈 수 없을 테니까.
그다음이 아빠와 엄마, 남동생이다. 우리 가족들은 그래도 꽤 행복했다. 꽤 수준이 아니라 화목하고 사랑이 많은 집이었다. 활동적인 엄마와 아빠 덕에 어릴 적부터 많은 곳들을 놀러 다니며 여행의 즐거움을 이르게 느꼈고, 동생과 나는 사랑을 듬뿍 받아 주변 친구들에게 그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물론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기 전까지의 일이지만. 우리 가족들은 나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싸가지가 없다’라고 말한다. 냉정하고 냉소적인 내 표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빠의 외로움과 엄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그리고 헛된 희망 같은 걸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장녀로서의 ‘중재’ 역할 같은 걸 바라고 있지만(물론 그 역할을 안 했던 건 아니다) 더 이상은 하지 않는 중이다.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테고.
동생의 불행을 외면하고 (싶) 있다. 별 볼일 없는 동생과 결혼해준 올케에게 고맙고 미안하지만 동생이 현재 처한 상황을 가급적이면 돌아보려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나의 태도를 엄마가 오히려 더 불안해하고 있지만.
자의로 책임에서 멀어지는 일은 마음이 저리다 못해 쓰라릴 지경이다. 주변에서 모질다고 손가락질해도, 싸가지 없다고 욕을 해도 나는 가족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멀어질 거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으니까. 지금도 들려오는 가족의 불행한 상황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슬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냉정하고 모진 큰 딸이자 누나가 될 생각이다. 마지막의 순간에 내가 가장 후회하고, 가장 많이 아플 건 확실하지만.
아이러니 한 건, 이런 내게 꿈같은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심리상담을 몇 회 간 받았는데 그때도 가족들 이야기로 울기만 하느라 거의 말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 동안 계속 울기만 하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어렵게 입을 뗐다.
“좋아하는 사람과 저녁을 함께 먹었던 날이었어요. 밥을 먹으며 가족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더라구요. 사랑을 많이 받았대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나도 내가 사랑을 줄 수 있고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요. 이상하죠? 가족이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다고 여태까지 눈물바람이었으면서 이런 제가 가족을 만들고 싶다니요.”
그러자 선생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거 되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당신이 받지 못한 걸 마치 보상심리인 것처럼, 본인에게는 그 마음이 간사하고 가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좋은 가족을 만들 수 있어요. 아파봤잖아요, 가족 때문에 힘들어도 봤던 사람이니까 누구보다 신중하고, 예쁘게 가족을 꾸릴 거예요 당신은.”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 건 가족을 위한 이유도 어느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자랑이었으면 하는 마음, 조카가 갖고 싶다는 건 고민 않고 다 사주고 싶은 고모의 마음, 동생에게 한 순간만이라도 자랑스러운 누나로 보이고 싶은 알량한 그 마음.
참 시시한 이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