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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Sep 28. 2022

오늘의 일기

통역을 마치고

지난주 금요일, 교장 선생님께서 메일을 보내셨다. 혹시 화요일 아침 7시 반에 있는 학부모 면담에 통역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봄에 전학 온 한국 학생의 부모님과 하는 면담이라고 했다. 

‘네? 7시 반이요? 서둘러 도시락을 챙기고 시아랑 한참 옷 입어라, 밥 먹어라, 머리 빗자, 씨름할 그 정신없는 아침 시간 말씀이시죠?’ 혼자 핸드폰 화면에 대고 중얼거리다가 남편과 일정 조율 끝에 알겠다는 답을 남겼다.

드디어 화요일인 오늘 아침, 다행히 늦지 않게 회의실에 도착했다. 부모님과 교장 선생님은 물론, 심리 상담사, 간호사, 카운슬러, 각 과목 선생님 이렇게 10명이 넘는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굉장히 본격적인데?’ 앗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미팅 성격에 대해 조금 더 물어봤어야 하나 후회가 됐다. 그나마 습관처럼 필기도구와  아이패드를 들고 갔다는 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알고 보니 투렛 증후군을 앓는 학생을 위한 미팅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덜컥 겁부터 났다. 간만의 통역인데 괜찮을까? 의료 용어가 많이 나오면 어떡하지?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는 거 알잖아?' 부모님의 비장한 표정과 선생님들의 상냥한 표정을 버팀목 삼아 마음을 다잡고 통역을 시작했다.

미팅은 한 시간 정도 진행됐다. 잠깐씩 머리가 멍해지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다시 집중했다. 노트테이킹을 하면서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틱 때문에 한국에서도 학습 공백이 많아 공부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는데 언어장벽이 있다 보니 더욱 어렵다는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라 다행히 아주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먼저 학군 담당 간호사가 부모님 동의를 구하고 학생의 건강 상태를 논의한 내용이 담긴 메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셨다.
교장 선생님의 진행으로 각 과목 선생님들께서는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는 본인이 관찰한 바와 부모님께 궁금했던 점을 상세하게 함께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전해주셨다.

모두가 입을 모아 부모님과 학생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중에서도 사회와 역사와 영어를 다 가르치신다는 선생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분 본인도 아마도 이민 1.5 혹은 2세대 같아 보였는데 하루에 세 시간이나 그 친구를 봐서 책임감이 막중하시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여셨다. 본인 역시 영어를 배울 때 텔레비전을 많이 봤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 건 어떻겠냐, 설명서에 텍스트가 많이 나오는 보드 게임을 하시면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지금 <동물농장>을 읽고 있는데 워낙에 다층적인 작품이니 이미지로 이해를 도울 만한 만화를 보라는 조언도 더하셨다.



워낙 말수가 없고 영어에 불편함이 있다 보니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쉽다는 말 역시 여럿이 덧붙이셨다. 혹시 괜찮다면 증상을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를 말해도 되겠냐, 그 평가를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종합적인 플랜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평가도 플랜도 무엇보다도 모든 것은 부모님의 결정이다, 학교에서는 이런 부분을 도와줄 수 있고, 외부에서는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직 주치의를 정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원하시면 이 부분을 도와줄 만한 코디네이터에게 연락을 하라고 하겠다 등. 



이렇게 오간 많은 대화 중에 모두가 부모님을 대신하여 영어로 말하는 나에게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오늘 미팅을 위해 각자 여러 가지를 준비하신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간호사는 선생님들이 모두 참고할 만한 짧은 글을 작성해서 공유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심리치료사는 인지 심리 학습 평가 등 다면평가를 통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더했다. 학습 능력 함양(Study Skills)이라는 과목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그 친구가 이용하면 좋을 서비스 등을 추천해주겠다고 하셨다. 교장 선생님은 계속 컴퓨터에 타자를 치면서 액션 아이템을 받아 적으면서 중간중간 내가 통역하고 부모님과 상황을 공유하기 쉽도록 자연스레 진행을 해주셨다. 예의 바르고 똑똑한 이 친구가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한 마음으로 입을 모으고 있었다.

통역을 하다가 어머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가슴이 아려왔다. 어려서부터 약을 먹은 이 친구는 여러 약이 충돌해서 주의력을 향상시키는 약을 쓰지 못했고,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하기도 했다고. 틱 증상 때문에 필기하는 게 힘들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학습 공백도 있고 영어 장벽도 있고 자기를 이상하게 볼까 봐 말을 더 못 한다고. 자기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은데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한국에서는 어릴 때는 친구가 있었는데 상처를 많이 받고 이제는 남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부터 한다고. 그래도 아이가 학교를 좋아하고 친구들도 좋아한다고. 의사들이 하나 같이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으니 아이에게 스포츠를 권하는데 체육 선생님이 운동을 잘 권해주셔서 요새 달리기와 농구를 좋아한다고. 참 감사하다고.

오롯이 한 학생을 돕기 위해 학교에서 우리가 함께 돕겠다는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현장이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시아가 참 좋은 학교를 다닌다는 고맙고 뿌듯한 마음 역시 커졌다.  

선생님들께는 물론, 내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시는 부모님께 회의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면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딱 그 친구 만할 때 미국이 아닌 곳에서 미국 학교에 다니게 된 경험이 있어요. 그때 영어 때문에 정말 힘들었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새로운 나라에 와서 새로운 언어로 공부하고 생활하는 것은 정말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인데, 그 힘든 일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힘든 상황에서 열심히 해내는 그 친구는 정말 너무 대단한 거라고. 예전에 비슷한 상황에 있던 아줌마가 너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고 꼭 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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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전, 심플스텝스에서 영어 회화 수업을 시작하면서 네이티브가 아닌 영어 전문가(?)로서의 감상을 블로그에 영어 글로 남겼었다. 그 글을 쓰며 반평생을 시달려 온 영어 울렁증과 전학 첫날, 아무도 없는 복도에 덩그러니 서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막막했던 그 기억이 다시 살아났었다. 내 인생의 축복이자 저주였던 영어를 피해(?) 전혀 다른 전공과 직업을 택했지만, 결국 그 영어로 통번역대학원을 가면서 직업을 바꾸게 되었던 지난 시절의 나. 어제의 나에게 오늘의 내 말을 가만가만 들려주고 싶다.

“많이 힘들었지? 수고했어. 너 덕에 오늘의 내가 있어. 그리고 오늘의 나는 그때의 너보다 조금 더 힘들게 비슷한 상황을 살아내는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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