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ro영 Jan 23. 2024

1. 여유와 취향이 담긴 밀크티

내가 원래부터 취향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대의 나는 취향이 확고했었다. 인테리어랄지, 패션이랄지, 음식이랄지…회사 생활이 10년 이상으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은 취향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희미해지고 흔적만이 남아있다. 인테리어는 청소하기 편하게만 되어있으면 되고, 그마저도 안되면 그냥 쌓아두기 일쑤다. 패션도 정말 중요한 날과 아닌 날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서 평일 회사에서의 나는 더더욱 눈에 띄고 싶지 않은 회색인간이 되어간다. 음식이라…. 음식도 즐겨 먹지 않던 메뉴도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잘 먹게 되고, 회사 단체 예약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취향을 드러내는 게 귀찮을 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차 종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홍차, 녹차, 허브티 다양한 종류의 차 종류 중에서 나는 홍차에 우유를 넣은 밀크티를 가장 좋아한다. 찻잎도 다양하게 좋아하는데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티, 얼그레이티가 밀크티를 만들기에 무난하고 맛있다. 딸기나 바나나가 가향된 찻잎도 골라봤는데 고르는 재미는 있지만 금방 질린다는 단점이 있다. 밀크티용 우유를 끓이는 용도의 냄비인 밀크티팬도 소장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밀크티를 마시는 모습은 햇살 좋은 날 가만히 앉아서 티푸드가 올려져 있는 식탁을 한자리 차지하고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다. 밀크티를 테이크아웃 해서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나에게 밀크티는 여유의 상징인 셈이다. 특히 따뜻하게 마셔야 홍차와 우유의 풍미가 더 잘 느껴지는 것 같다. 데워진 컵 속에 황금빛 노을을 천천히 작은 은색 수저로 저어가면서 쿠키나 스콘과 함께 구름처럼 둥둥 흘러가는 시간을 한 모금씩 마시는 것이다.     


 그토록 완벽한 밀크티의 순간은 역시 홍차의 본고장 영국에서 느낄 수 있었다. 런던 근교에 코츠월드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풍경이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카페들의 밀크티와 스콘이 유명하다. 밀크티와 함께 티푸드로 부드러운 버터향이 가득한 스콘이 나온다. 세모난 빵인 스콘에는 우유를 끓여서 걸쭉하게 만든 하얀 클로티드크림과 향긋한 딸기잼을 발라 먹는다. 스콘은 잘 부서지는 질감 때문에 퍼석거릴 것 같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입안에서 살살 녹을 만큼 촉촉했다. 코츠월드의 스콘이 밀크티의 시간을 완성해줬다. 날씨가 좋아 꽃밭으로 둘러싸인 카페의 야외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스콘을 한입 베어 물었다. 카페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하늘만 봐도 행복했다.     


 그날의 영국의 작은 마을을 떠올려보니 역시 취향은 여유로움에서 온다. 사색하며 내가 좋아하는 걸 하나하나 손꼽아본 적이 언제인지. 10년간 경쟁하며 승진에, 자격시험에 고군분투하며 시간을 보낸 내가 기특하긴 하지마는 온전히 나를 위해 밀크티 한 잔 올려놓고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시간이 있는가. 그러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스타벅스 어플의 새로 나온 광고를 봤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폰트로 적혀진 ‘스타벅스가 선보이는 최적의 밸런스, CLASSIC MILK TAE’. 입구가 큰 얼음 위스키 잔 같은 유리잔에 담긴 밀크티 사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대체 어떤 맛이길래 최적의 밸런스라고 하는 걸까?’ 

회사 가는 길에 사서 가져가고 사무실에서 마셔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북적이는 일터보다는 조용히 나 혼자 마셔봐야지.

 다음날 퇴근 후, 유유히 스타벅스로 들어가 밀크티를 주문했다. 스타벅스 밀크티는 광고 속에 그 컵에 담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기대가 가득 차서 한 모금을 마셨지만, 생각보다 밍밍한 맛에 실망했다. “윽, 이건 내 취향이 아니야.” 함께할 스콘이 없어서일까? 여기가 한적한 런던의 코츠월드가 아니여서 그럴까? 내가 지금 해야 할 업무들이 많아서 밀크티의 맛을 못 느끼는 걸까?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밀크티를 홀짝댔다.     

 다음엔 차라리 일본여행 중에 마셨던 페트병 밀크티를 사 마시자. 일본에 유명한 오후의 홍차라는 밀크티가 있다. 투명한 500mL 페트병에 달달한 밀크티를 담아서 주로 차갑게 팔고 있는데, 요즘은 올리브영에도 입점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뜨겁게 데워 자리 잡고 앉아 마시는 밀크티는 아니지만, 오후의 홍차는 짙은 홍차 향과 부드러운 우유, 시럽의 달달함이 밸런스가 좋아서 한 모금만 마셔도 바쁜 일상 속 활력소가 된다. 밀크티를 테이크아웃해서 걸어 다니며 마시면 밀크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오후의 홍차를 들고 활기차게 걷는 모습은 묘하게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 이렇게 취향도 조금씩 바뀌는구나.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시 밀크티를 위한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나의 소중한 여유와 취향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정리와의 사투 : 정리를 못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