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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자연과 사람을 사랑한 화가

[너를 위한 미술사: 고암 이응노 이야기 ②]

첫 작품이 입선을 하기는 했지만, 그 7년 동안 내 그림은 완전히 죽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림을 모방만 하고 있었던 거지요. 대나무 가지 치는 것도 전통 방식으로만 애쓰고 있었어요. 선생님 그림 그대로 따라서 그렸으니, 모방에만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림이란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전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애써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답니다.  


조선미전에서 입선은 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일 년 반 정도 해강 선생댁에서 생활을 하다 나와서 혼자 자취를 하였습니다. 수완이 좋은 이응노는 지물포에서 종이를 사다가 자취방에서 그림을 그려 야시장에서 팔았습니다. 또 여관이나 기생집을 돌아다니며 시골 부자들이나 멋쟁이 신사들에게 그림을 팔았습니다. 해강 선생 제자라는 이름 덕에 그림 값을 제법 넉넉히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간판 일을 배워 아예 간판집을 차렸는데 그게 잘되었습니다.


전주로 내려가 정착하며 '개척사(開拓社)'라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회사 이름은 이응노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그는 일생 남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했습니다. 사업은 직원을 30~40 명 두고 전국에서 일감을 주문 받을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제법 큰 요리집도 하나 맡아 하면서 전주에서 유지라 불렸고 집안 빚을  모두  갚아 줄 정도로 생활은 안정되었습니다. 지역에서 는간판쟁이보다 명필이요 화가로 이름이 났습니다. 하지만 조선미전에서 첫 입선을 하고 난 뒤 7년을 내리 낙선을 하였답니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정작 하고 싶은 그림은 잘 되지 않았나 봅니다.

20대 이응노 모습, 이응노미술관에서 갈무리

젊은 나이였지만 지역 유지였으니 여기 저기 초대가 많았나 봅니다. 어느 날 이응노는 잔치 집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낙비가 내리고 바람이 몰아쳐서 대밭이 온통 술렁거리며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져 그야말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10년을 넘게 대나무를 그렸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대숲의 인상을 되살려 단숨에 석 장을 그려 전람회에 출품하였습니다. 세 작품이 모두 당선되었고 그 중 한 점은 특선이었습니다. 전주에서 입상 소식을 들은 이응노는 해강 선생에게 드리려고 멧돼지 뒷다리 하나하고 술을 사들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선생에게 그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말하니 무릎을 탁 치면서 "그거다. 바로 그거야" 하더랍니다. 

이응노, 청죽, 1931, 수묵담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이왕직 상 수상
이응노, 풍죽, 1932, 수묵담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무감사 입선작, 개인 소장
이응노,  매, 1934, 수묵담채 , 132cm×63cm, 개인 소장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낙선한 7년 동안 해강 선생 흉내만 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뒷날 그는 자신의 20대를 ‘모방의 시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간직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림이란 남을 흉내내는게 아니라 스스로 애써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어 있는 모방이 아니고 살아서 펄펄 뛰는 창조여야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더 공부를 해보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일본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시밭길 같은 창조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통을 바탕으로 했지만 전통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전통을 뿌리로 했지만 전통과 현대라는 울타리를 무너뜨리며 창조의 꽃을 피웠습니다. 일본과 유럽의 회화를 받아들였지만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창조해 나갔습니다.  

김규진,  묵죽도, 수묵담채 , 197.2cm×45.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응노, 묵죽도, 1976, 수묵담채, 133×69cm , 이응노미술관.그의 묵죽도는 대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이런 역동적이고 독창적인 대나무 표현은 말년의 '인간 연작'으로 이어진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 동양 화단에서는 전통적 관념 산수(觀念山水)는 시들어가고 사실적인 사경 산수(寫景山水)와 채색이 눈에 뜨이는 일본식 신감각주의가 맞서고 있었습니다. 조선미전에 첫 입선을 했던 1924년부터 1932년까지 8년 동안 그림의 경향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이광수(1892~1950)나 변영로(1898~1961)같은 지식인들도 서화를 선인들의 모방일 뿐이요 ‘시대정신’이 빠진 예술이라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이응노는 이 변화를 간파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서양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동양화는 새롭게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묵화류의 사군자만 가지고는 안 되겠으니 일본에 가서 현대미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33년 30세 되던 해에 전주 공회당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한학자 규원 정병조(葵圓 鄭丙朝, 1863-1945)로부터 '고암(顧菴)'이라는 호를 받습니다. 그것은 서화가(書畫家) '죽사(竹士) 이응노'에서 화가 '고암(顧菴)이응노'로 새롭게 출발하는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응노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전통과 단절시키지 않았습니다. 후에 현대적 추상 작업을 하면서도 거의 마지막까지 수묵화를 그렸습니다. 뒷날 프랑스에 정착해서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늘 구수한 충청도 말투로 "나는 충남 홍성 사람이여" 라고 말했답니다. 그만큼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 바탕을 확장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였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와 같은 스승 해강이 교통 사고로 사망하고 조선미전에서는 서화부도 없어졌습니다. 서화에 대한 인기도 서양화에 밀려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님도 돌아가시자 일본으로 가서 그림을 공부할 결심을 했습니다. 잘되던 사업을 정리하고 일본에 가서 그림 공부한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모두들 말렸습니다. 그러나 서른이 넘은 이응노는 그때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여든이 넘어서 한 어떤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명예나 물질적 풍요만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무모한 짓이 없었겠지. 그러나 사람이란 변화가 있어야 배우고 창조력이 생기고 발전이 있는 것이지, 그냥 돼지처럼 잘 먹구 생각 없이 살이나 뚱뚱 쪄서 살다가 죽으면 다른 동물과 무엇이 달러.” 


이응노는 태어나자마자 나라를 잃었습니다. 유교 사회의 존경의 대상인 임금을 잃었고 스승인 아버지는 식민지 현실에서 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유학자 집안에서 자랐지만 지탱해 줄 기둥을 모두 잃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상실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전환을 꿈꾸었습니다.기차 구경도 못한 시골 소년이 손에 6원을 쥐고 화가가 되겠다고 서울로 올라갔었고, 십여 년이 지난 뒤에는 새로운 전환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 시절과는 달랐습니다. 공들여 쌓아 놓은 안정된 생활을 스스로 접었습니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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