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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Nov 18. 2024

《길 위의 미술관- 나혜석 편》답사 후기

데일리 아트가 주관하는 『길 위의 미술관』 다섯 번째 나혜석의 길을 걷고자 나섰다. 분명 계절은 겨울인데 가을날 같은 온화한 날씨에 칭칭 동여맨 목도리가 무색하던 날이었다. 이번 가을, 단풍 구경도 못했다고 투덜대던 마음을 달래며 알록달록 가을색이 완연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교회로 향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모여 두런두런 얘기가 한창이다.


우리는 정동교회를 시작으로 3시간 정도 함께 했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나혜석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함께 한 대부분의 참가자가 여성분들이어서인지 해설자의 입을 통해 나혜석이 소환되면 우리는 구절 구절 탄식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같이 웃기도 하고 마음으로 울기도 하면서 최린을 질타하고 또 나혜석의 등을 토닥였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여하튼 남성 중심 사회구조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아서일 게다.

[길 위의 미술관 참여자들이 정동제일교회 앞에 모여 있는 모습]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화단의 선구자였으나 그의 인생을 여성화가로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 인생을 생각하면 ‘그녀’라고 하기보다는 ‘그’라는 대명사가 적합한 듯하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한 인생으로 화가로서 순탄하게만 살았다면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 것이고 현세 우리는 그의 작품만으로 ‘잘했네, 못 했네, 모자라네, 넘치네...’라는 품평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300여 점 정도 그렸다지만 그나마 화재로 소실되어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 그러니 그림 얘기보다는 그의 인생사에 당시와 같은 가혹한 시선과 잣대를 다시 들이대기 일쑤다. 하지만 문장가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여성 운동가로서도 그의 행보는 면면이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적, 사회적 자산이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식 사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그의 결혼은 참으로 떠들썩했다.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넷째,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일본 유학 당시 약혼한 사람으로 폐렴과 결핵에 시달리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함)


김우영과의 결혼을 승낙하면서 내세운 조건이다. 지금 결혼의 조건이라 해도 멈칫할 수 있을 법한., 그러나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한국 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하며 나혜석은 당당하게 요구한다. .

[길 위의 미술관 참가자들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정동 예배당을 시작으로 최린을 상대로 한 고소장이 접수되었던 경성지방법원을 지나 무려 5천여 명의 관객이 관람하며 성황리에 마무리한 전시회장 등 나혜석과 함께한 여정이 30분인 듯 세 시간이 흘러갔다.


근대기 여성으로써 그리 살지 않으면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던 시절 발버둥 치던 그를 최은규 해설자는 온몸으로 해석해 내며 100여 년 전 그의 공간에서 그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 동행의 길을 함께 하면서 나혜석을 한층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생각해 본다. 나혜석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행려병자로 쓸쓸히 허름한 옷(古衣)의 착의로 병원 관보에 기록되며 허망하게 떠난 고인, 그를 생각하며 연민의 마음으로 속상해하는 것을 그는 마땅치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글로써 그림으로써 목소리를 낸 여성 인권의 개척자다.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그런 그를 오늘 우리는 응원해 보자.

[자화상, 1928년 경, 캔버스에 유채, 88×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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