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민족이 아픔을 겪고 있을 때, 서민들의 아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화가가 박수근이라면, 70~80년대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민중과 노동자의 아픔을 대변해 준 화가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오윤(1946~1986)이다.
그가 40세에 타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동료들은 「오윤전집」에 기록했다. 그가 다시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의 추모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는 바람처럼 갔으니까 언제고
바람으로 다시 올 것이다
험한 산을 만나면 험한 산바람이 되고
넓은 바다를 만나면 넓은 바다의 바람이 되고
혹은
칼바람으로
풀잎은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우리에게 올 것이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 정희성, 오윤 추모비에 새긴 시 중에서
그를 아꼈던 동료들이 그를 다시 소환하는 것은 시대를 저항하는 예술가로 오라는 의미가 아니다. 산 바람으로, 바다 바람으로, 부드러운 바람으로 그가 그토록 아꼈던 이 조국을 구경 삼아 오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요즘 그의 작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 70~80년대 저항의 시대에만 필요할 줄 알있던 그의 저항적 예술혼이 지금 다시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오윤이 누구인가? 화가로서 1986년 한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술로 인해 간경화가 도져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등장하는 그의 판화는 알 것이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중략)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중략)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라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에서
그는 1946년 해방 이듬해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갯마을』의 소설가 오영수이다, 오윤은 유년기를 아버지가 미술교사로 근무했던 부산 경남여고 관사에서 보냈다. 그의 유년기는 해방 이후의 극심한 혼란과 연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매우 어두운 시기였다. 부산에 내려온 피난민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했다. 소설가이며 미술교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미술에 대한 눈을 뜨도록 보살펴주었다.
오영수가 1955년 『현대문학』 창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자, 가족은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한다. 집 벽에 사람 얼굴을 소조해서 부친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오윤은 미술가로서 꿈을 키운다. 195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부속중학교, 1961년 부속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 누나 오숙희의 소개로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지하, 김정남, 염무웅, 김중태 등과 알게 된다. 이들의 영향으로 1965년 서울대학교 미대 조소과에 입학하고 김지하가 주도한 '현실동인'에도 함께 참여한다.
김지하는 오윤의 작품 전반에 나타난 생명 사상, 민중 의식, 문명의 배제를 통한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지하의 저서 중 대다수는 오윤이 그린 삽화로 채워졌다. 한 사람은 문인, 한 사람은 화가였지만 시대를 공감하는 안목은 다르지 않았다. 문학과 미술이 사회와 역사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지가 대학 시절 김지하와 오윤의 주된 관심사였다.
대학 시절,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 서민의 놀이인 '민중 연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연희패들과 어울리면서 전통 민속놀이와 탈춤에 깊은 흥미를 가진다. 이것은 이후 그의 작품 주요 소재가 된다.
1969년 김지하와 함께 결성한 그룹 '현실동인'이 전시회 한번 못하고 좌절되자, 그는 기존 미술의 창작과 발표에 한계를 느끼고 미술계를 떠난다. 친구인 윤광주와 함께 경주의 전돌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2년 만에 문을 닫는다. 그러나 오윤은 경주의 풍부한 유적을 접하면서 신라의 미술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다시 상경하여 벽제에서 전돌 공장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테라코타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시기 서울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구의동 지점 내벽과 상업은행 동대문 지점의 외벽 부조 벽화를 제작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멕시코 벽화운동과 중국의 판화운동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혁명 정신을 미술적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민중의 침략과 전쟁, 내란등 복잡한 멕시코의 근대사를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성취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초기 작품 <폭력에 짓밟힌 사람들>과 <기마전>은 멕시코 벽화 운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호인 루신(魯迅)이 주도했던 중국 목판화 복사본을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심이 그의 미술 인생에서 캔버스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된 기초가 된다.
판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오윤이 표현하고자 했던 민중의 현실을 나타내는 데 적합했다. 목판화로 창작과 비평사, 청년사 등의 책 표지 그림을 많이 제작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목판화의 예리한 칼날에서 오는 강렬한 미학은 민중들의 삶과 주장에 대한 메시지를 힘 있게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다.
오윤은 선화예고와 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도 <할머니>, <애비>등 많은 작품들을 제작하게 된다. 친구와 술을 좋아했던 그는 간경화로 1개월 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전라남도 진도로 요양을 떠난다. 진도에서는 진도 문화에 흠뻑 빠져 진도문화재전수회관에서 판소리와 육자배기를 듣고, 북춤을 배우고, 굿판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오윤은 간경화를 서양의학으로 치료하는 것을 거부하고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한다. 퇴원 후 상경하여 걸개그림 <통일대원도>(1985)를 제작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1986년 5월에는 생애 첫 개인전 《오윤 판화전》을 그림마당 민에서 개최하고 판화집 『칼의 노래』를 출간한다. 같은 해 7월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되어 사망한다.
미술평론가 성완경은 “오윤은 힘의 화가이며 작품에는 힘이 있다. 힘이 있다는 것은 맥이 있다는 것이고, 오윤의 예술의 생명은 바로 맥을 짚고 그 맥을 살려내는 화가라는 데 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저항하는 예술 ⑨] 박노해, 김지하의 삽화를 그린 민중미술의 One Top, 오윤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