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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운 Aug 14. 2023

11.1 얼음땡

고삐는 풀린다


1 플래시 / 사람들, 뉴스, 온라인, 신문, 전광판, 유튜브..

(앵커/기자/유투버) 옥수역 폭발물 설치 용의자가.. 경찰은 옥수역 CCTV에 잡힌 용의자를 특정하고, 즉시 일반에 공개 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영상이 지난 12일 저녁 8시 20분 경, 옥수역 물품 보관함에... 모자를 썼지만, 외국인으로 보이는 체형과 독특한 걸음걸이를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씬 2 경찰서, 휴게실, 뉴스 시간, 분위기 심각

기자 옥수 경찰서는 오늘 오후 3시, 옥수역 폭발물 설치 용의자의 CCTV 영상을 공개한지 3시간만에, 미국계 한국인 A씨의 신병을 확보하고,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A씨는, 인근 용산구의 한 고시원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의 외국인으로, 아직 구체적 범행 동기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2 와, 존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설마, 아니겠죠?

경찰1 아니긴. 민간인도 아니고, 윗층 형사들이 맞다는데 어떻게 아니야? 참, 세상이 어찌 될려고..

경찰3 뭔가 잘못된거에요. 존 형 사람 좋은데..

경찰1 빨리 잡았으니까 다행이고, 조사해 보면 알겠지. 네 말대로 뭐가 잘못된거면 잘못 된 거 밝히고, 저 놈 맞으면, 우린 십년 감수한거고.

경찰3 십년 감수요? 우리가요?

경찰1 야, 생각해봐. 존이 식사 배달한다고 여기를 얼마나 들락거렸어? 저걸 여기서 터뜨렸어봐, 개망신이지.

경찰2 것도 아찔하네요.. 어우, 역시 세상은 무서워.

경찰3 사람이 무서워요. 진짜 존이 그런거면, 믿을 사람 하나도 없는거야.


3 옥수 경찰서 조사실

경찰과 얘기 중인 존 바울, 밖에서 지켜보는 시환


형사1 (사진, 지하쳘 CCTV 영상) 이 사람, 본인 맞죠?

예, 맞습니다, 저에요. 그런데 전 진짜 그게 폭탄인거 몰랐어요. 알바하라고, 5만원 줘서 배달 했어요.

형사1 누구에요, 시킨 사람이?

노래방에 찾아와서, 급한 일이라고, 대신 가져다 놓으라고 했어요.

형사1 이름이나 연락처는요?

그건 몰라요. 사물함에 넣고, 비밀번호 2023 하라고 했어요.

형사1 찾는 사람이 어느 사물함인지 어떻게 알아요?

요만한 스마일 얼굴 스티커 주면서, 물건 넣은 사물함에 붙여 놓으라고..그래서 문에 붙여놨어요.

형사1 얼굴은요? 생긴거나, 흉터, 치아, 하다못해 입냄새, 목소리나, 키..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모자 썼어요, 단골 손님은 아니고, 잘 못 보던 얼굴이에요.

형사1 아무거라도 생각해봐요. 아니면 아저씨가 이거 다 덮어 써요. 증거가 없잖아, 누가 시켰다는?

노래방 CCTV 있어요, 길에서 들어가는 입구에.

형사1 안그래도 다 가져왔어요. 우리도 그거 들여다 보겠지만, 모자 쓰고, 위아래 검은 옷, 짦은 머리.. 그거 가지고는 아무도 특정 못해요. 돈도 현찰 받았다지, 휴대폰으로 문자 주고받은 것도 없지.. 어쩔려 그래요?

(좌절) 아, 저는 정말.. 5만원 받고..


/INS/

시환 저 분 옷 다 수거해서, 몸이랑 화약 반응 검사해 보면..  

형사2 (씁쓸) 다 가져왔죠. 근데 그런거 안해도 저 사람 아닌거 알아요.

시환 어떻게..?

형사2 고시원에 갔었어요. 그런 코딱지만한 방에서, 사재 폭탄을 만들 방법이 없어요. 옆방에 화약 냄새도 많이 날거고.. 거기다 하루 종일 식당이랑 노래방에 있던데, 어디 다른 곳에 비밀 아지트가 있을 것도 아니고요.

시환 그럼 시킨 놈이 있다는 거, 아시는거죠? 저 분은 죄 없고..

형사2 완전히 없을 수는 없죠. 사람이 다쳤는데.. 최소한 둘이 공범이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야 하고... (시환 한숨) 이거 정말, 어떤 놈인지.. 폭탄 만든 놈 몽타주라도 따야 되는데..


CUT TO

키는 중간, 나보다 작고요, 빼빼는 아닌데 날씬해요. 그리고, 그리고.. 어려요, 젊고..

형사1 10대? 아니면 20대?

모르겠어요, 여드름 좀 있었고... 아저씨 느낌은 아니야, 학생 느낌도 아니고..

형사1 직장인 같애요?

아니요.. 그런거 아니고..  

형사1 아, 그럼 뭐에요..?

나 처럼, 아마 알바생 느낌..? 백수..?

형사1  (어이없음) 생긴게 백수로 생겼어요? (후우..) 그럼, 손 봤죠? 물건 건네 받을 때, 손에 뭐, 흉터나, 뭐 문신, 글씨.. 뭐 없었어요?

 아, .. 손


/INS/ 상자가 담긴 종이 봉투를 건네는 남자 손, 곧이어 5만원 내밀고


 손이.. 특별한 거는 없었는데.. 그냥 남자 손..인데, 작아요. 여자처럼 작고 깨끗하고..

형사1굳은 살이나, 기름때나 이런거 없어요? 불에 데인 자국이나..

아니요, 못 본 거 같은데요..


/INS/ 시환, 형사 2 실망, 시환 문자 지징...


시환 (확인하고)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분, 잘 부탁 드립니다. 나쁜 사람 아니에요. 변호사나 다른 거 필요하시면,  저한테도 좀, 알려주십시오.

형사2 걱정마세요. 좀 더 알아보고, 화약 반응 안 나오면 아마 훈방 조치 갈 거에요.

시환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협조하겠습니다.

형사2 예, 수고해요

시환 수고하십시오 (꾸뻑.. 발걸음 안 떨어지고)


4 옥수 경찰서 주차장/ 시환 차


시환 (전화 걸고) 예, 삼촌. 왜요?

서장 쉬는 날이지? 잠깐 병원가서 이 팀장이랑 교대 좀 해. 금방 가지?

시환 한 20분?

서장  그래, 얼른 가. 그리고... 너, 옥수역 폭발물 용의자, 네가 책임지겠다 그랬어? 연락처에 네 이름하고 전화번호 써놨다며?

시환 .. 아, 그거..

서장 너, 이 자식아. 그렇게 사람 막 믿는거 아니랬지? 네가 아는 사람은 다 모범 시민이고, 좋은 사람이고.. 세상이 그렇지 않아! 뭘 믿고 그렇게 자신을 해?

시환 아이, 존은 진짜 아니야. 진우 형도 알어. 진짜 누가 시킨 거, 심부름만 한거야.  

서장 빠져. 너네 둘 다, 절대 관여하지마.

시환 도와줘야돼요.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서장 니들은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경찰이야. 그래서 안돼. 사건은 전적으로 옥수에서 알아서 하는거고, 그쪽으로 숨도 쉬지 마. 쳐다보지도 말고. 알았어? ... 너 지금 어디야? 옥수서에 가있어?  

시환 (당황) 아니, 무슨.. 아니에요.. 시장 ..왔어요. 송이 사료가 떨어져서.

서장  지금 고양이 밥 사러 다닐... (꾹참) 어이구, 혼자 사는 사내 자식이 그런 거나 키우고.. 청승이냐.. 시간이 남아 돌지, 아주.. (시환 눈치) 빨리 병원으로 가. 이석호 밥이나 먹이게.

시환 (시계보고) 무슨 밥을 벌써 먹어? .. 아, 점심인가..?

서장 아무때나 먹으면 되지, 뭐 시간 정해져 있어? 샤워라도 하고 나와야 할 거 아냐. 얼른 가. 석호한테는 내가 전화할께.

시환 예... (끊고, 안도, 운전)


5 대로변, 발렛 파킹, 대형 호텔 한식당, 석호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고


CUT TO 윗층. 잔잔한 음악, 여자, 카페트, 방으로 안내하고, 석호 여자에 목례, 복도에서 문 열고


CUT TO 방 안. 문 열리며 석호 정면 보고, 표정 변화없이 굳은채 서있고


CUT TO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 – 서장, 석호 부모 – 석호를 돌아보고


서장 (오바 웃음, 일어나며) 어, 이 팀장. 시간 딱 맞춰서 왔네. 앉아

(석호 내키 않아 멀히 서서 생각 중)

석호 모 (미소 가득) 앉아. 내가 부탁드렸어. 아들을 티비로만 보려니 억울해서.

서장 (일어나 테이블로 석호 데려가고) 나는 다른 선약이 있어서 가봐야하니까, 가족끼리 오붓하게 식사해.

석호 모 감사해요, 서장님. 어려운 자리 만들어주셨어요.

서장 아닙니다. 귀한 아드님 보내주셔서 제가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검사장님은, 조만간 뵙겠습니다.

석호 부 그래, 주말에 시간 좀 비워놔. 골프라도 한번 가야지.

서장 그럼요. 이 팀장도 같이 가자고

석호 골프 안 칩니다.

서장 배우면 되지. 젊은 사람들은 금방 잘 따라잡아. 그럼 이만.. (눈치, 문닫고 나가고. 석호모 얼굴에서 미소 사라지고. 석호 여전히 앉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에 눈치주면, 아버지 다른 곳 보고)


CUT TO 직원들 줄줄이 음식 가져오고


석호 부 (눈도 안마주치고) 음식 들어온다. 언제까지 서있을거야?

석호 (길 비켜주려 어쩔수없이 착석, 한정식 한 상 차려지고, 직원들 나가고)

석호 모 식사해. 지금까지 병원에 있었다면서? 티비로 보니까 멋있더라, 제복도 잘 어울리고.

석호 부 허험.. (수저 들고, 석호 마지못해 따라 들고)

석호 모 사람들 전화 받느라 많이 바빴어. 아들 잘 뒀다고 난리들이야.

석호 부 연끊고 지발로 걸어 나간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무슨 소리야?

석호 모 옛날 일을 꺼내고 그래? 여기까지 불러놓고 또 싸울거야?

석호 부  부모 자식이 싸워? 집구석이 어떻게 생겨먹으면, 자식이 부모하고 맞짱을 뜨고 싸우나?

석호 모 여보

석호 부 당신이 이렇게 굽히고 들어가니 애가 저 모양이야. 지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줄 알잖아!

석호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잘못한 거, 하나 쯤은 아십니까? (석호 부 뭐야??)

석호 모 석호야

석호 자잘한 거는 숨길 수 있어도, 제일 큰 거 하나는 숨겨지지 않잖아요. 아들 잘못 키운 거. 저, 잘못 키우신거요. 그건 세상도 알고 저도 아니까, 이젠 아버지도 아셔야죠.

석호 부 봐봐, 저.. 고개 빳빳이 들고 되려 큰소리 치는 거. 아직도 멀었어. 싹싹 빌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하는 판에 ..

석호 빌어야 할 잘못, 한 적 없습니다. 두분과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을 뿐 입니다.

석호 모 석호야. 너 나가고 지금까지, 할머니 돌아가셨을때 얼굴 본 게 다야. 우리끼리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잖아.  

석호 말씀 드렸습니다. 할 일 다 마치면, 그때 돌아간다고요.

석호 부 할 짓이 아직도 남았어? 무슨 짓? 경찰 짓, 빚 갚는 짓, 참회하는 짓, 네가 그렇게 원하는 그 놈 잡는, 말도 안되는 짓?

석호 모 (제지) 난, 이만큼 했으면, 너나 우리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이제 그만 네 인생 살아야지.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잖아.

석호 죽은 사람은 안 돌아오지만.. 산 사람은, 돌아왔습니다.

석호 모 응? (석호 부..?)

석호 시율이 동생이요. 시율이가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저에게 부탁했던, 그리고 두 분이 지구 끝까지 빼돌려서 저랑 못 만나게 했던, 그 꼬맹이요. 그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석호 모 돌아와? 한국에?

석호 예. 얼마전에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빚은, 이제부터 갚는 겁니다. 두 분은 ... (꾹참) 식사 맛있게 하시고, 들어가십시오. 가보겠습니다 (일어나 인사, 뒤돌아 문쪽으로)  

석호 모 (떨림) 네 잘못이 아니었어! 알잖아. 우리 잘못도 아니고, 그때는... 그 상황에서는, 그게 모두에게 최선이었어!

석호 .. (참고, 천천히 다시 돌아서고) .. 알고있습니다. 어머니께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거. 저를 위한, 저만을 위한, 최선이셨다는 거요. 그래서 이제는 어머니 대신 제가, 최선을 다 할 겁니다. 말씀하신대로, 제 잘못이 아니었다면, 더 슬펐을겁니다. 그 아이한테 뭐라도 해 줄 만한, 명분이 없었을테니까요. 차라리, 제 잘못이라 다행입니다. 이제 그만 숨기고, 그만 .. 아닌 척 하고, 그 아이한테,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할 겁니다.      

석호 모 너 그때 어린 애였어. 지금 네가 봐봐, 겨우 열다섯살 짜리가 뭘  할 수 있는데?

석호 그래도 열다섯이었어요. 시율이는 열다섯에 자기 엄마를 살리려다 죽었고, 같은 열다섯이던 저는, 지금까지 숨어 있어요, 두 분덕에, 아주 안전한 곳에서, 지금까지.. 이렇게 숨어 살았어요.   

석호 모 감당 못할까봐 그랬어. 너무 큰 일 이라서, 너한테 버거울까봐.

석호 어머니한테 버거우셨죠. 제가 서울 법대 못 갈까봐. 두분처럼, 법관.. 못 할까봐. 그런데, 어머니. 열다섯이던 제가 그렇게 걱정이 되고, 그렇게 불안정한 어린애였으면.. 그 아이는, 최소한 그 아이는.. 보호하셨어야죠. 걔, 겨우 열 살 이었는데 (눈물 흐르고) 가족 잃고, 기억 잃고, 말까지 잃은 애를, 그렇게 해외로 자꾸 빼돌릴게 아니라.. 나 숨기셨듯이, 아무도 모르는 안전한 곳에서, 안아주고, 감싸주고.. 네 잘못 아니다... 나한테 그랬듯이, 그러셨어야죠. (석호 부모 외면. 석호, 눈물 닦고, 차갑게) 무서우셨죠? 비난 받을까봐. 수근거릴까봐. 감당 못하는 건, 내가 아니라 두 분이셨어요. 난 할 수 있었는데, 두 분은.. 준비가 안되셨던 거에요. 내가 사과 할 준비, 내가 비난 받고, 그러다 언젠가 용서 받을 준비, 그리고 내가.. 내신 떨어지고, 수능 망치고, 서울대 못 갈 준비!! (피식) 그 준비가 안되셔서, 그렇게 숨기고, 피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게 하셨어요 (석호 모 골치) 한번만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릴께요. 저는, 집을 나온게 아니라, 학교 기숙사로 들어간겁니다. 할 일이 있어서, 목표가 있어서 경찰대를 갔구요, 그걸 어린 반항심에, 두분과 싸우고 집을 나간거다 생각하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오해십니다. 사실이에요. 그때 정말 많이 실망했지만, 이젠 이해 합니다. 맞아요, 최선이셨어요. 두 분의 자존심, 체면, 우월감, 오만함.. 별 수 없잖아요. 두분한테는 그게 최선이었는데.. 그리고 이제는, 이게 저의 최선입니다. 실망하시더라도, 저처럼, 이해 하는 척 하세요. 저는 그 아이에게, 갚을 게 많습니다. 제가 진 빚, 그리고 두 분이 진 빚.. 제가 다 갚을 겁니다.


(정자세 45도 기계적 인사. 돌아서서 나가고, 석호 어머니 울음 터뜨리고)     


6 회상

20년 전, 12월 29일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석호, 간밤에 온 메세지 확인


/석호야, 우리 유리.. 잘 부탁해. 너만 믿는다/


어린 석호 뭐야? 좀 더 키워서 데려온다니까. 아, 짜식.. 급하기는.. ㅎㅎ

(샤워실로 향하고, 룰루랄라 흥얼거리고)


디졸브 샤워 마치고 거울보고, 머리 보고.. 로션 바르며 창밖을 보는 석호, 소복히 쌓인 눈, 반짝이는 햇살


어린 석호 야, 나가 놀기 딱 좋네. (시간 보고) 아직 안 일어났겠지? 가서 놀래켜 줘야지


7 (다다다 교회 마당 지나는 석호, 손에 든 선물 가방, 할아버지 급하게 불러세우고)


할아버지 석호야! 아침부터 어딜 또 가?

어린 석호 시율이네요. 오늘 유리 생일이잖아요. 몰래 가서, 대문 앞에 눈사람 하나 만들어 놓을 라구요

할아버지 아냐, 안돼... (불안) 아니, 거기 못 가.. 너, 저기.. 엄마가 아프단다. 간단히 짐 챙겨서 얼른 내려가자.

어린 석호 엄마가요? 왜요?

할아버지 저기... 어제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갔대. 됐다, 가방은 나중에 할머니보고 챙겨 놓으라 그러고, 얼른 차 타. 가자.  

어린 석호 많이 아프대요? 근데, 할아버지, 잠깐만 시율이네 들려서 이것만 주고 가도 돼요?

할아버지 아니야, 이 시간에 남의 집을 어떻게 가? 그것도 쉬는 날.. 걔네 아버지 어제 야근했다며? 늦게까지 좀 자게 놔두고, 얼른 갔다가 올거니까, 그때 만나서 줘.  차 타! 가자!


(석호 등떠밀려 차에 타고, 불안한 표정의 할머니 배웅, 몰래 한숨 쉬는 할아버지.. 차 운전하고, 큰 길 나서면)


어린 석호 (전화) 안 받네? ... (메세지 시율아, 난데, 나 지금 부산 가야돼. 엄마가 아프대. 오늘 유리 생일 파티 못가겠다. 갔다와서 꼭 선물 준다고 전해줘? 미안하다고? 있다가 다시 전화 할게. 일어나면 전화해.


(할아버지 거울로 석호 보며 표정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석호, 창밖보며 실실 웃고, 이어폰 꽂고)  


7 도심. 운전하는 석호, 여전히 생각 중


8 회상, 며칠 후

부산, 어머니 차 안, 싸움


어린 석호 아, 왜? 싫어! 할아버지랑 살거야! 왜 갑자기 외고를 가? 그것도 부산까지 와서?

석호모 언제까지 이렇게 흩어져서 사니? 이제 다 컸으니까, 엄마가 바빠도 너 혼자 잘 할거고.. 너 대학 가기 전에 남들처럼 같이 한번 살아보자고. 여지껏 그런 적 없었잖아.

어린 석호 없었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없어도 돼. 왜 그래, 갑자기? 그리고, 왜 학원을 엄마 맘대로 등록해? 나 서울 갈거야. 거기서 다니면 되잖아.  

석호모 할아버지 할머니 이제 연세 드셔서 너 힘들어. 맨날 밴드 한다고 놀러나 다니고.. 너 이제 고등학생이야. 엄마가 옆에 붙어서 공부 시킬거니까, 그런 줄 알아. 내려, 다왔어.  

어린 석호 아, 안 간다고! 공부 서울가서 하면 되잖아. 그리고, 내 전화기 줘. 왜 뺏어가? 집 전화도 다 없에고?

석호모 들어가.

어린 석호 전화기 주면 갈거야.

석호 모 학원 갔다와서 줄게.

어린 석호 거짓말 마. 몇 번째야? 그래놓고 맨날 아빠가 가져갔다 그러고, 아빠가 주지 말랬다 그러고..

석호모 진짜야. 아빠가 가져갔어. 내려. 학원 늦어.

어린 석호 (따지려다 뒷차 빵빵, 돌아보고, 어쩔수 없이 내리고) 에이씨..


CUT TO 석호 모, 운전해서 멀어지고, 석호 체념


어린 석호 내가 학원 가서 공부하나 봐라. 올 빵점이 뭔지 보여준다...

(터덜터덜 학원으로 들어가고, 입구 경비실, 시무룩) .. 안녕하세요.. (계단 올라가려다 쭈구리고 앉아 한숨)


(경비 아저씨 휴대용 티비로 뉴스 흘러 나오고)


기자 /.. 에서 성인의 손가락 피부 조직 6점을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잘려진 이 피부 조직이, 사건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50대 남성의 것으로 추정하고, 혈액형과 지문 등을 통해, 신원을 파악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미궁에 빠졌던 상도동 경찰 가족 살인 사건에도, 한줄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어린 석호 상도동? (슬며시 일어나 경비실 티비 앞으로, 머리 밀고 화면 보면)


/자료화면/ 노란 줄 쳐진 사건 현장, 경찰들, 동네 주민들.. 석호 놀라고


기자 / 중학교 졸업식을 앞둔 어린 아들과 어머니가 참혹하게 살해된 평범한 가정집.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발견된 6점의 지문.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주민들은, 오늘 발견된 이 지문으로, 숨진 남성의 신원이 밝혀진다면, 집주인인 현직 경찰관 송모씨와의 관련 여부도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민1, 음성 변조/ 무섭잖아요, 간도 크지.. 아니, 어떻게 경찰 집에 들어가서 가족을 죽여? 아유, 아저씨 참 좋은 사람인데..

/주민2, 음성 변조/ 만약에 이집 아저씨가 전에 잡아 넣었던 범죄자가 그런거라면, 차라리 잡기 쉽지 않을까요? 지문 확인을 빨리 해서, 신원이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리 석호 (멍) 아저씨.. 저거.. 언제 사건이에요?

경비 며칠 안됐지? 지난 주였나.. 에이그, 어떤 미친 놈이 경찰한테 원한 있다고 가족을 죽이냐. 무서워서 경찰 하나.   

어린 석호 아저씨, 전화 있죠? 잠깐만 빌려주세요, 급해서 그래요..


CUT TO

석호 (길가 상가 앞 빈 주차칸, 비상등 켜고 잠시 정차. 마음 가라앉히려 애쓰지만, 감정 북받혀 쉽지않고, 점점 분노 고조되고, 핸들 쾅쾅 내리치고, 꾹 감은 눈에서 눈물 흐르면)


/INS/

어린 석호 (울며) 유리 어디있어? 찾아야돼!

석호 모 치료 받아야돼. 좋은 병원 있어서 거기로 보냈어

어린 석호 좋은 병원 좋은 병원!!! 벌써 몇 번째야? 왜 자꾸 숨겨? 일부러 빼돌리는 거지, 내가 찾아낼까봐?

석호 부 어른들 일이야. 왜 네가 자꾸 나서?

어린 석호 내 책임이라고.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구!

석호 부 잊어. 친구는 죽었고, 너는 걔 가족도 아니야. 됐지?

어린 석호 아빠는 그게 돼요? 그렇게 간단해? 내가, 나 때문에 그 사람들이 죽었는데?

석호 모 (단호)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네 잘못 아니야.

어린 석호 어떻게 아니야? 내가 그날..

석호 부 (버럭) 그만 하라고! 말했지! 네 잘못 아니고, 너는 거기 없었고. 그러니까 너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엄마아빠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모른 척 해.

어린 석호 (울음 그치지 못하고) 유리 만나게 해 줘. 한번만 보게 해줘. 진짜 공부 열심히 할게. 약속했잖아, 지난 번에 1등하면 유리 있는 병원에 데려다 준댔잖아!

석호 모 미국 갔어. 이제 안 돌아와.

어린 석호 왜? 언제? 나한테 말도 안하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보냈어?  

석호 모 한국에서는 치료가 안돼. 미국에 범죄 피해아동을 전문하는 의사가 있다 그래서..

어린 석호 거짓말. 거짓말이지? 내가 자꾸 찾아다니니까. 못 만나게 하려고 더 멀리 보낸거지?

석호 모 석호야, 너... 고등학생이야, 언제까지 그 집 일에 잡혀있을거야? 서울대 입시반 시작했어. 이제 다 잊고..

어린 석호 잊어...? 잊으라고? .. 그래, 나는 시율이를 잊을께, 엄마는.. 서울대 잊어. 나는 유리, 없던 일로 할께, 엄마는, 나 서울 법대 가는 거, 없던 일로 해. 됐지?

석호 부 이석호!

어린 석호 공부 하라며? 해요. 할거에요. 공부해서, 대학가고, 기숙사 가고... 그러고 다시 유리 찾을거야. 나 혼자.. 더 이상 엄마아빠한테, 유리 어디있냐, 데려가달라, 두번 다시 묻지 않을거야. 대신, 내가 찾으면, 내가 혼자 찾아서 걔 데리고 오면, 그때, 걔한테 사과해. 나한테 말고, 유리한테. 다 밝히고 빌어.

석호 모 그래, 알았어. 그렇께. 그러니까, 대학 갈 때 까지만, 지난 일은 다 잊자. 그때까지, 정말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최선을 다 하고 있어. 알잖아. 창률이 형 의사 만들고, 유리 좋은 데서 치료 잘 받게 하고 있잖아, 그거 다 너희 할아버지가 교회까지 팔아서..          

어린 석호 (비웃음) 베푸는 척 하지마. 죄값이야.

석호 부 저 녀석이.. (석호 모 막고)

어린 석호 (싸늘) 나가세요. 공부할거니까. 공부하고, 대학 가고.. 그래야 엄마아빠 얼굴 두 번 다시 안 보니까.

석호 모 그래, 오늘은 그만 하자. 얼른 마음 잡고, 너 할 거 해.

(석호 부 부르르, 석호 모 남편 팔 잡아 끌고 나가고, 문 쿵)     


CUT TO 석호 차 안

석호 (전화 지이잉, 확인하고, 크게 숨 한번 쉬고, 태연한 목소리) 예.


8 병원 복도/시환


시환 식사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좀 급한 사안이라서요

석호 괜찮아요, 무슨 일입니까?

시환 여기 이정아 경사가 와있습니다. 피해자가, 집 냉장고에, 태반 같은 걸 보관하고 있답니다.

석호 태반.. 같은거요?

시환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날 장씨한테 맞다가 잠깐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보니 아무도 없었는데, 온 방바닥에 출혈이 심했답니다. 다리 사이에 뭐가 나와 있어서, 처음에는 아기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핏덩어리였다고요, 마땅히 버릴 방법도 없고 해서 냉동칸에 넣었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혹시 태반일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리고 장씨는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르구요.    

석호 잠깐, 그럼 산모가 자기 아기를 아예 보지 못한거네요?

시환 예... (실망) 정황상, 아이가 나왔을때, 장씨 혼자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유기했고, 아이 엄마는 아이가 살아있었는지 확인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살인죄 증명하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석호 그래도, 태반이라도 있으면, 출산했다는 건 확실해졌네요. 거기서 만나요. 지금 출발합니다.

시환 병원으로 안 오시고요? 집은 저 혼자 가도 되는데..

석호 이정아 경사 지금, 다 녹음 하고 있는거죠?

시환 예. 차 형사님하고 같이 계십니다. 지금까지 증언한 거, 전부 영상으로 찍었습니다. 피해자 동의 받았구요. 재판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석호 차 형사요 (안도) 다행이네요. 그쪽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게 맡겨놓고, 우리는 피해자 집에서 만나요. 지금 바로 오죠?

시환  알겠습니다, 출발합니다.

석호 (끊고, 출발하려다 멈칫, 잠시 생각 후 문자 넣고, 내려놓고 운전)


/INS/ 휴대폰, 문자

류 형사와 피해자 집으로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8 병원, 피해자 옆에 정아, 은석 문자 띵

은석 문자 확인하고 떨떠름, 그냥 집어넣다가 다시 꺼내고.. 할 말 고민하다 달랑 /수고하십시오/ 다시 한번 망설이다 보내고. 주변 힐끔, 안 보낸 척


(문 똑똑, 지영 도시락 들고 들어오고)


지영 어머, 두분이 같이 계시네? 정아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정아 예에, 사모님... 바쁘셨죠?

지영 사모님이 뭐야.. 왜 그래, 늙어보이게. 다들 뭐 좀 먹었어요? 다같이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더 사올걸  

은석 저희는 괜찮습니다. 도시락을 가져오셨어요?

지영 응, 환자분 맛있는 것 좀 먹고 힘 내라고.. (H 마주보고 미소) 이 팀장님도 계속 매점에서 빵만 사먹는거 같아서... 잘했다, 오늘 교대해 주는 거에요?

은석 아닙니다. 형님이 잠깐 얼굴 비추라고 하셔서 들렀습니다.  

지영 (피식) 이 아저씨는, 지는 안 오면서 남을 시켜? 웃겨, 아주... (정아에게) 정아씨도 이 사건 같이 했어요?

정아 아닙니다, 저는 그냥..

은석 제가 같이 오자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여자분이라 아무래도 정아가 있어야..

지영 그럼요, 잘했어요. 아우, 같이 있으니까 보기 좋다. 옛날처럼, 손발이 착착 맞는 거 같애.

정아 (어색, 불편) 아, 예.. 저기, 저는 그만.. 아이를 맡겨놔서요..

은석 데려다 줄께

정아 아니야, 됐어. 자리 지켜.

지영 갔다와요. 나 교대 시간 아직 멀었어. 이 분 식사 돕고 있을테니까, 같이 점심 드시고 천천히 와요.   

은석 감사합니다.

정아 (찡그리고 얘 뭐니..??) 죄송합니다, 피곤하실텐데.

지영 자기들이 더 피곤하지, 내가 뭘 피곤해. 우리 아저씨 때문에 잘 알아요. 침대에 한번 붙으면 안 떨어져. 얼른 가요, 내가 꼭 붙어있을께 걱정말고.  

은석정아 (꾸벅)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지영 우리는 안보는 게 희소식이야. 죄 졌거나 다쳤거나.. 그럴때쯤 한번 봐요.

(세 사람 웃음, 둘 나가고. 지영 한숨) 에이그, 그러게 왜 그랬니. 잘 어울렸는데.. (환자 돌아보며 식사 꺼내고)   

9 분식집

폰 보는 은석, 그런 은석을 보는 무표정 정아

음식 나오고, 정아 쪽으로 떡볶이 밀어주는 은석


정아 분식 안 좋아하잖아.

은석 (얼굴 안보고) 네가 좋아하잖아

정아 분식먹고 일 못한다며

은석 (얼굴 안보고) 쉬는 날이야

정아 쉬는데 왜 불러내?

은석 (얼굴 안보고) 그럼 일 하는 날 불러내?

정아 왜 불러내? 이러고 싸울걸?

은석 (눈 마주치고) 싸우는게 아니라, 대화하는 거야. 이렇게 얼굴 보고, 대화. 원래 사람하고 사람이 만나면, 이렇게 얘기해. 밥도 같이 먹고, 시간도 보내고 (정아 말없고, 은석 떡볶이 찍어서 내밀고, 정아 받고)

정아 사모님이 다 말씀 하실텐데? 우리 같이 있는 거 아시면, 문형사님 난리 날걸?

은석 일 때문에 간거야. 얼떨결에 피해자 진술 받았고. 좋아하실걸?

정아 (체념) 얼른 먹고 들어가. 추가 서류 내야지.

은석 커피 마실거야.

정아 (한심) 커피 안 좋아하잖아.

은석 너 좋아하잖아.

정아 왜 그러니 정말? 애 데리러 가야돼.

은석 사들고 가.

정아  마음대로야? 물어도 안 보고?

은석 네 마음대로 하게 놔뒀다가 다 깨졌어. 이제부터는 내 맘대로 할거야.

정아 죄책감 유발하지 마. 하나도 안 미안해.

은석 미안하지 마. 나 하나면 돼.

정아 뭐가?

은석 미안한 사람 (...) 우리 둘 중에 미안한 사람은, 나 하나면 된다고. 넌 미안하지마. 내 잘못이니까, 내가 바로 잡을거야.

정아 아무것도 하지마. 끝났어.

은석 내가 안 끝났어. 내가 너를.. 나를...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내 인생한테 너무 미안해. 다시 시작할거야 (정아 한마디 하려) 내 인생 내가 똑바로 고치는 거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그냥 봐. 너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해. 네 맘에 들때까지, 나 혼자 다 할거야. 그냥 옆에만 있어 (정아 다시 한마디 하려) 당당하게! 큰 소리 팡팡 쳐. 네 나이에 애 하나 있는 게 뭐가 챙피해? 왜 형수님 앞에서 눈치를 봐?  

정아 (시선 피하고) 무슨 눈치를 봐..

은석 눈치 보지마. 지금 나한테 하는 것처럼, 당당하고 떳떳하라고. 바보같이 주눅 들지 말고.

(정아 말없이 식사, 은석 보고. 물 따라주고)


10 원주 병원

침대 양쪽으로 말없이 선 두 사람 – 창률, 지율. 호흡기 낀 아버지 입김 불었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디졸브 로비 의자, 창률 물 한병 내밀고, 쳐다도 안보는 지율, 앞에 내려놓고


창률 (폰 꺼내 보여주며) 사진 좀 골라봐. 집에 있는 거 몇 개 찍어왔어 (지율 곁눈으로 관심없음) 영정 사진 하려고. 아직 준비를 못했어. 좀 옛날 사진들이긴 한데, 이거밖에 없어.  

지율 (그제서야 폰 받아들고 툭, 툭, 한 장씩 넘기고. 다 마음에 안 들고, 폰 내밀고)

창률 (돌려받아 다시 보며) 싫다그러셔도 몇개 찍어놓을 걸 그랬나봐. 닥쳐서 찾으려니 변변한게 없네.

지율 여권 사진은?

창률 여권 만료된지 오래야. 병원에 계신 게 몇 년인데. (다른 사진 찾아 보이며) 이거는, 너무 젊은가?

지율 (보면, 카메라 클로즈업, 경찰 제복입은 시절. 외면)

창률 안되겠지? 경찰 그만두신지.. 집에 가서 더 찾아볼게. 몇장 추려서 보낼테니까 네가 골라. 미리 확대해 놓고, 액자랑 다 준비해야지. 너도, 마음의 준비하고.

지율 (일어서고)

창률 식사라도 하러 가자. 나도 아직 안 먹었는데.

지율 (답 없이 돌아서 나가버리고, 혼자 남은 창, 한숨, 의미없이 다시 사진만 들여다보고.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지율, 물병 열어 벌컥벌컥, 창률 보면)

지율 대답해. 그때, 나.. 왜, 미국 보냈어?

창률 치료 잘..

지율 치료 잘 받게 하려고.. 그딴 거짓말 하지 말고. 여기서도 충분히 치료 할 수 있었어. 쫒아낸거지? 이유가 뭐야? 그렇게까지 해서 하나 남은 내 아버지까지, 너 혼자 가질려고?

창률 나아지는 게 없었어. 잠도 못자고, 못 먹고.. 주사약에만 의존했어.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말도 안 하고..  

지율 (노려보고) 네가 못하게 했잖아.

창률 ..! (보면)

지율 내가 어릴 적 기억이 없다고 방심하지마. 네가 한 말은 다 기억해.


/INS/ 어린 창률, 지율에 협박

“다 잊어. 아무것도 기억하지마. 한마디도 하지마. 너 입 열면, 우린 다 죽어. 멀리 가. 다시는 돌아오지마...”


창률 네가 다칠까봐 그랬어. 어머니랑 시율이처럼.. 너도 그렇게 될까봐.

지율 무슨 근거로? 그렇게 될까봐... 뭔가 아는 게 있는 것 처럼 들리네. 두 사람이 죽고 나서, 나도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예감, 같은 살인마한테 죽을 것 같은 근거, 증거, 정황.. 범인 누구야? 너야?  

창률 (하아.. 도리도리) 아닌거 알잖아. 난 그때 도서관에 있었어.

지율 그런다고 못 죽여? 다른 사람 시킨 거잖아. 완벽하네. 사람 많은 도서관에서 밤샘 공부했다, 알리바이 좋고, 목격자 있고... 가족들 모르게 사채로 얻은 돈 봉투 하나 쥐어주고 나 대신 죽여라..

창률 유리야..

지율 아버지는? 관련있어?

창률 없어. 그것도 네 오해야. 아버지가 왜 그런 짓을 해?

지율 ... 증거있어? 아니라는 증거?

창률 증인은 있어. 나. 내가 증인이야. 아버지가 아니라는 증인.

지율 (헛웃음) 제일 유력했던 용의자가 너야. 증인 자격 없어. 공범 자격은 충분하지 (물병 들고 일어나고) 아버지한테 전해. 가시기 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나한테 다 털어놓고 가라고. 만약에, 정말 만약에 끝까지 덮고 간다면, 나도 거기까지야. (피식, 혼잣말) 죽어서도 안 본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였네. 남들도 이러고 사나? 죽어서도 안 볼 만큼 저주스러운 사람을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창률 너 상처 큰 거 알지만, 아버지는 정말 아니니까.. 말 좀 가려서 하자.

지율 (본다) 무슨 상처? 없어. 나한테 남은 건, 상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차라리 죽었다고 해야지. 난 그때, 죽었다 살아났어. 살아는 났지만, 지금도 내 의지로 살아지지가 않아. 재미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냥 숨만 쉬어. 그러면 하루가 가거든. 아버지처럼 저렇게... 그리고, (본다) ... 너처럼.

창률 (눈 마주치고) ... 미안해.

지율 지겨워. 연기하지 마. 너라는 거 다 알아. 때를 기다리는 거야. 마지막 딱 한번 뿐인, 완벽한 타이밍. 아버지 돌아가시면, 네 편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때를 기다리고 있어. 네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두고 볼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병아리처럼 혼자 살아봐. 매일매일의 공포에 목이 졸리고, 현실인지 환상인지도 구분 안되는 정신 나간 꿈 속에서 길을 잃어도, 내 앞에서 죽은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걸 감사해야 돼. 너는 그렇게 살아. 평생을.. 죄책감, 후회, 미안함.. 네가 그렇게 병들어 죽어가는 걸 지켜볼거야. 절대! 억지로라도.. 도리, 예의, 책임감.. 그딴 핑계 대면서,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 마. 난 그때 죽었어. 네가 죽였어. 그리고 이젠 네 차례야. 너는, 내 손에 죽을거야 (일어서 걸어가고. 창률 두 손에 얼굴 파묻고, 깊은 한숨, 지율 걸음 멈추고) 그리고 더이상, 효자인 척, 아들인 척... 오빠인 척, 슬픈척 하지마. 역겨워 (나가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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