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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이 안 되는 일

상황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던 감정

언니가 구치소에 입소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법무부에서 금요일 오전 9시에 보낸 문자를 월요일 오전에 확인했다. 눈을 꿈벅거리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이게.. 이게 맞아? 생각을 하며 언니한테 전화를 했으나 놀랍게도 정말 받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보니 맞다는 것이다?


아.. 이게 뭐지..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쉬어 지질 않았다. 알고 지낸 지 4-5년 된 남자가 있는데 그분을 스토킹 했다는 죄목이었고 징역 8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걸 느꼈다.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구속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나는 얼마나 집요하게 피해를 줬기에 사회와 격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졌는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그날 점심은 결혼을 계획 중인 남자친구의 누나랑 점심을 먹었는데 손을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누나는 내가 그 자리가 긴장되고 불편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손을 너무 떨어서 뭐지 싶기도 하셨을 것 같다. 점심밥은 또 왜 이렇게 맛있는지. 맛을 즐기기도 아까운 시간에 즐기지도 못하고 마음이 정말 빛이었다.


다음날로 면회를 잡고 이모들에게 전화를 했다. 그 남자분의 존재에 대해서 이모들과 나는 알고 있었지만 언니가 그분께 끼치고 있는 피해의 심각성은 몰랐기에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듯 소식을 나눴다. 나는 엉엉 울었다. 살면서 그렇게 서럽게 울어본 적이 없다. 나는 너무 슬프고 절망스러웠다.


영치금이 만원 밖에 없었다. 그 안에서는 돈이 없으면 너무나도 비참해진다고 해서 우선 10만 원을 입금했다. 옆에 있던 남자친구는 10만원이 뭐냐며 50만원은 입금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뭘 잘했다고 50만원이나 입금해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뭐가 이쁘다고 50만원이나 입금하냐고 얘기해 버렸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은 가정불화로 인하여 집에 불을 질러 방화죄로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었는데 또다시 가족의 범죄와 구속사실을 마주하니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더군다나 언니는 나와 함께 가정폭력과 불화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아닌가. 실질적 가장이었던 언니 덕분에 많은 힘을 얻고 살아남은 나는 언니의 범죄와 구속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도 어려웠고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시간 속에 매일을 미친 듯이 울면서 보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느꼈었던 두려움과 절망감이 똑같이 느껴졌다.


일주일 뒤 남자친구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에 허덕이는 나에게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일본 비행기 티켓과 신용카드를 쥐어주고 나를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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