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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월 Oct 25. 2021

[공간_나의] 살아'온' 공간 - 상

성인이라는 가면을 쓴 철부지 대학생에서부터 사회 초년생까지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여행 전 설렘을 느낄 때 늘 일상의 감사함을 스스로 그리고 함께 상기시키기 위해 아내와 공유하던 말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만약 돌아올 집이 없다면 그 여행이 설렘만 가득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차원을 넘어선 멋진 여행가들도 많습니다만.


 '집'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참 중요하고 소중한 공간입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타지 생활을 한 저에게는 더더욱 집이라는 것은 애틋한 공간이고 저만의 소중한 공간이죠.




 지금 저는 생애 첫 주택마련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상투를 잡은 것 아니냐며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짜고짜 동네를 물어보며 저의 수준을 파악해보려고 하거나, 듣고 안타까워하더나 왜 거길 샀느냐며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분들도 다 저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들을 해주시는 거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습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온 친구들이 다 그렇겠지만 저도 성인이 된 이후로 참 많은 이사를 했었습니다. 시간 순서대로 되짚어 보면,

 하숙집 → 자취 (투룸 셰어) → 군대 → 대구 본가 → 원룸텔 → 반지하 원룸 → 사택 → 전세 → 자가의 순이 되겠네요. (ㅁ+ 한자를 누르면 꼰대라던데 자연스럽게 눌러버림)




 대학교에 입학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멀리 혼자 보내는 게 부모님들께서는 걱정이 많이 되셨나 봅니다. 엄하디 엄한 하숙집에 들어가서 1년을 생활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 부부가 운영하시는 하숙집이었는데, 집에서 맥주 한 캔 마실수가 없어서 늘 몰래 몇 캔 들고 들어갔다가 쓰레기도 몰래 들고 나오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층에 3-4명? 4-5명 정도 생활했는데 화장실이 하나라 몇 번 죽을 고비로 고생했던 기억도 나고요. 그때 의외로 친하게 지냈던 몇몇 친구들 얼굴도 생각이 나네요. 다들 잘 지내고 있겠죠?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친한 형이 투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전셋집이다 보니 전세 빼기가 번거롭기도 했고, 휴가나 외출 나오면 지낼 곳도 필요하고 해서 집 관리해주며 생활해줄 사람들 찾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아무 경쟁 출혈 없이 제가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았죠. 여기 또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는데, 군대 가기 전부터 함께 지내고 있다가 군대 가기 전날 저와 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대망의 입대날 아침, 옆에서 같이 잔 형이 일어나는데 허리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의사는 아니지만 누가 듣더라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소리와 그리고 비명소리도 함께. 바로 병원으로 실려가고 결과는 허리디스크가 심각해 급한 수술이 필요한 상황. 그래서 갑작스럽게도 저는 1년은 그 투룸에서 혼자, 나머지 2년은 함께 룸메이트가 되어 지냈습니다. 그 형 덕분에 정말 좋은 여건에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부모님들과도 안부인사를 여쭙고 지냈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우리 철없는 형이 잘 지내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입대 후 전역을 하고 대구 본가로 들어갔습니다. 경제적 독립을 핑계로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취업시장에 뛰어들기보다는, 쉬엄쉬엄 놀았습니다. 남들 다하는 어학 연수한 번, 휴학 한번 못하고 4년 내리 학교를 다니고, 2년 내리 군대를 다녀왔더니 철없는 마음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게 6개월을 영어공부와 운동만 하며 내리 놀았습니다. 좋은 리프레시 계기였고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이때부터 집이라는 담벼락의 높이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홍대의 한 원룸텔을 잡았는데, 월세가 50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하숙 때보다 여건이 좋아서 개별 화장실이 있는 원룸텔이었습니다. 물론 샤워한 번하고 나오면 방안에 습기로 가득 차긴 했지만요. 옆방의 통화소리도 잘 들리고 가끔 술 취한 다른 사람이 제 방문을 열려고 할 때도 있었고요.



 6개월을 실컷 놀고 다행히도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직장은 아니었지만 나름 맘에 들고 재밌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직장은 압구정인데 홍대에서 출퇴근 하기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모아둔 돈을 모아 압구정에서 최대한 가까운 자취방들을 알아봤습니다. 많은 곳들을 알아보면 볼수록 부동산의 담벼락은 더더욱 높아만 가는 듯했습니다. 정해진 예산안에서 입지를 챙기자니 여건이 엉망이고, 여건을 챙기면 챙길수록 점점 직장과 멀어지더군요. 사당 쪽을 전전하며 찾다가 결국 선택한 곳이 낙성대였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지역이에요. 사당역과 서울대 봉천동 사이에 있는 언덕형의 지형을 가진 낙성대, 인헌동이었습니다. 거기서 6-7년을 살았던 것 같네요. 보증금 1000 / 월세 40? 45?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신축 빌라 반지하였는데, 9평 정도라 혼자 생활하기에 사이즈가 정말 넓고 좋았습니다. 희한하게도 처음 하숙집 주인 부부네 처럼 또 독실한 크리스천에 엄하디 엄한 집주인분들 만났습니다. 같은 건물 5층에 거주하셨는데 그 덕에 빌라는 늘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좋은 빌라였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 가끔 집에 문제가 있고 해도 빠른 대처를 해주셨었고요. 마지막에 퇴거 때는 보증금에서 복비 차감하고 나가라는 둥 돈 앞에서는 좋은 사람 없었지만요.



 오래 살았던 반지하 월세방을 떠나게 된 건 운 좋게 사택 아파트에 지원했는데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종 환경과 근속연수 등을 점수화하고 사업부장의 추천을 통해 선정했는데, 출장 중에도 신경 써주신 사업부장님 덕분에 출장 중에 좋은 소식을 듣고 귀국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택은 집안이 오래되고 다들 험하게 다루었는지 엉망이긴 했으나, 강남권 아파트 15평이라 그동안 원룸과 반지하를 전전하던 저에게는 새로운 환경이었습니다. 회사에 충성을 다해야겠다고 짧은 (?) 다짐도 했었죠. 당시 사택 거주 계약기간은 3년이었습니다. 연장은 불가한 조건이었고요. 마지막 세입자를 받고 3년 후에는 아파트가 매도 예정이었습니다. 아파트 거주는 제 출퇴근 여건을 확 바꿔놓았습니다. 출근도 가까워지고 생활 여건이 상당히 업그레이드되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2년 반 정도를 잘살고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사택에서 계약 전 짐을 빼내기도 애매하고 해서 계약기간을 채우고 신혼집을 얻기로 해 함께 사택에서 반년 정도 거주하고 신혼집 전셋집을 구하기로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결정에 찬성해준 아내에게 참 고맙습니다.


20211025


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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