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번 여름휴가 때 친구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바다가 보이는 펜션에서 파도소리를 안주삼아 얼큰하게 취해보고 싶다고 했다.
"바다라면 어디든 좋을 텐데..."
친구는 일이 힘들다고, 삶이 힘들다고 했다.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은 쓸쓸함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일까. 파도소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눠 줄 친구면 되는 걸까. 난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장소를 고민했다. 그러다 매년 방문하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해수욕장을 떠올렸다. 낙산이라면 부담 없는 가격에 바다가 보이는 펜션을 알고 있었다.
"강원도 좋지"
낙산으로 결정했다. 그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닷가였다. 낙산의 짙푸른 바다와 황금빛 백사장에는 나의 잊지 못할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나에게 있어 낙산으로 향한다는 것은 겹겹이 쌓인 추억들 위로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쌓아 올린다는 의미였다.
낙산에 도착하자 친구는 대게가 먹고 싶다고 했다. 바다가 보이는 대게집에서 게다리 살을 발라 먹은 후 내장에 밥을 비벼먹고 싶다고 했다.
"대게라면 어디든 좋을 텐데..."
태풍이 막 지나간 뒤라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현지에 사는 동생에게 추천받은 대게 집도 매한가지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나는 자연스레 속초를 떠올렸다. 그곳엔 아이즈원이 방문했던 대게집이 있었다. 강원도를 방문하면 언젠간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속초라면 그리 멀지 않을 텐데... 전화를 걸어 영업 여부를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내 이기적인 욕심에 친구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더 둘러보기로 하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 대게집 문 열었다!"
유일하게 영업을 하고 있는 대게집이었다. 사거리 목 좋은 곳에 위치한 넓은 가게였다. 입구를 들어서자 BTS의 음악이 흘러들었다. BTS 멤버들의 사진과 굿즈가 눈에 띄었고 가게 한편에 'BTS의 뷔가 추천하는 맛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이즈원 대신 BTS라... 우리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친구의 시선은 여전히 BTS의 굿즈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다 뭐야? 저거 다 파는 거야?"
전시용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일종의 마케팅으로 팬들이 방문하면 좋아할 수 있게끔 꾸며놓은 것이라고 알려줬다. 친구는 BTS라는 그룹은 알지만 노래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BTS의 위상을 설파하며 그들의 노래들을 설명해줬다. 멤버들의 사진도 차례차례 보여줬다.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내 노력이 가상한지 친구는 꾸역꾸역 귀담아 들어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BTS팬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엉겁결에 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BTS팬분들께 드리는 서비스라며 콜라를 건네주고 사라졌다. 식당 종업원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서비스로 받은 콜라에 눈길을 돌렸다. 콜라에는 BTS의 뷔님께서 맛있게 드신 콜라라는 말과 함께 코로나로 힘든 시기니 만큼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너 아이즈원인가 뭔가 하는 애들 팬이라며"
나는 종업원이 갑작스레 물어보길래 순간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이즈원만큼은 아니지만 BTS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모둠회와 대게 세트를 주문했다. 소주와 맥주도 빼놓지 않았다. 음식이 나올 동안 우린 아무런 말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초저녁을 기다리는 하늘에선 옅은 분홍빛이 배어 나왔다. 갈매기들은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분주하게 날아다녔고,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바다는 일정한 간격에 맞춰 춤을 추듯 넘실거렸다.
친구는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듯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꼭 다문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미소는 마치 어둡고 외로운 듯하지만 잔잔하게 빛을 내는 초승달을 생각나게 했다.
목을 축이고 싶어 서비스로 받은 콜라에 손을 뻗었다. 감상에 젖어 있던 친구도 갈증이 났는지 손을 뻗어 콜라를 집으려 했다. 하지만 친구는 콜라가 아닌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BTS 좋아하면 이 콜라는 기념품으로 가져가"
그 정도의 팬은 아니라며 손사래 쳤지만 친구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이거라도 너한테 주고 싶은 마음이야"
어느새 파도 위로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나 둘 깨어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 밤바다를 감상하려는 여행객들의 실루엣이 어슴푸레 비쳐 들었다. 상차림의 절반도 먹지 못한 우리는 남은 대게를 싸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테라스 문을 열자 선선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파도소리 너무 좋다..."
하루가 시작과 동시에 저무는 듯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소주와 맥주를 펼쳐놓고 대게를 펼쳐 놓고 음악을 들으며 추억을 이야기했다. 만들어 온 추억과 만들어 갈 추억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금 취한 듯한 친구는 대뜸 고맙다고, 소원을 이룬 것 같다고,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향해 외친 건지, 자신을 에워싼 갑갑한 세상을 향해 외친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반짝이는 눈빛 속에 생동감 있는 무언가가 꿈틀대는 듯했다. 그 눈빛은 마치 비가 갠 하늘, 어둑어둑한 먹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강렬한 햇살과도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의 혀는 점점 꼬부라져 갔다. 오눌을 잊쥐 못할 꼬야, 다움에 또 오좌,라며 비틀거리는 몸으로 테라스와 방안을 분주히 오고 갔다. 그리곤 침대는 나에게 양보한다며 바닥에 누워 조용히 잠들었다.
테라스로 나가 파도소리를 들으며 나 홀로 감상에 젖어들었다. 맥주는 씁쓸한 듯 달콤했고 밤공기는 차가운 듯 따뜻했다. 검푸른 바다 위엔 잔잔한 빛을 내는 달이 떠 있었다. 친구의 엷은 미소를 닮은 초승달이었다. 무심코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며 웃는 친구의 얼굴이 달빛에 어른거렸다.
테라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파도소리가 사라진 방안은 쓸쓸하리만큼 고요했다.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대게의 붉은 다리와 조각난 껍데기.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BTS의 콜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친구의 옆모습. 소중히 보낸 하루의 흔적들이었다.
간단히 주변 정리를 마친 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어스레한 허공 속엔 왠지모를 아쉬움이 떠다니는 듯했다. 이 아쉬움은 무얼까. 나는 잠들기 전 문득 속초를 떠올렸다. 속초와 대게, 그리고... 아이즈원. 아주 잠시였지만 조금 슬픈 기분이었다.
훌쩍 떠나와서 미련 없이 훌쩍 되돌아 갈 수 있는 여행. 겹겹이 쌓인 추억 위로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쌓여가고 있었다.